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아웃도어DB
  • 승인 2021.03.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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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경제학자로서 세계의 골목 상권을 이야기하는 모종린 교수. 저서 <골목길 자본론>,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를 통해 도시와 골목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경제학자로서 골목을 주목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홍익대 주변에서 새로운 유형의 골목 상권이 형성됐다. 다양한 예술가가 모이는 아지트이면서 카페 문화가 스며든 피카소 거리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골목이었다. 경제학자에게 골목은 단순한 길이 아닌 상권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피카소 거리에 주목하게 됐다. 골목 상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을 알아야 한다. 상점의 주인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상품을 판매하고, 소비자들은 각자의 라이프스타일과 닮은 제품을 선택한다.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면 자연스럽게 골목 상권의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으며, 미래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부터 골목에 주목하게 됐다.

저서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에서 라이프스타일의 역사를 정리했다
라이프스타일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단순화시키면 부르주아, 보헤미안, 히피, 보보, 힙스터, 노마드 등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등장한다. 가장 오래됐으며, 지금도 굳건히 명맥을 이어가는 부르주아는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어 사회 관습을 벗어나려는 보헤미안이 등장하면서 탈물질주의 시대가 열렸다. 예술가가 주축이 된 보헤미안은 부르주아 세력에 대항하지만 결국 좌절한다. 그 뒤를 히피가 이어받았고, 이들 역시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다. 1990년대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을 융합한 보보 집단이 출현하지만 성장하지 못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히피의 후계자인 힙스터가 나타났고, 2010년대에는 자유로운 영혼의 노마드가 등장하면서 현재 여섯 개의 라이프스타일이 경쟁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세력은 부르주아이며, 이에 저항하는 탈물질주의인 보헤미안, 히피, 보보, 힙스터, 노마드 등이 하위문화로 자리 잡으며 세력을 형성중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골목 상권을 이끄는 라이프스타일은 어떤 집단인가
특정한 지역이나 골목에서 한 가지 라이프스타일 집단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지만 대부분 여러 집단이 모여 하나의 골목 상권을 구성한다. 서울 연희동의 경우 보헤미안, 히피, 힙스터, 노마드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집단이 공존하며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에서 좋은 골목 상권이 되기 위해서는 힙스터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힙스터는 탈물질주의의 하위 개념이지만 보헤미안, 히피, 보보와 다르다. 이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창업으로 발현하면서 대기업과 프랜차이즈가 대표하는 상업주의에 저항한다. 독립 서점, 스페셜 커피 전문점, 공방, 편집숍 등 자신만의 정체성을 담은 가게를 도심 골목에 오픈하는 방식이다. 즉, 힙스터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동시에 부르주아라는 주류 문화를 거부하면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립 브랜드를 창출한다.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물질적인 풍요를 충족한 뒤 자아실현을 추구한다.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소비자들은 대량 생산된 상품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무언가를 구매하면서 자신을 표현한다. 정체성에 관한 욕구가 힙스터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힙스터 가게를 찾아 타인과 다른, 뭔가 조금이라도 특별한 물건을 구매한다. 앞으로도 정체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는 늘어날 것이고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하는 상품은 힙스터가 만든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MZ 세대들이 레트로와 뉴트로에 열광하는 이유도 정체성과 연결될 것 같다
나다운 것을 동네다움에서 찾는다. 나와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동네의 건축과 역사다.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건물과 역사를 담은 길은 복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레트로와 뉴트로는 정체성을 추구하는 욕구의 결과물이다. 정체성의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지금은 레트로와 뉴트로가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소재로 자리 잡았을 뿐이다.

