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돌아 삶 속으로
모퉁이 돌아 삶 속으로
  • 김경선 | 정영찬 사진기자
  • 승인 2021.03.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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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호의 OPENING

큰 길 너머에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골목은 우리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화려한 브랜드숍이 가득한 큼직한 대로도 좋지만 때론 자그마한 집과 집이 어깨를 맞댄 소박한 골목이 더 정겹다.

에디터의 어린 시절은 골목에서의 추억이 8할이다. 학교를 마치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과 함께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고무줄놀이며 술래잡기, 땅따먹기를 하곤 했다. 골목의 아이들은 형편도 비슷했다. 무리 중 누군가 반짝반짝 빛나는 롤러스케이트를 가져와 자랑이라도 하면 며칠 내로 비슷한 물건 여럿이 골목을 달렸다. 그렇게 에디터도 샛노란 롤러스케이트와 핫핑크 자전거를 쟁취해냈고, 골목에서 배웠다. 길이라고 하지만 고작해야 너비 1.5m 남짓에, 짧은 길 끝에 수시로 등장하는 90도의 모퉁이. 이 좁은 골목길에서 롤러스케이트며 자전거를 익히는 사이 무릎에는 영광의 상처가 여럿 생겼다. 낡지만 소박했던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은 이렇게 관계를 배우고 성장해나갔다.

몇 해 전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가봤다.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운 좋게도 추억 속 골목은 여전했다. 어린 시절, 에디터에게는 이 좁은 골목이 세상의 전부였다.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골목은 너무나 낡고 비좁았다. 정사각형 블록을 대충 끼워 맞춘 듯한 울퉁불퉁한 길, 빛바랜 회색 담벼락, 삐걱대는 대문들. 온통 낡고 초라한 것들뿐이지만 그 속에는 어린 시절 풍기던 구수한 찌개 냄새와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잔소리를 퍼붓는 동네 할머니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눈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바짝 올려 붙은 머리를 한 어린 시절의 꾀죄죄한 ‘내’가 낡은 대문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골목에는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높은 빌딩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큰 길에 서면 막힘없이 시원하다. 하지만 가끔은 야트막한 담벼락 아래 몸을 숨기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뒷골목을 찾아 들어간다. 골목은 폐쇄적이며 동네 사람들의 은밀한 사정을 간직한다. 집집에서 흘러나온 냄새가 얽히고 흘러내려 골목의 냄새를 만들고, 문틈에서 새어나온 소문이 풍선처럼 부풀어져 동네를 떠돈다. 골목은 그렇게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다.

우리가 매일 똑같은 길을 걷는 사이 골목이 사라지고 있다. 도시 재개발, 재정비라는 명목으로 낡은 골목을 갈아엎어 깨끗하고 현대적인 길로 탈바꿈중이다. 그러나 모두가 새 것에 열광하는 사이 오래된 골목의 정겨움과 향수는 시대를 돌고 돌아 ‘트렌디함’으로 변화했다. 도심 속 외딴 섬처럼 고독하던 공간은 이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여행지로 변신했다. ‘◯◯길’이 유행처럼 번지자 우리는 골목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골목 사이에서 살아남은 소중한 공간들. <아웃도어> 3월호에서는 추억과 향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골목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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