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두만강에서 만난 조선족들
백두산과 두만강에서 만난 조선족들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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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애환이 담긴 어머니의 강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고만고만한 계집아이 셋이서 깔깔거리며 남쪽 개울가를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때마침 건너편 개울가에서 발을 씻고 있던 아저씨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연방 손짓하며 말했다. “이짝에 오실람까?” 서너 발짝 건너뛰면 닿을 만한 거리였기에 계집아이들의 얄망궂은 재잘거림은 잔 물살을 넘어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기나긴 세월 너무나도 건너보고 싶었던, 발목이나 적실까 말까 하는 그 얕은 개울 하나를 녀석들의 말처럼 그렇게 쉽사리 건널 수가 없었다. 이제 실개천 너머 그 아이들에게 이편 아저씨는 아주 머나먼 이국땅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지금은 옛 노래가 되어버린 ‘눈물 젖은 두만강’의 한 소절이다. 아마도 어릴 적 가장 먼저 귀에 들어왔던 대중가요인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 두만강의 발원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는 그 물줄기를 밟아 보았다.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북한·중국·러시아와 국경을 이루며 장장 547km를 흘러 동해로 빠져나가는 강, 두만강(豆滿江). 그 강의 발원지는 백두산의 남동쪽 산록이었다. 아마도 백두산 천지(2190m)의 물이 잠시 지하로 숨어들었다가 다시금 솟아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새벽 3시, 숙소로 머문 백두산 화산 활동 관측소의 문을 젖히고 천지를 향해 어둠을 열었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백두산 북파 길을 제멋대로 두 시간쯤 오르자, 여명이 세상을 두드려 깨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해발고도 2000m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수목한계선이 드러나고, 고산 야생 화원 지대가 드넓게 펼쳐졌다.

다시 한 시간쯤, 드넓은 고산 초원지대를 자유롭게 가로지르자 흑풍구(黑風口)에 도달했다. 거센 바람을 뚫고 흑풍구에 올라서니, 하늘을 떠받치고 우뚝 선 기둥들 사이로 얼음 속을 뚫고 창공에 흩날리는 두 줄기 비단이 눈에 들어왔다. 천지의 생명수가 달문과 승사하를 지나 쏟아져 내려 송화강(松花江)의 발원지를 이루는 장백폭포(높이 68m)였다.

한 시간쯤을 다시 오르자 마침내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천문봉(2670m)에 다다랐다. 흰 부석(浮石) 위로 흰 눈이 쌓여, 돌인지 눈인지 모를 천문봉 너머로 드디어 천지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하늘 연못, 눈 덮인 천지. 그 위에 씌워진 금빛 왕관, 열여섯 개의 백두 영봉. 그것을 보는 영혼은 하늘 연못만큼이나 하얗게 얼어붙었다.

“립쌀 밥 먹기야, 저쪽 보다는 이쪽이 훨씬 수월함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우리네 조선 사람들은 목숨 걸고 이 강을 건너 왔슴다. 배곯지 않으려고 말임다. 보시다시피, 저쪽은 산 투성이 땅 아님네까. 농사지을 수전(水田, 논)이 없슴다.”

따사로운 봄볕에 채반 위에서 말라가던 민물고기들이 숙박집 안주인의 손길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아갔다. 거기에는 두만강야레 등 잡다한 물고기들이 있었지만, 한여름에도 수온이 2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 맑은 하천 상류에서만 산다는 1급 냉수성 어류 둑중개가 태만이었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이곳 고성리(古城里)에는 거의가 우리 조선족이었는데, 이제는 모두 떠나고 겨우 오십 여 가구만 남았슴다. 촌구석의 생활이 구차하니 모두가 화룡(和龍)이나 룡정(龍井), 연길(延吉)같은 대처로 떠난 검네다. 저희 아들 내외도 연길에서 쌍벌이(맞벌이)하고 있슴다.” 꽤나 알아듣기 힘든 그녀의 걸쭉한 함경도 사투리가 안마당 가득 질펀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거꾸로 전에 아래쪽 남평(南坪)에 살다가 더 촌구석으로 이사왔슴다. 그런데 요즘은 세월이 변해서리 촌스러움이 되레 돈벌이가 됨네다. 이제는 먹고 살만해지니까, 사람들이 각박한 시가지틀(도시풍) 보다는 구수하고, 올곧은 촌스러움이 그리워진 겜니다.” 늘 말수가 적던 바깥주인도 고개를 끄덕거려 안주인의 말을 거들었다.

