“쉿, 장돌림의 한숨소리 들리지요?”
“쉿, 장돌림의 한숨소리 들리지요?”
  • 글·김경선 기자 |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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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ARK TRAVEL 02 한계령 옛길 트레킹

▲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옛길은 마치 정글처럼 숲이 우거졌다.

장수대에서 한계령 정상까지 옛길 뚜렷…정상에서 오색까지 옛길 소실

그 옛날 강원도 원통장과 양양장을 이어주던 한계령이 지금은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로 변해버렸다. 꼬박 하루를 다 바쳐야 험난한 고개를 넘을 수 있었던 옛 장돌림의 숨결은 삭막한 아스팔트 속에 묻혀버렸고. 하지만 그들이 넘나들던 옛길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있다. 그 길을 찾아 걸어보았다.


한계령, 오색령, 소동라령. 모두 하나의 고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지금은 넓은 국도나 그럴 듯한 터널이 뚫려있지만, 옛날에는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극복하고 동과 서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갯길뿐이었다.

한계령은 진부령·미시령·대관령과 함께 내륙과 동해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사실 한계령이라는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광복 이후 기간시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도로를 닦고 이름을 붙여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옛 문헌에 오색령이라는 지명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고개를 기점으로 인제의 한계 쪽 사람들은 한계령으로, 양양의 오색 쪽 사람들은 오색령으로, 그렇게 자신들의 편리대로 불렀을 것이다.

▲ 장수대휴게소를 지나 옛길이 시작되는 지점.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 편에는 소동라령을 가리켜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산줄기가 겹치고 포개져 지세가 험하고 궁벽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다. 책이 기록된 시기인 1530년 무렵 이미 미시령 길을 새롭게 개척해 산세가 험한 소동라령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다시 오색령이 등장한다. <대동여지도>나 <증보문헌비고> 같은 기록에 한계령을 모두 오색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오색령이든 한계령이든 반쪽의 이름뿐인 이곳에 지금은 도로가 깔려있다. 반쪽의 운명이라서 일까, 혹은 구슬픈 단조로 노래를 부르는 양희은의 ‘한계령’ 때문일까, 한계령을 떠올리면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애잔해진다.

▲ 옛길 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 길을 찾기가 힘들다.

아스팔트 도로 밑의 또 다른 길
한계령 옛길을 찾아 나서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해가 멀다하고 수해를 입는 강원도 지역이기도 하거니와 아직도 ‘길이 온전히 남아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수백 년간 영서와 영동을 이어주던 한계령. 1971년 도로가 개통된 이후로 옛길의 의미가 무색해진 이곳에 여전히 길이 남아 있을까?

속초에서 버스를 타고 오색으로 갔다. 숙소에서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나오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우선은 내일 아침 일찍 시작할 옛길 트레킹을 위해 길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다. 장수대에서 한계령까지는 최근까지 옛길의 존재가 확인됐으나 한계령에서 오색까지는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오색리 이장 이재영 씨의 도움으로 옛길을 잘 안다는 노인회장 박남규(73) 할아버지를 만났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 다녔지. 그런데 수해 때문에 최근에는 길이 거의 망가졌어. 한계령에서 금포교까지 계곡을 따라 길이 좋았는데 2년 전 수해 때문에 엉망이 됐어. 아마 길 찾기 힘들 거야.”

한계령에서 금포교까지는 계곡과 국도가 거의 일치한다. 옛길도 같은 위치에 존재했다고 한다. 44번 국도와 거의 일치하던 옛길이 갈라지는 것은 금포교부터다. 국도와 계곡이 갈라지는 이 지점부터 옛길은 용소폭포~금강문~오색약수를 잇는 등산로로 이어진다. 지금의 등산로가 옛길과 같은 경로인 것이다.

▲ 몇 해 전에 수해를 입은 탓에 계곡 주위로 돌무더기가 가득하다.

