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카우보이 단
호주 카우보이 단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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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배꼽’ 울루루의 빛

메마른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저녁노을이 졸망졸망한 관목 숲 밑에서 새빨갛게 타들어 갔다. 대지의 후끈한 입김이 한 움큼씩 사라져갈 때마다 바위산은 생의 마지막을 고하는 듯 얼굴빛이 변해갔다. 처음에는 가녀린 연분홍인가 싶더니 물오른 진분홍으로, 다시 완순한 옅은 보라인가 싶더니 이내 요염한 짙은 자주로, 그리고 또다시 검붉어지면서 시간의 마지막 연소를 알리다가 마침내 잿빛으로 시들어 갔다.

광활한 호주 대륙을 걷다 보면 사방에서 출렁대는 하늘빛 물결을 마주하게 된다. 신기루다. 호주의 중앙부 노던 테리토리(Northern Territory), 그 끝없는 광야에 서면 신기루 너머로 신기루처럼 보이는 바위산들이 보인다. 울루루(Uluru)와 카타츄타(Kata Tjuta), 킹스 캐니언(Kings Canyon)이 그들이다.

호주 대륙의 동쪽 시드니에서 2800㎞, 서쪽 퍼스(Perth)에서 3600㎞, 비행기를 타든 육상교통을 이용하든 그곳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붉은 사막의 심장부인 울루루-카타츄타 국립공원과 킹스 캐니언이 자리한 와타르카(Watarrka) 국립공원으로 가는 들머리는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다.

이곳은 맥도널 산맥의 골짜기에 호주 대륙을 횡단하는 전신선의 중계 기지로 건설된 사막의 도시다. 울루루와 카타츄타는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남서쪽으로 450여㎞, 킹스 캐니언은 서쪽으로 300여㎞ 떨어져 있다.
자신을 카우보이 촌놈이라고 소개한 단(Dan)은 구릿빛 얼굴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건강한 청년이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호주의 중부로 건너와 대대로 소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한낮에는 기온이 섭씨 45도를 넘나들어 불가마를 방불케 하더니 땅거미가 내리자 사막 여기저기에서 슬금슬금 냉기가 기어 나왔다. “크게 재미를 보지는 못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그럭저럭 탈 없이 목장 일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호주 대륙 전체에 이상 기온 현상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륙의 북부와 동부는 엄청난 폭우로 물난리에 시달리고, 반대로 건조 지역에 속하는 중부와 남부는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산불까지 매년 발생하여 천문학적인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기상학자들의 말대로 이런 재해들이 인간들의 자연환경 파괴에 기인한 것이라면, 사실 목장들도 한몫 거든 셈입니다. 나무를 자르고 뿌리를 캐내어 숲을 파괴하고, 그 땅에 풀을 심어 초지를 만들었으니까요.” 저녁 준비를 위해 피운 모닥불이 어둠 속으로 메케하게 숨어들어 갔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는 양이나 소에게 사료를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연 방목을 하고 먹이가 부족하면 건초를 먹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빈번한 홍수와 가뭄 탓에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장에서는 건초를 사다 먹이고,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사료까지 사다 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는 목장의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장이 문을 닫았고, 우리네 카우보이들은 돈벌이를 위해 대처로 떠났습니다. 저 역시 목장을 떠나 객지에서 트럭 운전을 하다가 이곳으로 와서 드라이빙 가이드(Driving Guide, 운전과 전문 안내원을 겸한 직업)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너울거리는 모닥불이 집 떠난 영혼들의 외로운 흐느낌처럼 보였는지, 남국의 십자성이 자애로운 눈길로 토닥거려 주었다.

“목장 일도 그렇지만 사실, 이 일도 꽤나 힘든 직업입니다. 아웃백(Outback, 오지) 체험은 남들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말하지만, 보시다시피 하루 종일 혼자서 운전해야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뙤약볕에서 계곡을 오르내리며 안내해야지, 삼시 세 끼 손님들의 식사까지 준비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삼일을 계속해서 일하고 고작 하루를 쉬니, 웬만한 체력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보람도 있습니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애버리진(Aborigine, 호주 원주민)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고, 이 땅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손님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다시금 힘을 얻고, 새벽을 열어나갑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평원 너머로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붉은 빙산처럼 떠있다. 세계 최대의 단일 바위 덩어리인 울루루다. 지표에서의 높이 348m(해발 863m), 길이 3.5㎞, 둘레 9.4㎞ 되는 무지막지하게 큰 모래 바위 덩어리이다. 이것은 사막 위에 수평으로 얹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억 년 동안의 지각 운동 탓으로 거의 수직으로 곤두박여 있다.

그것도 땅속으로 수 ㎞나 묻혀 있어 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 바위산을 서양 사람들은 ‘에어즈 록(Ayers Rock)’이라고 부른다. 호주가 영국의 식민 유배지이었던 시절의 총독 이름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울루루를 젖줄로 세세손손 살아온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 땅에서 수만 년을 살아온 애버리진이 그들이다.

울루루는 아낭구(호주 중앙부 원주민을 부르는 호칭)의 삶의 터전이자 절대 성지다. 멀리서 바라보면 생명이라고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붉은 바위산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늘을 지닌 장소’라는 이름처럼 물이 있고 그늘이 있어 갖가지 생명을 품고 있다.

아낭구들은 그 생명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해 왔고, 그 그늘에서 고단한 삶을 쉬었으며, 그들만의 독특한 질서와 문화를 이어 왔다. 그리고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루루의 별명에 걸맞게 그들은 그곳에서 새 생명의 탯줄을 이어갔다. 그러기에 울루루는 아낭구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신(神) 그 자체이며, 빼앗길 수 없는 영혼이다.

울루루에서 북서쪽으로 30여 ㎞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영물(靈物)이 있다. 카타츄타다. 올가(Olga, 지표 높이 546m, 해발 1066m)산 이라고도 불리는 카타츄타는 울루루와는 달리 36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름도 ‘많은 머리’이다. 울루루가 남성스럽다면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계곡의 붉은 바위 속살이 수줍게 드러나는 카타츄타는 다소 여성스럽다.

킹스 캐니언은 울루루에서 다시 북쪽으로 300여㎞ 떨어져 있는 호주의 그랜드 캐니언이다. 수백만 년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300여m 높이의 장대한 협곡이다. 경관도 경관이지만 킹스 캐니언은 깊숙한 협곡 밑으로 생명수를 감추고 있어 사막에서 보기 드문 동식물의 보고다. 나체가 부끄럽지 않은 킹스 캐니언의 천연 풀장인 에덴동산에 서면 태초의 세상이 거기에 있다.

“양떼와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푸른 풀밭이 누군가에는 언제나 꿈꾸는 한 폭의 그림일수도 있겠지만, 풀밭 가득 숨겨진 냄새 나는 소똥을 밟으며 힘겹게 일해야 하는 목동의 눈에는 실상 그것은 억세고 거친 고단한 풀밭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낮 더위에 지쳐 어둠을 덮고 누운 울루루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저 울룰루를 지켜보지만, 아직도 울루루의 참다운 색을 모르겠습니다.

저토록 변화무쌍한 울루루 본래의 색은 정말 무엇일까요? 어쩌면 색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허망한 색깔에만 집착하는 우리네 눈이 뜨고도 보지 못하는 그런 색 말입니다.” 선떡부스러기들의 가리사니 없는 소리가 시답지 않은 듯, 울루루는 이내 모루 누워 나지막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날 밤, 밤새도록 따갑게 쏟아져 내린 별빛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울루루와 단도 어쩌면 모두가 그저 하룻밤 달콤한 신기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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