백두산 북파 산문을 뒤로하고 일명 ‘스탈린 도로’라 불리는 임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갔다. 자동차로 1시간 반 정도를 파고들자, 북한의 량강도 삼지연군과 중국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가르는 중조(中朝) 21호 변계비(邊界碑, 중국~북한 국경 표지석)와 두만강 발원지라는 푯말이 보였다. 국경 안으로 들어가자 변계비가 나타나고, 그 밑으로 직경 2m 남짓한 얼어붙은 연못 하나가 양 갈래의 도랑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두만강의 발원지였다.

한 발은 북한 땅에 다른 한 발은 중국 땅에 걸치고, 얼음물을 떴다. 하지만, 무엇인가 북받쳐 쪼그려 앉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모양새를 잡아가는 두만강 물길을 따라 발원지에서 반 시간쯤 더 내려가자, ‘김일성 낚시터’라고 부르는 곳에 다다랐다. 너비 5~6m, 길이 30m쯤 되는 개천을 목책으로 물막이해놓은 곳인데, 예전에는 뗏목을 띄우기 위한 물동이었다고 한다.

그 맞은편에서 사복차림에 권총을 찬 북한의 안전부 요원이 다가와 코앞에서 싸늘하게 시선을 얼렸다.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지루한 긴장감 속에서 안쓰러운 착잡함만이 강물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발원지에서부터 70㎞를 흘러내려온 두만강은 중국의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와 북한의 량강도 대홍단군 삼장리(三長里)를 갈랐다.

두만강의 첫 번째 다리가 있어 북한과 중국의 통상구가 자리한 곳이다. 그리고 두만강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과 중국의 두 마을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근처에 요(遼)나라 때의 옛 성이 있어 고성리인 그곳을 사람들은 그냥 숭선이라 부른다. 어릴 적 시골 마을 그대로를 빼어 닮은 숭선에 서면 강 건너 맞은편 북한의 삼장리에서 어린아이 기침 소리가 들린다.

숭선을 떠난 두만강은 서서히 북으로 방향을 틀어 중국의 화룡시 덕화향 남평과 함경북도 무산군 칠성리, 용정시 삼합과 함경북도 회령, 용정시 개산둔과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을 가른다. 그리고 다시 중국의 도문시(중국에서는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부른다)와 함경북도 남양시를 지나며 방향을 남동쪽으로 돌려 훈춘시와 함경북도 은덕군을 지난다. 마지막 15㎞ 남겨놓고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넘는 두만강은 연해주와 함경북도 선봉군을 가르며 동해로 빠져나간다.

“조선과 중국 그리고 로씨야를 아우르는 저 두만강은 역사의 강이자, 어머니 강임네다. 어째 그러냐 하믄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네 조선 사람들의 애꿎은 눈물이 저 강 밑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임다.

그리고 저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지은 립쌀과 남새로 밥과 반찬을 짓고, 저 강물에서 잡은 물고기로 탕을 끓여, 우리가 지금 저녁을 먹고 있으니, 우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 강이 아니믄 무엇이갔슴니까?”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두만강 푸른 물은 여전히 묵묵히 흘렀고, 건너편 삼장리의 옥녀봉에서 떨어져 내린 한 줄기 저녁노을만이 금빛 되어 남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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