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푸른 속살을 보셨나요?
제주의 푸른 속살을 보셨나요?
  • 글·김경선 기자|사진·염동우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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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ARK TRAVEL 02 오름 트레킹

▲ 아부오름은 분화구 속에 원형 띠를 두른 듯 삼나무 숲의 그림 같은 풍경이 일품이다.

비자림로 따라 큰사슴이오름~아부오름~용눈이오름~다랑쉬오름 산책…4시간 소요

옛날 옛날에 설문대라는 이름의 할망이 살았습니다. 할망은 어느 날 망망대해에 섬을 하나 만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엄청난 거인이었던 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가득 담고 지금의 한라산 자리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치마가 오래된 탓에 한라산으로 옮기려던 흙은 찢어진 치마 사이로 조금씩 흘러 수백 개의 오름을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많은 양의 흙을 쏟아 부어 한라산을 만들었습니다. -‘설문대 할망설화’ 중에서


오름(기생화산)은 단순한 언덕이 아니다. 예로부터 제주 사람들은 오름 자락에 불을 놓아 화전을 만들고 말과 소를 키웠다. 오름은 이렇게 산 사람들의 삶을 책임졌다. 산 사람 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을 껴안은 것도 오름이다. 제주 사람들은 죽어서도 오름에 뼈를 묻었다.

제주도에는 368개의 오름이 있다. 섬 한 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한라산의 위용이야 남한 최고봉으로서의 자존심이지만 나머지 368개 오름에 이방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높지 않아서 일까?

▲ 아부오름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만난 말떼. 더위에 지쳐 한창 휴식중이다.

약 120만 년 전 한반도 남쪽 바다에 용암이 분출했다. 엄청난 양의 용암은 굳어져 대지를 만들었고 이후로도 오랜 세월 계속된 화산활동은 네 번의 분출을 더했다. 그 사이 섬이 만들어지고 거대한 분화구의 한라산이 만들어졌으며, 압력을 이기지 못한 대지 곳곳에 용암이 분출돼 오름을 만들었다. 약 2만5000년 전부터 휴식기에 들어간 화산섬은 빨갛게 달아오른 용암대지를 식혀 숲을 이루고 생명을 싹 틔웠다.

대한민국 최대의 관광지 제주도. 누구나 한번쯤은 제주도로의 여행을 꿈꾼다. 제주도의 상징인 한라산 정상에 오르거나 신이 정성껏 솜씨를 부린 듯한 해안절경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섬 제주를 사랑한다. 그렇게 속과 겉을 훑어본 관광객들은 제주도를 다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한라산과 아름다운 해안절경만이 제주도의 전부일까?

▲ 큰사슴이오름에는 민들레며 엉겅퀴가 지천이다.

초원 뛰노는 사슴 한 마리, 큰사슴이오름
제주도에 갈 때면 으레 관광명소를 찾는다. 명소다보니 가는 곳 마다 입장료를 내고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사람 구경까지 실컷하다보면 가끔은 제주도의 식상함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제주도의 속살이 못내 궁금해졌다. 섬의 탄생과 더불어 생성된 수백 개의 오름. 내륙의 속살을 꽉 채우고 있는 오름에 주목하자 제주도가 180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알싸한 바다내음과 대조되는 향긋한 숲의 향기와 푸른 기운은 사람에 치이고 더위에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제주시에 살고 있는 오지마라토너 안병식 씨와 오름 트레킹을 함께 하기로 했다. 산책할 오름은 제주도 동쪽의 큰사슴이오름(대록산)·아부오름·용눈이오름·다랑쉬오름(월랑봉)이다. 제주시에서 성판악 방면으로 5·16 도로(1131번 지방도)를 타고 달리다 영평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비자림로(1112번 지방도)로 갈아탔다.

▲ 아부오름 입구에서 바라보면 오름은 작은 언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자림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길이에요. 길은 북동쪽 해안 마을인 평대리까지 이어지는데 태고적 숲의 생태가 잘 보존돼 산림이 무척 아름답죠.”

