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여행]모악산에서 즐기는 유화
[완주여행]모악산에서 즐기는 유화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0.09.09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휴열 화백

40년 전 모악산 아랫마을인 완주 항가리엔 허름한 집 다섯 채가 전부였다. 모악산이 음기가 세고 영험하다고 알려져 무당들이 굿판을 벌이거나 신흥 종교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휴열 화백은 33년 전 모악산에 작은 집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1988년에는 완주에 전원주택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여기가 전부 논이랑 밭이었다고. 시내와 달리 복잡하지 않고 조용했지. 땅값도 싸고(웃음). 게다가 모악산 사계절을 보면 영감이 딱 떠오르거든 그러다 보니 내 후배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이사 왔어. 1990년 초반부터 오페라 작곡가, 한국화가, 시인, 무용가, 서예가들이 여기에 터를 일군 거야. 시간이 흐르니까 외지인들이 여기를 예술가마을이라고 부르더라고.”

올해로 71세, 붓을 잡은 지 60년 차, 67세에 ‘금보성아트센터 한국작가상’을 수상해 상금 1억원을 거머쥔 유휴열 화백은 완주의 대표 예술가다. 한국의 흥을 유화와 알루미늄에 담아내는 유 화백의 작품은 투박하면서도 무뎠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푹 삭힌 청국장 맛이 났다.“처음 작품 활동할 때, 한국 미감의 원료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더니 ‘한(恨)’이더라고. ‘한’을 주제로 작품을 만드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보다 흥이 먼저인 거야. 예를 들면 상여가 나가기 전날, 판소리 한 구절 부르면서 흐드러지게 먹고 마시잖아. 초상집에서 흥이고 굿이고 말이나 되는 개념이냐고. 아마도 윤회 사상을 믿었기 때문에 저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 축하 한다고 생각했지. 초상집에서도 흥겨운 한국인의 정서에 내 생각을 곁들이고 싶었어.”

한국인의 희로애락 춤사위는 ‘신명난 생놀이’로 화폭에 담겼다. 때로는 알루미늄판에 유화 물감을 덧칠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다양한 소재로 작품 활동을 펼친 유 화백의 수장고엔 7천 점 가까이 되는 작품이 천장 끝까지 차 있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은 ‘1982년’이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해외에 거주해 진실 보도를 많이 접할 수 있었어. 사람들이 군인에게 맞고 짓밟히는 장면이 전부 텔레비전에 나왔거든. 그때 내가 충격을 받은 거야. 그 전엔 내 작품은 대부분 추상화였는데 이 시점을 기준으로 상당히 구체화됐지. 화폭에 인물을 넣거나 강렬한 붓칠을 해서 그림의 의미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말이야. ‘1982년’이 스타일 변화의 기폭제인 셈이지.”

화실 옆에 자리한 유휴열 미술관엔 모악산의 사계절을 그린 모악산 시리즈, 배롱나무, 동백나무 등 풍경화가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유휴열 미술관은 올 10월까지 <유휴열-산·나무·꽃展>을 선보일 예정이다.

“처음 모악산에 들어왔을 때 작은 화실이 전부였지만 차츰 정원을 가꾸고 수장고를 만들고 미술관을 지었어. 크고 번듯한 것보다 작지만 그 안에 내 일생을 담고 싶었거든. 한 작가의 삶을 오롯이 관찰 할 수 있는 기념관이 가치가 있을 테니까. 어제의 삶이 오늘의 나, 오늘의 삶이 내일의 나야. 60여 년간 해왔던 거처럼 그림 그리고 때로는 관람객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즐겁게 살다 가고 싶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