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지쳤을 때 숨어들고픈 피난처
무더위에 지쳤을 때 숨어들고픈 피난처
  • 글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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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스포츠웨어>와 함께 하는 우리 강산 걷기 ④ 강원 인제 방태산

▲ 방태산 정상인 주억봉. 아직 남아있는 철쭉꽃이 등산객들을 반긴다.

하늘도 풀도 색을 더해가는 어느 여름날, 세상은 온갖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데 문득 ‘덥다’ 혹은 ‘귀찮다’는 마음에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 질 때가 있다. 푸른 수풀을 스치는 한줄기 바람대신 아스팔트 위로 피어나는 신기루 같은 아지랑이만 눈에 들어온다면. 한 박자 쉬어갈 때가 되었다. 회복을 위한 휴식을 원한다면 강원도 인제 방태산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태고의 숨결을 간직한 원시림과 물줄기가 그대를 위로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장정일 시인의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중에서


▲ 처음 만나는 나무다리 뒤로 흐르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보드라운 흙길이 지당골을 따라 이어진다.
언제부터일까? 휴식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잘 쉬기 위해서, 보다 잘 놀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끝없이 일하다 보니 쉴 틈이 그립기만 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박자 쉬어갈 휴식처가 간절할 터. 아무런 사심도, 아무런 걱정도 없이 어느 때고 맘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사철나무’ 어디 없을까?

한창 녹음이 짙어지던 6월의 중순, <컬럼비아스포츠웨어(대표 조성래)>가 도심의 서울 고객들과 함께 단체로 ‘사철나무’ 대신 원시림을 찾아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 내려온 비밀스런 피난처 인제 방태산 자락. 예전부터 ‘삼둔 오가리’라 불리는 한국적인 이상향을 품은 곳이다.

흉년·전염병·전쟁을 피할 수 있는 이상향
살둔·달둔·월둔의 삼둔과 아침가리·명지가리·적가리·곁가리·연가리 이렇게 오가리는 예로부터 흉년·전염병·전쟁 등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방에 산줄기가 둘러쳐져 견고한 자연성곽을 이루어 바깥세상에 노출이 안 된데다 그 안에는 경작할 땅과 물이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해 충분히 숨어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일까? 이 지역의 입구는 대부분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형세다. 입구가 속세와 단절되어 있어 접근이 어렵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나절로 접근이 어려운 오지였으니 이젠 대부분 큰 길이 뚫렸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 모두 내려와 빈터만 남아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빠르고 건조한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휴식하며 원기를 충전하는 곳으로 애용되고 있으니 삼둔 오가리는 여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중이다. 이 중 강원도 인제 방태산에 닿는 적가리는 더위는 물론 세상 시름도 잊을 수 있는 환상의 휴식처. 1997년 방태산자연휴양림이 생기면서 찾기 수월해졌으나, 그 전만 해도 인근 주민들이나 아는 이들만 아는 곳이었다. 어여쁜 이름의 아침가리는 아침에 밭을 갈 정도의 해만 비치면 금세 져버릴 정도로 첩첩산중이라서, 또는 경작할 밭이 하도 작아 아침나절에 다 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 맑고 깨끗한 물살에 잠시 쉬어간다.

오늘의 코스는 휴양관에서 출발해 원시림을 거쳐 방태산 정상인 주억봉(1443m)에 오른 후 다시 그대로 내려오는 왕복 코스다. 보드라운 숲길이 끝난 후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참가자들이 잠시 술렁인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삼삼오오 모여 계획을 짜기에 바쁘다.
매표소를 지나 만나는 첫 번째 공터에 버스가 멈춘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산림휴양관과 화장실이 있다.

이곳이 방태산자연휴양림의 유일한 산막시설이다. 따라서 한 여름 성수기에는 한 달 전 예약으로도 방을 얻기에 어렵다고 한다. 이럴 땐 숲속에 자리한 가족야영장이나 오토캠핑장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야영데크와 취사시설이 갖춰져 있어 야외생활에도 불편함이 없고 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으니.

산림휴양관에서 찻길을 따라 조금만 이동하면 우측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이 정자 옆길로 내려가면 계단처럼 층이 진 ‘이폭포 저폭포’라고도 부르는 이단폭포를 볼 수 있다. 그 후 다시 걷던 길로 돌아와 완만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승용차를 가져왔다면 이곳까지 운행이 가능하다. 여기서 찻길이 끝나며 공터 오른쪽 모서리에 등산로 입구임을 알리는 팻말에는 ‘구룡덕봉 5.1km, 방태산(주억봉) 5.1km’라고 적혀있다.

