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물
가장 보통의 물
  • 정다솜
  • 승인 2020.01.16 0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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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rkling Water, Europe

나의 생애 첫 해외 여행지는 유럽이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마주한 고풍스러운 건축물이며 이국의 봄날이 보여주는 수려한 풍광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신기했지만, 사실 그 여행 내내 나를 지배했던 화두는 의외로 엉뚱한 것이었으니. 그건 물, 정확하게 말하면 ‘마시는 물’이었다.

#유럽에서보통물찾는법

첫 도시인 런던에서 물을 사러 마트에 들른 게 시작이었다. 물 코너가 너무 넓어 잠시 갸웃했지만 ‘역시 선진국은 여러모로 스케일이 다르구먼’ 하며 가볍게 넘겼는데, 문제는 계산을 마치고 나타났다. 물병 뚜껑을 비트는 순간 내 상식에 어긋나는, 그러니까 보통의 물이라면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린 것이다.
치이익-.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면서도 일단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아, 톡 쏘는데 밍밍하고 느끼하면서 살짝 신맛도 나다가 애매한 쓴맛으로 끝나는, 물도 음료도 아닌 이 끔찍한 혼종은 당최 무엇인가. 곧장 손짓발짓을 동원해 마트 직원에게 “노말(Normal) 워터 플리즈”를 외쳤으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 다른 탄산수를 콕 집어준 덕에 그날은 물과 돈이 줄줄 샜다. 보통 물 찾기가 이리도 어려울 일인가.

스무 해 동안 물이라곤 생수밖에 몰랐으며 탄산수는커녕 탄산음료도 입에 잘 대지 않던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에서 ‘유럽 생수 구별 방법’을 검색했다. 다행히도 이 당혹스러운 물의 습격을 앞서 겪은 뒤 후대 여행자들을 위해 친히 정보를 공유하신 존경스러운 선배가 몇 있었다. 다만 선배들이 제시한 생수 구별법은 대단히 가지각색이었다. ‘물통을 힘껏 눌렀을 때 단단하면 탄산수고 움푹 들어가야 생수입니다’, ‘라벨 속 글자들을 보험 약관 읽듯 면밀히 살펴보세요. ‘Still’이나 ‘Spring’, ‘Natural’이 적혀있으면 생수입니다’, ‘독일은 뚜껑 색깔이 말해줍니다. 녹색이 생수예요’ 등등. 그러나 그들의 법칙도 지극히 개인적 경험에 입각한 것이어서 결국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급기야 그 모든 법칙을 가볍게 뛰어넘는 빌런 탄산수를 로마에서 만났으니, 엄지손가락이 원하는 대로 자리를 움푹움푹 양보한 녹색 뚜껑의 ‘내츄럴 스프링 워터’. 내 젤라또 맛은 잊었을지언정 네놈의 맛은 잊을 수 없지.

탄산수가 뭐길래
자, 그래서 탄산수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탄산, 즉 이산화탄소가 녹아있는 물이다. 오직 순수한 탄산만 들어있단 점에서 콜라와 사이다처럼 설탕과 식품 첨가물이 더해진 탄산음료와 다르다. 연배로 따지면 콜라가 제사를 모셔야 하는 조상뻘이다. 쉽게 말하면 탄산수의 역사는 인류가 식수를 구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상수도 시설이 마련되기 이전 시대의 인간은 우물을 파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그러다 화산 암반처럼 특정한 지질을 가진 지역 우물엔 미네랄 등의 광물질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광천수(鑛泉水)라고도 불리는 이 물은 탄산 함유량도 많았다. 이처럼 탄산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광천수를 천연 탄산수라고 한다면 이산화탄소를 의도적으로 녹인 인공 탄산수는 1767년 영국에서 탄생했다. 맥주 거품에서 영감을 얻은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정제수에 이산화탄소를 주입하고 흔들어 물에 녹였던 게 시초다. 곧 조지프의 논문을 참고한 누군가가 인공 탄산수를 만드는 기계를 발명했고, 마침 이 시기가 산업 혁명과 맞물리면서 탄산수도 대량 생산품 대열에 빠르게 합류했다.

