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의 가을은 새벽이슬처럼 찾아온다
캠핑의 가을은 새벽이슬처럼 찾아온다
  • 이철규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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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 CAMPING | 가야산 치인야영장

▲ 저녁 한 차례 내리던 는개비가 걷히자 고즈넉한 밤 풍경이 시작됐다. 가을은 새벽 찬 이슬과 풀벌레의 교향곡으로 그 막을 열고 있었다.

회현서원~가야산야생화식물원~치인야영장~해인사~청량사~내암 정인홍 묘

땡볕에 나날이 여물어 가는 벼이삭만큼 서서히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풀벌레 소리 들리는 밤, 가야산의 맑은 계곡은 땡볕에 익어버린 대지를 식히느라 뿌연 안개에 덮였다. 찬 기운을 타고 온 가을바람이 자리를 찾고 있었다.

사진·염동우 기자┃장비 협찬·스타런, 코베아

▲ 통일신라시대 대사찰이었던 법수사가 건립될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법수사지 3층석탑.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일렬로 늘어서 공중으로 불꽃이 솟는 듯하고, 가히 높으면서도 수려하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가야산은 크고 작은 암봉들이 아기자기하면서도 빼어난 풍모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남산제일봉과 가야산 사이에 자리한 물 맑은 홍류동계곡은 신라의 석학 최치원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때문에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야산은 천하의 으뜸이요, 지덕(至德) 또한 비길 데 없다’고 했다.

아직은 여름의 열기가 가시기 전이지만, 벼이삭은 어느덧 머리를 숙일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은 저녁 찬바람과 같이 왔다가 이른 새벽이슬과 함께 사라진다고 했다. 가을은 소리 소문 없이 우리 곁에 왔다가, 이제 가을이다 싶으면 어느새 계절의 저편으로 떠나곤 한다. 경부고속도로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성주IC로 빠져나와 33번 국도를 타고 성주군에 닿았다. 성주가 참외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길가에는 참외에 관한 홍보와 판매점들이 눈에 띈다.

성주읍에서 필요한 물품과 반찬거리를 구입한 후, 점심을 해결하고 가야산 주변의 볼거리를 찾아 나섰다. 사실 합천은 해인사와 가야산이 대표적인 볼거리지만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탑과 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 더욱이 합천은 조선시대 사상의 한 주류를 형성했던 남명 조식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황과 동시대 인물인 조식은 일상생활을 통해 ‘의’로서 실천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으며, 정구와 정탁, 정인홍 등에게 그의 사상이 이어져 경상우도 학파의 커다란 뿌리를 이루었다.

▲ 한강 정구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회현초당 자리에 세워진 회현서원. 한강 정구는 이곳에 매화 백 그루를 심고 백화원이라 불렀다.

남명의 사상을 이어받는 선비들의 고향 합천과 성주
때문에 합천과 성주군 일원에는 남명이나 그의 제자들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33번 국도와 59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회현서원은 남명과 퇴계의 제자인 한강 정구가 말년을 보내며 후학을 가르치던 초당이 있던 곳이다. 이 초당 자리에 미수 허목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초당을 허물고 서원을 세운 것이다.

▲ 1급수의 맑은 물이 일품인 용기골은 이 지역 사람들이 여름철 피서지로 즐겨 찾는 곳이다.
서원 앞마당의 느티나무는 수령 4백년을 자랑하듯 웅장하고 도도하다. 정구가 심었다고 하는 느티나무를 지나 서원에 들어서자, 양쪽으로 두 동의 건물이 보인다. 동쪽의 건물에는 ‘명의재’, 서쪽의 건물에는 ‘지경제’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의’를 추구했던 남명과 ‘경’을 숭상했던 퇴계의 이념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예’를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던 한강 정구는 남명과 이황의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다. 하지만 다소 소심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은 때론 스승을 짜증나게 만들기도 했다.

회현서원을 빠져나와 가야산의 암봉들을 조망하기 위해 남동쪽 사면의 백운동으로 차를 몰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야산 하면 합천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는 해인사가 합천 땅에 있기 때문으로 사실 가야산의 많은 부분은 성주군에 속해 있다. 33번 국도를 따라 가다 백운동계곡이란 이정표를 따라 좁은 포장길로 들어서자 가야산호텔 맞은편에 자리한 식물원이 눈에 띈다.

▲ 이른 아침 밝은 태양이 비추면 야영장도 분주한 하루가 시작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또 다른 하루를 알리는 청명한 햇살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풀벌레 소리에 가을 향이 짙어가는 야영장
2006년 여름에 개장한 가야산야생화식물원은 야생화, 곤충 등 가야산에 서식하는 식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치형의 식물원 입구를 지나자 연못에 핀 하얀 수련이 환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는다. 유리로 만든 종합전시관에서는 가야산에 서식하는 희귀 야생화 사진, 박제된 나비와 곤충, 나무 화석, 가야산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 해인사 문화해설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해인사에 있는 보물과 각종 문화재 등이 지닌 의미를 배울 수 있다.
가야산야생화식물원을 빠져나오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더위에 지친 하늘이 잠시 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숨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굽이굽이 휘돌아 가는 고개는 굽이마다 장관이며 명경이다. 아기자기한 암봉들이 늘어선 모습이 마치 하늘로 불꽃이 솟아오르는 듯하다. 아마 이중환도 이 고개 위에서 가야산을 조망했나 싶다.