안병식 씨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비자림로는 입구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올라간 삼나무 숲의 장관이 펼쳐졌다. 아침의 수줍은 햇살이 숲을 비집고 들어가자 이국적인 수풀들이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인사를 전해왔다. 삼나무 숲의 장관은 2.5km 정도 이어져 절물자연휴양림 입구까지 뻗어갔다. 비자림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비자림로를 따라 10km 정도 달리니 탐라승마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샛길이 나타났다. 샛길로 들어서 4km 남짓 달리면 큰사슴이오름(474.5m)이다. 큰사슴이오름으로 향하는 길은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한다. 가시리까지 이어지는 이 10km 길에서 봄이면 제주도에서 가장 긴 유채꽃 군락을 볼 수 있다는 안병식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큰사슴이오름은 정석항공관 바로 뒤편에 자리했다. 오름의 생김새가 비슷하고 이정표도 없어 지나치기 쉬울 듯 했다. 큰사슴이오름과 작은사슴이오름이 푸른 초원을 뛰노는 다정한 형제처럼 나란히 서있었다.
정석항공관을 이정표 삼아 주차장과 항공관 사이의 좁은 포장길로 들어서니 큰사슴이오름 초입이다. 길은 200여m 포장길이 이어졌고 이후부터 정상까지 수풀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계속됐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는 민들레며 엉겅퀴가 지천이다. 색색의 꽃과 일일이 눈인사를 하며 20분쯤 올랐을까. 큰사슴이오름의 정상에 도착했다.

높지 않은 오름임에도 정상에서 보이는 풍광은 아름다웠다. 사방은 널따란 평지 위에 작은 언덕 모양의 오름이 분포하고 있어 잔잔한 대지의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서쪽으로는 구두리오름과 쳇망오름·영아리오름이 보였고, 남동쪽으로는 새끼오름과 따라비오름이 평지를 푸른빛으로 수놓았다.

▲ 풍만한 여성의 몸처럼 부드러운 능선의 용눈이오름.

분화구 속 삼나무 띠가 그림 같은 아부오름
길을 되돌아 나가 다시 비자림로를 탔다. 동쪽 방향으로 계속 달려 구좌읍 송당리 건영목장 입구에서 약 1km를 더 들어가니 우측으로 아부오름(301.4m)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부오름 입구에는 ‘앞오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아부오름은 앞오름이나 압오름 등으로도 불리는데, 오름의 형태가 타원형의 분화구를 이룬 것이 마치 어른이 앉아있는 모습 같아서 아부(제주방언으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라고 불린 것이다.

▲ 아부오름 자락에 쓸쓸히 서있는 팽나무 한그루.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오름 자락에는 10여 마리의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북적이는 해안관광지에서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함과 평화로움이다.

“오름 입구는 대부분 철조망으로 막혀있어요. 출입금지가 아니고 소나 말들을 방목하는 경우가 많아서 동물의 출입을 차단하는 거죠.”

안병식 씨의 설명처럼 아부오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만 철조망이 3개다. 다행이 철조망이라고 하기에는 엉성하고 낮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아부오름 초입, 푸른 잔디로 뒤덮인 오름 자락에 외롭게 서있는 팽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영화 ‘연풍연가’의 촬영지다. 푸른 초원과 말, 그림 같은 팽나무 한 그루. 어떤 각도로 앵글을 잡아도 구도가 빼어나다.
50m 정도의 야트막한 아부오름은 정상까지 5분이면 충분했다. 짧은 오르막은 숨이 가빠지기도 전에 놀라운 풍경을 선물했다.

“우와…!”

아부오름 정상에 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뱉었다. 약 80m 깊이의 분화구는 넓고 깊게 바닥을 드러냈고 그 분화구 가운데 삼나무 숲이 띠를 이뤄 원을 만들었다. 특히 분화구의 삼나무 띠를 울타리 삼아 20여 마리의 소떼가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은 목가생활을 동경하게 만들만큼 평화로웠다.