‘~리단길’ 같은 골목 상권처럼 이런 현상이 단지 유행에 그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아니다. 서울 골목 상권 중 소위 힙한 곳은 매번 바뀔 수 있지만 동네 골목 상권이 한번 형성되면 계속 진화한다. 과거 클럽이나 디스코텍처럼 한 가게가 인기를 독점하는 골목은 오래가지 못한다. 반면, 문화와 창조 산업이 결합한 골목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홍익대 주변 피카소 거리를 예로 들어 보자. 단순히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홍익대 주변이 어느 순간 카페 문화와 예술 문화가 합쳐져 피카소 거리가 됐다. 사람들이 피카소 거리에 열광하자 일반 상인들이 피카소 거리로 몰려들어 색다른 콘텐츠, 이를테면 복합문화공간이나 커뮤니티 공간을 창작했다. 그러면서 상권은 점점 커졌고 연남동과 연희동까지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독립 서점, 공방, 개인 카페 등 독립 브랜드들이 줄줄이 생겨나면서 홍대 골목 상권은 지금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외부인 중심의 ‘~리단길’은 조금 다르다.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의 습격으로 많은 ‘~리단길’이 큰 타격을 받았다. ‘왜 그럴까’ 살펴보니 ‘~리단길’에는 주민 문화가 없었다. 어쨌든 많은 주민이 상주하는 골목에서는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이 와도 경제 활동이 이루어진다. 주민보다 관광객의 비율이 높았던 ‘~리단길’이 코로나19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17년 출간한 저서 <골목길 자본론>에서 미래를 위한 골목길 정책으로 C-READI 모델을 이야기했다. 완벽한 한국 골목의 모습은 무엇인가
골목 상권의 성공 조건을 C-READI 모델로 정리했다. C-READI는 문화 인프라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도시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이다. 서울 연희동이야말로 C-READI 모델을 충족하는 대표 골목 상권이다.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는 예술 공방, 적정 임대료 유지, 스페셜 커피 전문점과 독립 서점 등 개성 있는 상점은 물론이고 연희동의 골목 문화를 선도하고자 하는 힙스터들이 몰려있다. 여러 가지 대중교통으로 접근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저층 건물과 걷기 편한 거리, 주거 시설과 상업 시설이 공존한다. 코로나19 이후에는 골목 상권의 성공 조건으로 주민 문화를 강조하고 싶다. 연희동은 주민 70%, 외부인 30%로 구성됐다. 앞서 언급한 ‘~리단길’과 정반대인 셈이다. 연희동은 코로나19의 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골목을 사랑하고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하는 주민들이 많을수록 골목 상권의 미래는 밝다.

2016년 촬영한 아웃도어DB
2016년 촬영한 아웃도어DB

아웃도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다. 북한산성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장비 골목이 다시 활성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북한산뿐만 아니라 국립공원 입구에는 산채나물 식당이 대부분이다. 그 점이 안타깝다. 보통 등산객들은 등산 후 입구 마을을 둘러보지 않고 바로 빠져나간다. 먹고, 마시고, 즐기려고 해도 전부 산채나물 식당뿐이니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립공원 입구 마을은 아웃도어 상권 또는 알파인 빌리지로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지역이다. 산채나물만이 아니라 장비 전문점, 커피 전문점, 아웃도어 독립 서점, 빵집 등이 생기면 괜찮은 골목 상권을 형성할 수 있다.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의 본사라던가 <아웃도어> 잡지도 국립공원 근처로 옮겨 관련 직원들이 아웃도어를 생활화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렇게 되면 세계를 주름잡는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가 탄생하거나 새로운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을 개척할 수도 있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도 하는데, 강원도 양양 죽도해변의 서핑 마을을 보자. 아웃도어 마을의 가능성을 확인하지 않았나.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죽도해변으로 몰려 하나둘 서핑숍을 오픈하더니 서퍼를 위한 술집, 밥집, 카페가 생겨났다. 이들은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건물에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원색 페인트를 칠하고 골목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동시에 서핑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서핑 관련 웹툰 <파도를 걷는 소녀>가 출간되면서 국내 서퍼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이 대중문화 콘텐츠로 주목받았다. 아웃도어도 서핑처럼 국립공원 입구에 아웃도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진정성 있는 아웃도어 콘텐츠를 창작하면 현재 쇠락한 장비 골목에 관한 고민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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