가야면에서 59번 국도를 타고 해인사로 가는 길은 온통 녹음의 아우성이다. 이미 다 자라버린 벼들과 따가운 햇살에 마냥 신이나 기지개를 펴는 나무 등 계절은 여름을 지나 서서히 가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매표소와 두 곳의 야영장을 지나 지난밤 예약한 제3야영장에 자리를 잡았다. 온종일 땡볕에 익어버린 대지는 밤이 되며 비가 내린 탓에 온통 짙은 안개에 묻혀 버렸다. 밤이 되자 텐트를 정리해 자리를 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로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 사람,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등 캠퍼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숲은 어둠에 빠졌지만 나방과 벌레들은 가스등과 화롯불의 불빛을 따라 불나방이 되어 날아든다. 그리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듯 멀쩡한 사지를 던져 장렬히 타버린다. 나무에 곤충 타는 냄새가 더해져 진한 커피 향이 드리워진다. 화로에 삼겹살을 구워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를 느끼게 하는 장경각과 대장경

▲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고목. 아이러니 하게도 광복절 날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곤한 잠을 깨운다. 어제 밤 내린 비에 젖은 옷과 침낭을 말리느라 보이지 않는 자리다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베이컨과 감자에 버섯을 섞은 감자그라탕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가야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진행하는 해인사 문화해설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일주문을 시작으로 해인사 입구에 놓인 고목에 얽힌 이야기, 해인사 사천왕문에 대한 설명,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썼다는 해탈문의 편액 등 지난 역사에 얽힌 이야기 끈을 하나씩 풀어간다. 특히 해탈문 편액의 글씨체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욕심이 그대로 글씨체에도 반영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 한국 최고의 목불상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해인사 대적광전.
해인사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따라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으로 올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은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다. 나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고 한다.

이럴 경우 나무의 진이 빠지고 판자 내의 수분 분포가 균일해지며, 나뭇결이 부드러워 진다. 이렇게 만든 목판에 붓으로 쓴 다음 끌로 경전을 새긴 뒤에 여러 차례 옻칠을 해, 경판이 썩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더욱이 경판의 네 귀퉁이에 나무를 덧대어 뒤틀리지 않도록 했다고 하니 선조들의 과학적 지식에 탄복할 따름이다.

더욱이 대장경을 보관한 장경각은 위아래로 두 개씩의 창을 만들어 남쪽은 아래 창이 크고 북쪽은 위쪽 창이 크도록 설계했는데, 이는 외부 공기가 큰 창을 통해서 들어오고 작은 창을 통해서 나가게 해 공기의 자연스런 흐름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또한 남쪽으로 트인 넓은 아래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도록 해 경판에 직접 햇볕이 닿는 것을 피했으며, 장경각 안에서 자연스럽게 대기의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장경각과 대장경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땅의 자연주의 사상과 생활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 자의 오자도 없다는 대장경, 그 열성과 완벽주의에 찬사를 보낸다.

두 시간에 걸친 문화해설 참관을 마치고 다시 야영장으로 돌아와 서둘러 짐을 챙겼다. 가야산까지 찾아온 김에 서둘러 서울로 가기보다 인근의 청량사도 둘러보고 경상우도의 선비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 대적광전에서 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으로 올랐다. 수다라장에서 본 대적광전.

역사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하는 정인홍의 묘
홍류동계곡을 빠져나오며 접하게 된 것은 최치원이 소일하며 지냈다는 농산정이다. 이 농산정은 합천 8경 중 제3경으로 정자 옆에는 ‘고운 최선생 돈적지(孤雲 崔先生 燉跡地)’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홍수에 기둥이 무너진 것을 1992년 새롭게 보수한 것이다. 농산정을 빠져나와 최치원이 즐겨 찾았다는 청량사로 향했다. 청량사는 높은 절벽 위에 남북으로 가람을 배치했으며, 3층석탑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긴 석등이 눈길을 끈다.

▲ 식물원 입구에는 다양한 들꽃들을 심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웅전 중앙에 모신 석조석가불조상은 9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하대에 연꽃 무늬를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 1면에 2구의 팔부신상을 새겼다. 광배와 대좌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와 항마촉지인, 비천상과 화염무늬를 장식한 것이 석굴암의 모습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전망이 일품인 청량사 경내에서 다시금 차를 돌려 59번 국도를 빠져나와 정인홍의 묘를 찾아 가야면 야천리로 향했다. 한강 정구와 함께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내암 정인홍은 조선을 바꾸려 했던 정치가였다. 조식의 수제자인 그는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 싸웠으며 사헌부 장령일 때는 공명정대한 직언으로 비리를 척결했다. 때문에 이이조차도 ‘위엄을 갖고 일을 처리하며 규율을 바로 잡으니, 모든 관료들이 두려워 떨며 삼갔으며 시중의 상인들까지도 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은 감히 밖에 내놓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 가야산관광호텔 맞은편에 자리한 가야산야생화식물원. 가야산에 서식하는 꽃과 나무, 곤충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그에게는 앙심을 품은 관리들이 많았고, 결국 그것이 89세에 참형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평전을 못 쓴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내암 정인홍의 묘는 59번 국도가 가야면과 김천으로 갈라지는 분지점에서 김천 방향으로 100m 정도 더 가서 만날 수 있었다. 역적으로 몰린 탓에 무덤은 너무나 소박했고 보잘 것 없다. 더욱이 무덤 앞에 폐가가 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영의정까지 제수 받았던 인물로는 너무나 초라하다. 송강이나 우암의 묘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의 묘에서 입신양명의 허탈함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는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학풍을 비판했고, 부민호소법과 호패법을 주장했으며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기울어가는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육군은 을지문덕이요, 해군은 이순신이며 정치에는 정인홍이다’고 했는가 보다.

초라한 그의 무덤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오며, 그래도 이 시대 진정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청렴결백한 정치가가 아닌가 싶다. 매주말 자연으로 떠나는 이 작은 노력은 아마도 이권과 권력에 아부나 하는 사람들에게 지쳐 산림을 찾아 떠난 선인들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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