옛길 곳곳 유실되었으나 옛 운치는 여전해
옛날의 장돌림(장돌뱅이)들은 인제 원통장에서 한계령을 넘은 뒤 양양장~물치장~고성 다리바우장~간성장 순으로 장을 돌았다. 내륙의 원통장을 시작으로 장을 돌던 장돌림의 자취를 찾아 취재진도 인제 한계리에서부터 한계령을 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장수대로 넘어갔다. 원래 한계령 옛길의 시작은 한계리 쇠리마을부터지만 곳곳이 수해로 유실되고 논과 밭이 길을 막아 장수대부터 걷기로 했다. 장수대휴게소에서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휴게소 주인장 말에 따르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인근이 야영장으로 조성돼 많은 사람들이 찾았지만 수해로 계곡이 망가지면서 지금은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다고 했다.

옛길은 계곡을 건너 시작한다. 아직 갈수기라 물이 많지 않은 덕에 돌멩이를 징검다리 삼아 가뿐이 건넜다. 이곳부터 예전 숲속수련장터까지 약 1km 구간은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아마도 몇 년 전까지 수련장을 이용하던 사람들의 발길이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널찍한 숲길을 따라 20분쯤 걸었을까.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수련장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이곳에 정말 건물이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잔재하나 찾기 힘들었다. 수마가 할퀸 후 폐허로 남아있던 건물을 2년 전에 모두 철거했기 때문이다.

▲ 수해로 인해 2년 동안 출입이 통제됐던 흘림골이 최근 다시 개방됐다. 남설악의 진경을 보고자 찾아온 산행객들로 흘림골 등산로가 북적인다.

공터를 지나 숲길을 계속 따랐다.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탓에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전봇대다. 옛길을 따라 20~30m마다 서있는 전봇대는 길을 잃을 때마다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

갑자기 거대한 돌산이 길을 막아섰다. 지도를 확인하니 건천골이다. 가리봉에서 흘러나온 계곡의 물줄기는 거대한 돌덩이를 몰고 와 계곡을 뒤덮었다. 2년 전 인제를 휩쓸었던 수해의 피해가 아직도 그대로 인 것이다. 돌무덤 밑에서 조용히 흐르는 건천골은 물줄기를 감춰 더욱 처참했다.

건천골을 지나 다시 숲으로 들어섰다.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무성해진 수풀과 곳곳에 쓰러진 나무는 길과 숲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옛길에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만큼 거미줄이 많았고 걸을 때마다 발에 차이는 수풀에 시간은 자꾸 더뎌만 갔다.

길은 숨고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작은 오솔길이 뚜렷하다가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전봇대는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 그렇게 길과 숨바꼭질을 한 지 1시간30분쯤 지나면 옛길은 다시 한계천을 건넌다. 물이 많지 않아 쉽사리 건널 수 있지만 장마철이나 폭우가 내릴 때는 길을 나서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장수대에서 한계령 정상까지만 해도 열 번 이상 계곡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언제 불어날지 모를 일이다.

계곡을 건너 숲으로 들어서면 옛길은 희미하게나마 존재를 드러낸다.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걸으면 장군바위골, 다시 10여분을 가면 상투바위골이다. 옛길은 상투바위골이 흘러내려오는 자양2교에서 44번 국도와 만난다.

한계령 정상까지 약 1km 구간은 자연휴식년제로 통제

▲ 한계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계곡.
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자양5교가 보였다. 다리 밑에서 다시 계곡을 따르면 길은 한계령휴게소까지 숲으로 이어지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걸음을 막아섰다. ‘출입금지’ 표지판. 2008년 3월부터 2017년 2월까지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묶였다는 표지판이었다. 한계령 정상을 코앞에 두고 옛길의 클라이맥스를 놓쳐야한다니. 허탈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도를 따라 한계령 정상까지 다시 1.5km를 걸었다. 설악루라는 휴게소가 있는 정상은 들뜬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자동차와 버스로 정상까지 올랐을 것이다. 저들은 과연 옛길의 존재를 알기나 할까? 커다란 짐 보따리를 메고 두 다리만으로 이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했던 장돌림의 고단한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설악루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설악산의 조망은 말 그대로 첩첩 산그리메다. 설악산의 일부지만 그 잠깐의 조망이 보여주는 산세의 아름다움은 웅장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숭고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상처받은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흘림골, 남설악 중심으로 향하는 길
정상에서부터 금포교까지 44번 국도는 계곡과 거의 일치했다. 오색의 박남규 할아버지 말씀처럼 거대한 돌무덤으로 변해버린 처참한 계곡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흉측한 몰골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옛길을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한계령 정상부터 오색까지의 옛길도 계곡을 따른다. 현재 옛길 탐사가 가능한 구간은 용소폭포부터 오색약수까지다. 취재진은 한계령휴게소에서 용소폭포까지 5km 구간을 국도로만 내려가는 것이 아쉬워 흘림골~등선대~십이담계곡을 따른 뒤, 다시 옛길과 동일한 금강문~오색약수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르기로 했다.

