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바람, 하늘, 그리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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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사진·김진아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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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 上 생 장 피드 포르~팜플로냐

▲ 아기자기한 생 장 피드 포르 마을.

생 장 피드 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 40일 도보여행 코스

글 사진·김진아 여행가 sogreen78@hotmail.com | 취재협조·레드캡투어 www.redcaptour.com

남극, 칠레, 아르헨티나, 인도, 네팔, 중국…. 잘 다니던 회사를 어느 날 불쑥 나와 버린 화려한 백조가 여행지에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여행의 약발이 떨어질 때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아간다. 김진아 씨가 이번에는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다녀왔다. 25일 간의 순례기를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

▲ 노란 이정표를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예수의 제자 성 야보고의 유해가 묻힌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자들은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신과 자신을 발견한다. 굳이 순례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 대륙을 횡단하는 도보여행객들이 많아졌지만 성스러운 길 위에선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가 된다.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들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질을 배낭에 매단 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을 묵묵히 견뎌내는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의미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인 생 장 피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약 800km를 걷는 동안 순례자들은 신의 숨결을 느낀다.

▲ 피레네산맥을 오르는 길. 신록이 완연하다.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곳이다. 스페인 북부의 갈리시아 지방으로 순례길을 떠났던 야고보는 복음을 전파한 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다. 야고보가 죽자 그의 친구들은 유골을 배에 싣고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묻었다.

오솔길을 걷든, 눈길을 걷든, 혼자 걷든, 함께 걷든, 걷는 행복은 그 기쁨을 아는 자만의 특권이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걷다가 문득 멈춰 바라보는 세상은 더욱 따듯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많은 상념들이 사라진 텅 빈 상태. 그저 걷는 일에만 몰두해 나를 만날 수 있는 몰입의 시간은 행복하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길을 걸은 이들은 수없이 많다. 특히 브라질의 작가 파올로 코엘료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여행한 후 꿈으로 간직했던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아의 변화 과정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소설 <순례자>는 파올로 코엘료의 데뷔작이자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나를 만나러 가는 길, 그 매력에 이끌려 어느새 그 길에 서게 됐다. 걷기에 대한 유혹, 그 흔들림으로 인하여.

▲ 순례의 길 곳곳에서는 한가롭게 쉬고 있는 산양 떼를 만날 수 있다.

생 장 피드 포르에서 첫발을 내딛다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산티아고까지 가는 경로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는 프랑스 생 장 피드 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서부 산티아고까지 이르는 카미노 프란세스 코스다. 이 800km의 순례 길은 도보로만 이동할 경우 40~45일이 소요된다.

산티아고까지 이르는 순례의 길은 새벽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행자들은 보통 아침 8시부터 시작해 오후 2시 전후로 걷기를 멈춘다. 하루 평균 약 20~25km를 걷는 셈이다. 어떤 이들은 이 구간을 모두 두 발로 걷고 어떤 이들은 자전거나 버스 등을 이용한다.

생 장 피드 포르로 가는 길. 파리에서 고속철도 테제베(TGV)를 타고 5시간이 걸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바욘(Bayonne)에 도착했다. 생 장 피드 포르까지는 다시 9칸짜리 허름한 열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이동했다.

▲ 피레네 산맥으로 오르는 길은 평화로운 초원지대가 이어진다.

드디어 작은 시골 간이역 생 장 피드 포르역. 굳이 길을 묻지 않아도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순례자 등록 사무실이다. 순례자들은 크레덴샬(Credential)이라는 순례자용 여권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 순례자들만을 위한 숙소에서 숙박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다. 게다가 여정 동안 매 구간에서 도장을 받아야지만 순례의 길을 걸었다는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생 장 피드 포르에서 첫 도장을 받고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Alberge)에서 짐을 풀었다. 알베르게는 크레덴샬을 지닌 순례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저렴한 숙소로 침대와 샤워 시설, 주방시설을 갖추고 있다.

▲ 순례의 길을 끊임없이 걷고 있는 순례자. 걷는 동안 신과 나를 만난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로
전날 종일토록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순례자의 길을 반겼다. 저 멀리 피레네산맥의 짙어진 신록이 여행을 설레게 했다. 피레네를 오르는 길은 참 싱그럽다. 야생화는 길가에 지천이고 가끔 만나는 산양 떼들은 평화로운 농가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출발한 순례자들은 때로는 혼자 때로는 여럿이 서로의 걸음걸이를 응원하며 피레네를 오르고 있었다. 피레네의 산 중턱에서 휴식을 취할 겸 오리손 알베르게에서 1박을 했다.

