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섬에서 만난 가을 춤사위
느림의 섬에서 만난 가을 춤사위
  • 글·김경선 기자 |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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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TRAVEL 강화도 | ③ 석모도 하이킹

▲ 석모도 북동쪽 하리의 해안. 아스라한 바다의 풍경과 쓸쓸한 고깃배가 가을을 재촉한다.

석포리 선착장에서 시작하는 일주코스…약 25km 5시간 소요

푸릇푸릇하던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 석모도는 풍요로운 대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식상한 자동차 드라이브로 놓쳐버린 석모도 풍경. 이번 가을에는 자전거로 품어보자. 빠른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나 느림의 풍경을 두 눈에 담고 있으면 가을이 어느새 그대 가슴으로 파고 들어오리니.


요란한 굉음을 내며 출발하는 배 주위로 갈매기떼가 몰려들었다. 과자부스러기의 짭쪼름한 맛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배가 출발하자 부둣가에서 쉬고 있던 갈매기들이 재빨리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과자를 던지던 아이의 입이 제 얼굴만큼이나 커지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던지는 족족 날쌔게 잡아채는 새들의 몸놀림이 마냥 신나나 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출발한 배는 10분도 안 돼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본섬에 바짝 붙어있는 새끼섬이지만 이동수단이라고는 배뿐인 석모도는 본섬에 비해 조용하고 한적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여유로운 느림의 섬 석모도에서는 자전거 여행이 제격이다. 게다가 섬 어디서든 전화만 하면 자전거를 배달해주니 자전거 하이커들에게 이보다 좋은 여행지도 없다.

▲ 민머루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넘실대는 들판이 펼쳐졌다.

▲ 섬 일주도로를 달리다보면 곳곳에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드러난다.
석포리 선착장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우리는 시계 바늘 방향으로 섬을 돌기로 했다. 9월 초, 아직은 초가을이지만 누렇게 영글 준비를 마친 벼들 사이로 가을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추수를 기다리며 겸손해진 벼들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부드럽게 춤을 추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페달에 힘이 실린다.

마주치는 바람에서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리 뜨거운 태양이 작열해도 바람이 가져다주는 상쾌함은 석모도를 더욱 아름답게 빚어냈다. ‘쌩쌩’ 바람을 가르며 20여 분 달려가니 석모도에서 가장 힘들다는 전득이고개다.

소문난 만큼 고개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500m 가까이 이어지는 가파른 고갯길은 페달질만으로는 온전히 올라가기 힘들었다. 결국 도중에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올랐다. 무섭게 달리는 차들을 피해가며 겨우 도착한 고갯마루. 자전거의 매력은 내리막이 아닐까?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내리막을 내달리자니 입에서는 절로 함성이 터지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하이킹에서의 내리막은 행복 그 자체다.

▲ 한때는 성행했던 삼양염전. 이제 쓸쓸한 폐염전이 돼버렸다.

고독으로 물들어가는 석모도 너른 평야
가을은 왠지 쓸쓸하다. 아마도 온 세상이 차분한 갈색톤으로 물들기 때문일 것이다. 초록이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발휘한다면 황색은 지적인 차분함으로 사색을 자극한다. 누렇게 물들어가는 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을의 문턱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벼가 넘실대는 논을 지나자 ‘민머루해수욕장’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석모도에서 유일한 해수욕장인 민머루해수욕장은 삼양염전과 너른 논 사이 길 저편에 자태를 숨기고 있었다. 좁다란 도로를 따라 해안으로 향하는 길은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오른쪽으로는 풍요로움의 상징처럼 넘실대는 논이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적막함과 고요함만이 남은 폐쇄된 삼양염전이 누워있다. 폐염전에 곧 골프장이 들어선다니 전원의 평화로움도 이제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10분쯤 달려 작은 언덕을 넘어가니 민머루해수욕장이다. 썰물로 시커먼 뻘을 드러내고 있는 해안은 고요를 깨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해수욕장에서 되돌아 나와 섬 일주도로를 다시 탔다. 오르내림이 없이 쭉 이어지는 평지가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을 더했다. 보문사를 향해 속력을 냈다. 20여 분을 꼬박 달리니 오른쪽으로 ‘보문사’ 입구다.

▲ 여유가 넘치는 석모도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4대 해수 관음 기도처, 보문사
보문사는 ‘기돗발’이 세기로 유명하다. 금산의 보리암,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 여수의 향일암과 더불어 석모도 보문사는 불교의 4대 해수 관음 기도처다. 조용한 경내에는 신자들과 관광객들이 제법 많았다. 석모도 여행을 왔다면 보문사 마애불상을 뵙는 게 여행자의 도리일 것이다. 대웅전 뒤로 400계단을 올라가니 근엄한 표정의 마애불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에서 나와 석모도 북단으로 향했다. 강화도와 석모도에는 간척지가 많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간척사업으로 험한 산세를 제외한 대부분의 평지는 간척지다. 덕분에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섬쌀을 생산하는 지역이 됐다. 철원, 이천, 여주 쌀 만큼 강화도 섬쌀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유명한 강화도 섬쌀 중에서도 최고로 쳐준다는 석모도 쌀이 대부분 섬 북단에서 나온다.

▲ 썰물로 검은 갯벌이 드러난 민머루해수욕장.

절에서 나와 제법 높은 언덕을 넘으니 이촌마을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논이 드러났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하리 방면으로 향했다. 석모리에서 하리로 이어지는 널찍하고 한적한 도로는 자전거 하이킹을 하기에 그만인 코스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영화 ‘시월애’ 촬영 장소로 달렸다.

영화 속 주인공의 집 ‘일 마레’는 몇 해 전 태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해안의 몽환적인 분위기만큼은 여전했다. 썰물로 밀려난 바다는 수평선까지 갯벌이 장악했고 검은 갯벌 위에 기우뚱 누워있는 고깃배들은 쓸쓸함을 더했다. 이 풍경은 고독한 가을과 닮아 보였다.

▲ 보문사 마애불상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신자들.
기다림에 지친 쓸쓸한 고깃배
석모도 동쪽 해안으로 향했다. 우리는 드넓은 논을 지나 30분 정도를 꼬박 달리고 나서야 동쪽 해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시원한 바다 풍경을 기대했건만 지척에 보이는 강화도가 바다의 조망을 방해했다. 마치 길쭉한 호수처럼 황량한 서해바다는 섬돌모루와 돌섬처럼 작은 새끼섬들로만 바다임을 증명했다.

섬 동쪽 해안도로는 서쪽에 비해 자전거를 타기 힘든 코스였다. 높진 않지만 잔잔한 언덕이 연이어져 페달을 밟는 다리에 점차 힘이 풀렸다. 그러나 해안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더위와 페달을 밟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줬다.

석포리 선착장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언덕이 눈앞에 나타났다. 느긋하고 잔잔한 섬 풍경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페달을 밟는 사이 일주가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유롭게 고갯마루에 오른 뒤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눈부시던 태양도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을의 추억이 농익는 순간. 하지만 쓸쓸하고 고독한 가을의 전설은 석모도에서 만큼은 해피엔딩이다. 풍요로운 대지의 결실로 섬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석모도는 이제 풍요의 계절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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