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예, 여주 생활 도자
한국의 도예, 여주 생활 도자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0.04.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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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에 스며 든 예술

유려한 곡선과 은은한 유광이 돋보이는 그릇.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여주 도자기가 궁금하다.

많은 고서에서 여주를 고려 초기 최대의 백자 생산지라고 언급했지만 발굴된 고려 초기 도자기는 대부분 청자였다. 이에 여주군은 2001~2002년에 걸쳐 경기도박물관에 학술발굴조사를 의뢰한다. 2003년 경기도박물관이 여주 북내면을 샅샅이 파헤친 끝에 중암1리 마을회관 부근 구릉지에서 완벽한 형태를 지닌 고려 초기 가마터와 백자를 출토한다. 이것이 한반도 도자기 발생 초기 상황과 변천 과정 그리고 초기 백자의 실체를 증명한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다.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는 약 10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미 천 년 전부터 여주에서 도자기 생산이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자기 역사는 조선 시대에도 계속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도기소 하나가 여주 관청의 북쪽 관산에 있다’는 대목이 언급됐다. <동국여지승람> 같은 문헌에서도 자기와 도기를 여주 특산물로 꼽았다. 무엇보다 도자기 원료로 쓰이는 고령토와 백토층이 여주 싸리산에서 생산돼 여주는 일찍부터 도공과 도예가들의 작업장이었다. 비록 1592년 임진왜란 때 수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지만 여주 도자기의 역사는 계속됐다.

1884년 여주 도자기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왕실 도자기 성지로 알려진 광주분원이 파점되자 김현채, 이희풍, 함기순, 한호석, 김문배 도공이 여주로 이주했다. 그들은 요강과 막사발 등 생활 도자기를 만들어 보급했고 여주 생활 도자기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도공이 여주에 정착하기 전엔 이름 없는 도공들의 작품과 옹기가 대부분이었던 걸로 예상된다.

여주는 이천 도예와도 상관관계가 있다. 193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보고서에 따르면 여주시험소에 도암 지순택과 해강 유근형이 조각사로 근무했다고 쓰여있다. 지순택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4호로 지정된 백자의 대가이고 유근형은 단절된 고려청자 비법을 재현한 청자 도예가다. 지순택과 유근형은 젊은 시절 여주에서 도예를 배운 후 1960년대 이천으로 넘어가 한국 도예 역사를 재현하고 창작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주 생활 도자기, 광주 왕실 도자기, 이천 종합 도자기는 스타일이 다를 뿐 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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