▲ 방태산자연휴양림의 휴양관 근처에 자리한 이단폭포. ‘이폭포 저폭포’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방태산의 포인트.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적가리골
조금 더 올라가자 계곡 중간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구룡덕봉으로, 오른쪽은 주억봉으로 향하는 길로 주억봉길이 한결 뚜렷하다. 주걱봉이라고도 부르는 주억봉으로 발길을 돌리자 아뿔사! 그동안 잠잠하고 포근하기까지 했던 흙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선다. 가파른 오르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끙끙거리는 소리에 맞춰 중간 중간 살랑바람이 불어온다. 울창한 수풀이 태양을 가려주니 초여름날이 따갑지 만은 않다. 완벽하게 수풀에 감싸인 느낌이랄까. 과거에 사람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연이 주는 싱그러움에 취해 복잡한 머릿속을 한껏 털어버리고 다시 고개를 드니 동행하던 이들이 보이질 않는다. 퍼뜩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피니 발밑은 온통 나물천지다. 참나물에 곰취, 더덕까지. 나물이며 야생화며 한껏 피어올라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있나. 나물을 알아본 참가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더덕이며 곰취를 뜯는 폼이 산삼 캐는 심마니 못지않게 진지하다.

오르막을 지난 어느덧 세 개의 길이 맞닿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500m 정도만 가면 방태산 정상 주억봉이다. 구룡덕봉을 거쳐 주억봉에 오르는 이들도 이곳을 거친다. 물 한 모금으로 몸을 적시자 코앞이 정상이라는 생각에 다들 기운이 나는지 걸음이 빨라진다.

▲ 수풀이 가득한 숲과 깨끗한 물줄기를 따라 걸으니 세상에서 도망 와 이곳에 숨어들었던 이들이 조금 이해가 된다.

드디어 정상, 거의 끝물인 분홍빛 철쭉 한 무리가 일행을 반겨준다. 넓고 평평한 정상은 오르막길에서 숨차하던 이들을 조용히 다독인다. 주억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에 그저 웃음이 난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백두대간 산줄기가 장쾌하고, 밑을 보자 숲에 묻혀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넓고 깊은 계곡이 보인다. 완벽하게 수풀에 쌓여 태양을 막아주고 거기에 풍부한 물줄기까지 품고 있으니, 방태산 자락은 세상을 피해 살기에도, 더위를 피해 머물기에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다.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간다. 오르막이었던 길이 방향을 바꾸자 내리막이 된다. 경사가 꽤 심하므로 미리 스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전날 비라도 왔다면 물에 젖은 흙길을 그냥 내려가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렇게 떠밀리 듯 걷다보니 어느 덧 출발 지점이다.

주억봉 정상의 풍경에 반했는지, 나물캐기에 여념이 없는지, 아니면 간만에 맛보는 휴식을 깨기 싫었는지 일행이 보이질 않는다. 적가리골 들머리에 있는 방동약수를 맛보러 이동해야 하는데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기다림이 무료해 질 무렵 나이 지긋한 참가자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며 입을 연다.

▲ 방태산 정상 주억봉에 놓인 돌탑. ‘누가 언제 이렇게 돌탑을 쌓았을까?’ 하는데 참가자 한 명이 조용히 다가가 돌 하나를 얹어 놓는다.

“방동약수라고 아오? 왜 산삼 캐낸 자리에서 솟는다는 약수 있잖소. 거기 전설이 있어요. 옛날 옛적 인제의 한 심마니가 산삼을 캐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오랜 세월 산속을 헤맸지만 매번 허탕이었다네. 그러던 어느 날 정성이 갸륵했는지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지 않았겠소? 적가리골께로 가보라는 노인의 말대로 그는 거기서 꿈에 그리던 산삼을 발견했고. 그것도 삼대 위에 가지는 여섯 개인데다 종자가 만개 달렸다는 육구만달로 말이야. 한 천년쯤은 묵어야 되는 천종삼이지. 심마니가 육구만달을 캐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샘솟는 게 바로 방동약수라네.”

300년 즈음 된 엄나무 아래의 바위틈에서 샘솟는 방동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탄산과 철 성분이 함유되어 싸한 맛을 내는데 밥을 지을 때 넣으면 푸른 기운이 도는 찰진 밥이 된다.

오랜만에 자연 속에서 만난 결코 떠나고 싶지 않았던 ‘피난처’로부터 다시 세상 밖으로 나섰다. 다시 발을 디딘 이곳은 태양을 막아줄 수풀도 더위를 식힐 계류도 없다. 그래서일까? 이곳으로 통하는 찻길 위에서 그 옛날 사람들이 찾아낸 피난처를 자꾸만 돌아본다.

아마 사람들이 숨어 살기 시작한 그때에는 삼둔 오가리로 닿는 길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걷고 또 걸으며 그곳에 길이 생긴 것이리라. 어차피 길이야 걸으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숨이 턱턱 막힐 때면 숨어들 피난처도 확보했으니 이 여름, 두려울 것이 무엇일까.

▲ “치이즈~!” 방태산 산행을 함께 한 <컬럼비아스포츠웨어> 서울 고객들과 함께 산행 시작 전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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