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모악산 아랫마을인 완주 항가리엔 허름한 집 다섯 채가 전부였다. 모악산이 음기가 세고 영험하다고 알려져 무당들이 굿판을 벌이거나 신흥 종교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휴열 화백은 33년 전 모악산에 작은 집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1988년에는 완주에 전원주택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여기가 전부 논이랑 밭이었다고. 시내와 달리 복잡하지 않고 조용했지. 땅값도 싸고(웃음). 게다가 모악산 사계절을 보면 영감이 딱 떠오르거든 그러다 보니 내 후배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이사 왔어. 1990년 초반부터 오페라 작곡가, 한국화가, 시인, 무용가, 서예가들이 여기에 터를 일군 거야. 시간이 흐르니까 외지인들이 여기를 예술가마을이라고 부르더라고.”
올해로 71세, 붓을 잡은 지 60년 차, 67세에 ‘금보성아트센터 한국작가상’을 수상해 상금 1억원을 거머쥔 유휴열 화백은 완주의 대표 예술가다. 한국의 흥을 유화와 알루미늄에 담아내는 유 화백의 작품은 투박하면서도 무뎠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푹 삭힌 청국장 맛이 났다.“처음 작품 활동할 때, 한국 미감의 원료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더니 ‘한(恨)’이더라고. ‘한’을 주제로 작품을 만드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보다 흥이 먼저인 거야. 예를 들면 상여가 나가기 전날, 판소리 한 구절 부르면서 흐드러지게 먹고 마시잖아. 초상집에서 흥이고 굿이고 말이나 되는 개념이냐고. 아마도 윤회 사상을 믿었기 때문에 저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 축하 한다고 생각했지. 초상집에서도 흥겨운 한국인의 정서에 내 생각을 곁들이고 싶었어.”
한국인의 희로애락 춤사위는 ‘신명난 생놀이’로 화폭에 담겼다. 때로는 알루미늄판에 유화 물감을 덧칠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다양한 소재로 작품 활동을 펼친 유 화백의 수장고엔 7천 점 가까이 되는 작품이 천장 끝까지 차 있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은 ‘1982년’이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해외에 거주해 진실 보도를 많이 접할 수 있었어. 사람들이 군인에게 맞고 짓밟히는 장면이 전부 텔레비전에 나왔거든. 그때 내가 충격을 받은 거야. 그 전엔 내 작품은 대부분 추상화였는데 이 시점을 기준으로 상당히 구체화됐지. 화폭에 인물을 넣거나 강렬한 붓칠을 해서 그림의 의미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말이야. ‘1982년’이 스타일 변화의 기폭제인 셈이지.”
화실 옆에 자리한 유휴열 미술관엔 모악산의 사계절을 그린 모악산 시리즈, 배롱나무, 동백나무 등 풍경화가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유휴열 미술관은 올 10월까지 <유휴열-산·나무·꽃展>을 선보일 예정이다.
“처음 모악산에 들어왔을 때 작은 화실이 전부였지만 차츰 정원을 가꾸고 수장고를 만들고 미술관을 지었어. 크고 번듯한 것보다 작지만 그 안에 내 일생을 담고 싶었거든. 한 작가의 삶을 오롯이 관찰 할 수 있는 기념관이 가치가 있을 테니까. 어제의 삶이 오늘의 나, 오늘의 삶이 내일의 나야. 60여 년간 해왔던 거처럼 그림 그리고 때로는 관람객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즐겁게 살다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