유러피안에게 가장 안전한 식수
대부분의 식당이 인심 좋게 무료로 물을 제공하는 한국과 달리 유럽 식당에선 수돗물이 아닌 음용수는 사 마셔야 한다. 왜 그런고 물으면 ‘유럽은 수질이 나빠서’ 그렇단다. 글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미미한 차이기는 해도 어쨌든 이들이 딛고 사는 땅을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좀 더 정확하다. 널리 알려졌듯 유럽 대륙의 지질 전반은 석회암으로 구성돼 있어서 땅줄기를 타고 흐르는 지하수 속에도 상당량의 석회가 녹아있다. 인체에 무해하다곤 하나 물맛이 텁텁하고 시시때때로 복통과 피부 트러블을 유발하는 석회수를 마냥 안심하고 마실 순 없기에, 이곳에서는 석회를 걸러낸 물을 사 마시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진작 자리 잡았다. 그럼 그중에서도 왜 하필 탄산수일까. 석회수의 주성분은 수산화칼슘이다. 수산화칼슘은 이산화탄소와 만나면 탄산칼슘이란 걸 만드는데, 탄산칼슘은 불용성이라 물에 녹지 않고 앙금이 되어 바닥에 가라앉는다. 즉 석회수에 이산화탄소를 넣으면 수산화칼슘의 필터 역할을 하는바, 과학적인 수질 측정법이나 물을 정교하게 정수하는 기술이 발달치 못했던 시대에는 ‘탄산수=석회질 없는 안전한 물’이란 명제가 보편으로 통했다. 육류와 버터, 치즈를 주로 이용하는 기름진 유럽 음식과의 궁합이 좋기도 했고. 함께한 세월이 워낙 오래돼서인지 생수를 비롯해 다양한 물이 넘쳐나는 지금도 탄산수는 유러피안 식수계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최근 한국에도 탄산수 열풍이 불고 있다. ‘페리에’나 ‘산 펠레그리노’ 같은 유럽 탄산수 몇 종을 수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롯데, 이마트, 광동, 해태 등 국내 음료계 대기업들이 앞다퉈 탄산수를 출시하더니 각종 예능과 드라마 속 PPL로도 심심찮게 보인다. 이들의 광고를 보면 대개 프리미엄과 건강을 강조한다. 전자의 경우, 유럽이라는 ‘외국 물’을 먹은 물임을 부각해 소구력을 얻고자 한 모양인데 정작 유럽에선 평범한 식수에 불과하므로 패스. 건강 효능을 말하는 후자가 오히려 흥미롭다. 피로와 숙취 해소에 탁월하고 장 운동을 원활하게 만들어 변비 치료에 좋은 데다 다이어트까지 돕는다니, 카피만 봐서는 고로쇠 물보다 더하다. 사실 탄산수의 효능에 관한 이야기는 이전부터 있었다. 예로, ‘초정 탄산수’ 수원지인 청주시 초정리에는 당뇨병을 앓던 세종대왕이 요양차 이곳에 머물렀으며 임금의 궁까지 물을 특송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자랑으로 전해진다. 탄산수 고향인 유럽에도 비슷한 설이 몇 있어서, 탄산수와 건강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하는 연구가 수차례 이뤄졌는데 대부분의 결론은 이렇다. ‘악영향도 없고 좋은 영향도 딱히 없다'는 것. 인공 감미료나 화학 성분이 없는 저열량 음료라는 측면에선 콜라보다야 낫지만, 그렇다고 탄산수를 건강 음료라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어디까지나 식수 혹은 기호 식품일 뿐.

탄산수 노이로제 극복기
첫 유럽 여행에서 질겁한 이후 줄곧 거부해오던 탄산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건 바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담백한 물맛으로 기주(칵테일 조주시 기본이 되는 술)와 시럽의 미묘한 성질을 뒷받침하면서, 청량감을 더하고 칵테일 맛의 균형까지 조율하는 묵묵한 매력에 감복한 마음이 서서히 열렸달까. 특히 탄산수의 존재감은 진 피즈나 위스키 소다처럼 아주 단순하고, 단순하기에 맛있기도 어려운 하이볼류 칵테일에서 빛을 발한다. 사람으로 치면 연기파 감초 배우라고 할 수 있겠다. 브랜드 따라 탄산 농도와 유지력, 물맛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서 동일한 레시피이되 탄산수 종류만 달리해 만든 칵테일 맛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유별이 보통으로 변하는 시간
런던에 온 뒤론 꼭 칵테일이 아니더라도 탄산수를 종종 마신다. 자주 해 먹는 오일 파스타 짝꿍으로 생수보단 레몬 한 조각 띄운 탄산수가 찰떡이고, 커피를 마신 뒤 입안에 남은 자질구레한 깔깔함을 날리는 데에도 그만이다. 몸이나 마음이 무거울 때도 탄산수를 찾는다. 얼음 위로 알알이 부서지며 신명나게 터지는 물방울 소리가 상쾌하기도 하고, 꿀꺽꿀꺽 삼킨 뒤 목을 긁는 날카로움에 얼굴을 한껏 구기고 나면 기분이 한결 시원해진다. 엊그제도 마트에 들러 별 고민 없이 탄산수를 집어 들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세상에, 생수는 안중에도 없이 제 손으로 탄산수를 고르는 날이 오다니. 새삼 놀랍고 우습기도 해서 피식 웃음이 난다. 십 년이면 강산뿐만이 아니라 이런 것도 변하나 보다. 가장 유별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가장 보통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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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 2020-01-31 08:31:18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적절한 비유와 예시가 초딩 딸에게 읽혀도 어렵지 않은 지식이 될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