아부오름은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발길이 잦아진 오름이다. 5분의 오름짓으로는 너무나도 과분한 정상의 절경,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용눈이오름(247.8m)으로 향했다.

▲ 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보면 제주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만한 용눈이오름과 다부진 다랑쉬오름
비자림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니 1136번 지방도와 만나는 사거리가 나왔다. 우회전 해 1136번 지방도를 타고 손자봉삼거리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용눈이오름이 보였다. 용눈이오름의 입구는 오름의 동쪽 끝 작은 샛길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무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커다란 왕릉 같은 오름 위에 또 다른 작은 오름처럼 무덤이 봉긋 솟아있는 풍경이 이색적이었다.

“제주도의 무덤은 주위에 산담을 쌓아놓습니다. 바람의 피해를 막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소나 말이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막아주죠.”

▲ 다랑쉬오름 정상에서 날아오른 패러글라이더.

오름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 15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원을 이루며 유려한 곡선미를 뽐내는 용눈이오름은 따스한 어머니의 품처럼 한없이 포근했다. 부드러운 오름의 허리를 밟고 가장 높은 동쪽 봉우리 정상에 서자 눈앞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훤히 보일 정도로 청명한 날씨는 시원한 바람을 더해 더위에 지친 몸을 식혀줬다.

용눈이오름에서 내려와 다랑쉬오름(382.4m)으로 향했다. 1136번 지방도를 타고 다시 되돌아 나와 손자봉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2km 정도 달리면 다랑쉬오름 입구다.

다랑쉬오름은 구좌읍을 대표하는 오름이다. 높이도 높을 뿐더러 분화구의 형태도 원형에 가까워 정석 같은 오름의 형태를 보여준다. 다랑쉬는 산봉우리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월랑봉(月朗峰)이라고도 불린다.

▲ 산담이 둘러싼 제주 특유의 무덤이 이색적인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은 앞의 세 오름에 비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20분이면 올랐던 앞의 오름과 달리 가파른 급경사를 30분 정도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정상에서 보이는 제주 바다의 수려한 풍경과 깊고 넓은 분화구의 매력으로 다랑쉬오름은 관광객들로 항상 북적였다.

앞에 세 오름이 관리가 잘 안 돼 있던 반면 다랑쉬오름은 정상까지 나무데크가 이어져 산행이 한결 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상까지 곧게 뻗어 올라가는 데크였지만 지금은 길을 지그재그로 조성해 가파른 오르막의 부담을 덜어줬다.

오름의 중턱에 올라왔을 때쯤 뒤돌아 주변을 바라보니 커다란 달덩이 같은 아끈다랑쉬 너머로 바다가 펼쳐졌다. 마치 원뿔을 가로로 잘라낸 듯한 아끈다랑쉬, 어미의 품처럼 부드러운 능선이 아름다운 용눈이오름, 신기루 같은 해안의 풍경은 관광객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다랑쉬오름의 정상은 아부오름이나 용눈이오름과는 달리 웅장함이 느껴졌다. 마치 한라산 백록담을 봤을 때 느꼈던 웅장함이다. 푸른 잔디가 분화구를 온전히 뒤덮고 있어 정상은 더욱 화려했다.

오름 정상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분화구 둘레는 약 2km인데, 키 작은 수풀부터 울창한 나무숲까지 곳곳마다 식생의 분포가 다양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맞은편 오름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이 한창이었다. 수채화처럼 파란 하늘과 푸른 초목, 그 사이를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패러글라이더가 힘껏 도약해 날아올랐다. 그들은 제주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라산과 해안의 절경이 아니더라도 제주도의 내륙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가는 곳마다 넓은 초원이 펼쳐진 제주, 그 위로 탄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름들. 제주의 또 다른 풍경에 설레고 싶다면 탄생의 신비를 간직한 오름의 품에 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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