새벽부터 비바람이 거셌다. 우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피레네 정상을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꼭 필요한 짐만 챙겼는데도 배낭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모든 풍경들이 스산했다. 끝도 없는 자갈밭을 지나자 오솔길과 진흙길이 이어졌다. 그렇게 세 시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정상이 보였다. 피레네 정상 콜 데 레푀데르(Col de Lepoeder, 1410m)다.

정상부터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떠밀려 내려가듯 산맥을 걷다보니 멀리 론세스바예스(Roncevalles)가 보였다. 대성당에서 크레덴샬에 확인 도장을 받고 숙소로 들어갔다. 옛 수도원을 개조한 숙소라 분위기가 사뭇 엄숙하고 따듯하다. 오후 6시가 넘자 넓은 숙소가 순례자들로 꽉 찼다. 저녁나절에야 부랴부랴 도착한 순례자들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론세스바예스의 아침 기상은 독특했다. 알베르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지긋한 나이의 아저씨가 아침 6시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순례자들을 잠에서 깨웠다.

▲ 론세스바예스 숙소에서 순례자들은 햇살 아래 휴식을 취하거나 빨래를 한다.

소몰이 축제의 도시 팜플로냐
태양의 나라 스페인의 햇살은 뜨겁다. 오전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지만 정오를 넘어서면 뜨거운 햇볕에 살이 그을리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론세스바예스에서 라라쏘냐(Larrasoana)까지는 27km 정도로 라라쏘냐 바로 전 주비리(Zubiri) 마을까지 내내 숲길이 이어진다. 숲을 빠져 나오면 작은 마을이고 다시 마을을 벗어나면 작은 숲길이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정갈한 주비리 마을에서 시원한 음료와 스페인의 대표음식인 돼지 뒷다리 훈제 요리 하몽(Hamon)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했다.

잠시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힌 후 뜨거운 길로 다시 나섰다. 도로와 공장지대를 지나 아름다운 오솔길을 만나면 길은 구불구불 산을 지나고 중간 중간에 계곡과 폭포가 지친 순례자들을 위로했다. 다시 1시간30분쯤 걸어 고즈넉한 중세풍 도시 라라쏘냐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알베르게에는 이미 침대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주변 사설 호스텔에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인원이 숙식하는 공립 알베르게에 비해 사설 호스텔은 편안했다.

▲ 옛 수도원을 개조해 만든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

다음날 아침 화창한 날씨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오늘은 라라쏘냐에서 대도시 팜플로냐(Pamplona)까지 걷는 일정이다. 약 17km의 길은 완만했다. 서서히 발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며칠간 계속된 강행군에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려는 모양이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팜플로냐는 생 장 피드 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가장 큰 도시다. 특히 팜플로냐는 매년 7월 소몰이 축제 산 페르민(San Fermin)이 열린다. 부상자들이 속출할 만큼 위험천만한 축제지만 박진감 넘치는 소몰이를 보기위해 스페인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스페인 전역이 들썩이는 축제 기간 동안 마을은 붉은 옷에 스카프를 맨 사람들로 가득하고 축제 기간에만 300만 리터의 알콜이 소비된다고 한다.

아름다운 도심의 풍광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아픈 발을 살피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면봉으로 물집을 말끔하게 짜내고 일회용 밴드로 정성스럽게 상처를 싸맸다. 저녁을 먹기 위해 도심으로 갔다. 오래된 벽돌 건물이 골목을 가득채운 팜플로냐의 중심 델 카스티요(Del Castillo) 광장에서 팜플로냐의 가장 오래된 카페 이루나에 들어갔다. 오징어 튀김을 먹으며 오랜만에 도시가 주는 편안함에 젖어들었다. <계속>

▲ 순례의 길은 중세의 향기가 곳곳에 가득하다. 어디를 가든 생경한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솔길을 걷든, 눈길을 걷든, 혼자 걷든, 함께 걷든 걷는, 행복은 그 기쁨을 아는 자만의 특권이다.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걷다가 문득 멈춰 바라보는
세상은 더욱 따듯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많은 상념들이 사라진 텅 빈 상태.
그저 걷는 일에만 몰두하여 나를 만날 수 있는 몰입의 그 시간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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