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BYE SUMMER 선자령 여름 트레킹
GOOD BYE SUMMER 선자령 여름 트레킹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4.09.0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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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뜨거운 열기와 답답한 시야를 벗어나 선자령 정상에 올랐다. 탁 트인 풍경과 제법 서늘해진 바람을 맞으며 길고 길었던, 여름을 보낼 준비를 한다.





가을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입추가 코앞이건만,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 여름의 기운은 여전히 뜨겁다. 한밤중에도 30도를 웃도는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여름의 끝자락, 이왕지사 곧 떠날지 모르는 여름을 만끽하기 위해 온 가족이 트레킹에 나섰다. 목적지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풍요로운 선자령. 눈꽃 산행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여름철에는 선선한 기온과 만개한 야생화로 피서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해발 1157m의 선자령은 아름다운 선녀들이 아들과 함께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빼어난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정상에 오르면 초록빛의 유려한 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마치 전설 속 선녀가 된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정상에 오르는 동안은 계절마다 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펼쳐낸다. 봄이면 노랑제비꽃, 얼레지를 비롯해 희귀식물인 제비동자꽃까지 황홀한 꽃 축제가 열린다. 여름에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계곡과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습지를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허리’라 불리는 백두대간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북쪽으로는 오대산의 노인봉이, 남쪽으로는 능경봉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펼쳐진다. 한 줌의 햇볕도 허락하지 않는 울창한 숲길과 어린아이도 오를 수 있을 만큼 완만한 능선, 수줍게 피어있는 색색의 야생화까지 있으니 온 가족 트레킹 코스로 제격이다. 트레킹 도중 만나는 양떼 목장길과 풍차길,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하는 바람의 언덕 등 이국적인 풍경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동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은 여름 산행을 더욱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선자령은 바람이 많아 풍력발전기가 여럿 설치돼있는데, 풍차처럼 날개가 빙그르르 돌아가는 모습이 목가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이토록 바람이 풍요로운 이유는 지형적인 특징 덕분이다. 대관령 북쪽에 자리한 능선은 고위평탄면이고, 동쪽은 가파른 산악지역이기 때문에 기류 변화가 많고 바람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트레킹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등산로의 방풍림이 강한 바람을 막아줘 오히려 시원한 산들바람을 누릴 수 있다.




이번 트레킹은 온 가족이 함께했다. 곧 개학을 앞둔 아이들에게 특별한 여름 방학의 추억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면서. 선자령은 어린아이나 초보자도 쉬엄쉬엄 오를 수 있을 만큼 친절한 데다 숲길부터 풍차길까지 다양한 풍경을 펼쳐내니 아이들도 지루해하지 않을만한 트레킹 코스다. 선자령에 오르기 앞서 아이들을 위한 간식과 정상에서 먹을 점심을 사기 위해 대관령 면 소재지에 들렀다.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편도로 약 두 시간. 10시쯤 출발하니 정상에 당도하면 얼추 점심시간이었다. 차 문을 열자 서울과 사뭇 다른 차갑고 청량한 기운이 피부를 스친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시원한 바람이던가.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아이들도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부랴부랴 가방을 메기 시작했다.
선자령의 대표적인 등산 코스는 대관령휴게소를 기점으로 국사성황 사를 지나 KT 기지국, 전망대를 거쳐 정상에 오른 뒤 원점 회귀하는 길이다. 총 12km로 왕복 3시간,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을 고려한 다 하더라도 4시간 이내면 돌아올 수 있다. 정상의 높이가 1157m이 라지만 시작점인 대관령 휴게소의 높이가 이미 800여 m. 비교적 긴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길이 평탄하고 경사가 완만해 초보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선자령 등산로 입구에서 출발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 국사성 황사다. 이곳은 국사성황(범일 국사)과 산신(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신당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돼 있다. 음력 4월과 5월이 면 대관령 산신제, 대관령 국사성황제, 여신행차 등 강릉단오제가 열 린다. 기운이 좋아 종종 굿판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날도 제사를 지 내기 위해 찾은 이들의 상차림이 한창이었다.
선자령 정상에 오르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능선길과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계곡길. 길은 중간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져 정상까지 이어진다.
서울 도심보다 기온이 낮은 선자령이라지만 여름은 역시 여름. 그늘이 드리워진 숲길을 오르는데도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보통은 능선길로 정상에 오른 후 계곡길로 하산하며 땀을 식히지만 연신 땀을 훔치는 아이들을 위해 계곡길을 등산하기로 한다. 계곡을 찾아가려면 국사 성황사에서 빠져나와 재궁골삼거리 방향으로 올라야 한다. 재궁골삼거리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경쾌한 물소리가 가족을 반긴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참새가 없듯, 물가를 그냥 지나치는 아이는 없다. 얕은 물이 흐르는 초입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이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웅덩이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자니, 전설 속 선자령의 선녀들이 된 기분. 고요함 속 아이들이 물을 튀겨내는 소리만이 청량한 울림을 만든다. 이 선녀들의 놀이터는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선자령의 선물이다.



계곡길을 빠져나오니 아담한 오솔길과 그 끝에 우뚝 선 풍력발전기가 나타난다.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며 간식까지 즐긴 터라 오솔길을 딛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바람도 제법 선선하니 무르익은 여름의 햇볕조차 따스하게 느껴진다. 5분쯤 걸었을까. 문득 울창한 나무가 걷히고 사방이 탁 트인 너른 초원이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도심에서의 여름이 답답했던 건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지 않는 듯, 온 가족이 초록빛 초원으로 뛰어든다. 이때만큼은 엄마 아빠도 아이들의 또래가 되어 마음껏 초원을 누빈다. 아무리 힘껏 달려도 온 시야가 푸르니 웃음소리가 멎지 않는다. 마치 사방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간지럼이라도 태우는 듯.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300여 m. 코앞에 정상을 두고도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장마가 잦아든 파란 하늘은 초원과 맞닿아 이국적인 풍경을 끊임없이 펼쳐내고 있었다.



초원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니 드디어 〈백두대간선 자령〉이라 적힌 커다란 비석이 등장한다. 비석 옆에 서면 방금 전 지나온 평원과 함께 남쪽으로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그 옆에 오대산, 북쪽으로 황병산의 능선이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다. 맑은 날에는 더 멀리, 강릉 시내와 동해바다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등산 필수 코스인 정상 기념샷을 찍고 서둘러 자리를 잡는다. 그간 온갖 아름다운 풍경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잊고 있던 허기가 이제야 몰려온 것. 시내에서 사온 김밥을 꺼내 펼치니 취향 따라 참치 김밥, 소불고기 김밥, 치즈 김밥까지 다양하다. 서로의 김밥을 하나씩 맛보며 선자령의 야생화처럼 웃음꽃을 피워낸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여서인지, 오랜만에 맛보는 청량한 바람 덕분인지, 정상에 오르며 허기가 쌓였던 탓인지, 혹은 그 모두 때문인지 몰라도 이날의 김밥은 유난히 꿀맛이었다. 다시 올라온 만큼 내려가고도 충분한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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