흘림골도 수마를 피하지는 못했다. 물줄기 하나 보이지 않는 계곡에는 거대한 돌덩이들만 가득했다. 20년 동안 닫혀있다 또 다시 수해로 2년 동안 막혀있던 곳, 상처 입은 모습이 안쓰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림골의 경치는 감탄을 자아낸다. 남설악의 아름다운 풍광,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이 흘림골이다.

▲ 등선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설악산의 장쾌한 능선이 한 눈에 펼쳐진다.

등산로는 줄곧 나무계단길이다. 가기에는 편해도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계단길이 딱히 싫지 않은 이유는 칠형제봉의 웅장한 위용과 길 위에서 만나는 야생화들 때문이다. 곳곳에 만개한 산괴불주머니며 노루귀가 환한 얼굴로 취재진을 맞는다. 그렇게 꽃과 눈인사를 나누며 30분을 오르면 여심폭포, 다시 30분을 걸으면 흘림골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등선대다.

등선대에 오르면 ‘아, 설악산이구나!’ 싶은 절경이 펼쳐진다. 기암괴석이 사방을 호위하듯 펼쳐지고 칠형제봉의 7개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저 멀리 북동쪽을 바라보면 귀때기청봉·끝청·대청봉까지 설악산 서북주릉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시선을 돌려 남동쪽을 바라보면 주전골 너머로 잿빛하늘과 맞닿은 동해바다까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광이다.

등선대부터 오색까지는 계속 내리막이 이어진다. 기기묘묘한 암봉들 사이 계곡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등선폭포며 십이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갈증 난 몸과 마음을 해소시킨다.

▲ 십이담계곡에서 금강문까지 이르는 등산로는 시원한 계곡과 기암준봉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십이담계곡은 용소폭포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 몸집을 불린다. 두 계곡이 만나는 곳이 바로 금강문. 옛길의 흔적은 금강문부터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등산로를 정비하느라 계곡 곳곳에 나무데크를 설치해 옛길의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등산로의 흐름은 옛길과 유사하다.

포근하고 아늑한 옛길을 따라 30여분 내려가면 성국사다. 경내에는 다섯 색깔의 꽃을 피운다는 신비한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로 인해 지명이 오색리가 됐고 약수 이름도 오색약수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저 전설일뿐’이라고 의심하던 찰나, 눈앞에 진짜 여러 색을 꽃을 피운 복숭아나무가 나타났다. 색색의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의 신비로움에 관광객들은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 등선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설악산의 장쾌한 능선이 한 눈에 펼쳐진다.

한계령 옛길 트레킹은 오색약수에서 끝이 났다. 개울가 너럭바위에서 솟아나는 탄산수는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마른 목을 달래려 약수 한 바가지를 들이켰다. 지금까지 마셔봤던 여느 탄산약수보다 톡 쏘는 맛이 강하다. 아마 길고 긴 이 고갯길을 힘겹게 넘어온 장돌림들도 이 약수 한잔에 시름을 달래곤 했을 것이다.

한계령 옛길은 많은 구간이 수해로 상처를 입었다. 언제쯤 계곡이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한다. 이제 한계령 골짜기에도 새로운 생명들이 싹트고 피어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유실된 옛길도 복원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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