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머, 남극에 가다
클라이머, 남극에 가다
  • 박신영 기자 | 사진제공 서명호
  • 승인 2019.05.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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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과학기지 안전요원 서명호 인터뷰

극지의 삶이 궁금하다. 남극 과학기지의 멋진 생물학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에서 빙벽을 오르는 지질학자는 동경의 대상이다. 극지에는 연구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을 지원하는 안전요원도 있다. 빙벽에 로프를 설치하고, 캠프 기지를 설치하는 등 안전 관련 모든 일을 수행하는 장보고과학기지 안전요원 서명호 씨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극지안전요원, 극지안전훈련강사, 드론 제작자, 드론 조종사, 항공촬영가, 사진측량기술자인 서명호입니다. 2018년 11월부터 2019년 2월까지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생명연구팀 안전요원으로 참여한 후 지금은 한국에서 휴식 중입니다.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에서 1년간 활동하는 월동 대원이 아닙니다. 여름 두 달간 남극에서 머물며 연구원을 지원합니다. 로프 설치, 텐트 사이트 구축과 유지 관리, 요리, 사진 촬영 등의 일을 합니다.

장보고과학기지
2014년 남극 빅토리아랜드 테라노바 만에 건설된 과학기지로 세종기지에 이은 우리나라의 두 번째 남극 과학기지다. 남위 74도에 위치, 여름에는 백야(낮이 계속되는 상태)가, 겨울에는 극야(밤이 계속되는 상태)가 나타난다. 1년 내내 사람들이 상주하는 기지로, 지질·생물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한다.

남극엔 언제 처음 가신 건가요
2014년부터 안전요원으로 남극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전해에 안전요원으로 활동했던 지인이 추천해 장보고과학기지로 향하게 됐습니다. 2014년엔 지질연구팀 안전요원이었어요. 지질 연구팀은 기지에서 수백km 떨어진 곳에 캠프를 설치하고 연구를 수행합니다. 조사 지역 대부분이 경사면이라 로프 설치가 가능한 등반 전문가가 필요하죠. 2011년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암벽 등반을 해왔던 제게 적합한 일이었습니다. 한창 등반을 하던 시절엔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야영도 많이 했고, 서바이벌 상황에 많이 노출됐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암벽 등반을 했던 경험이 남극에서 요긴하게 쓰였네요
맞아요. 그래서 남극 생활이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면서 암벽 등반을 시작했어요. 2011년 처음으로 암벽을 탔을 때 짜릿함, 쾌감, 희열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아웃도어에 눈을 떴죠. 태국, 라오스, 미국 등 해외 곳곳을 누비며 바위를 찾아다녔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곳은 스페인이에요. 유럽에선 스페인이 암벽등반 장소로 유명하거든요. 로데야르, 안달루시아 등 최고의 절경과 스릴을 느끼게 하는 곳이죠. 2012~2013년까지 오로지 암벽등반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어요. 경제활동을 하지 않다 보니 시간은 많고 돈은 없는 생활이었죠. 항공권만 구매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해결했습니다. 숙박은 야영장을 이용했고, 저렴한 스페인 식재료로 음식을 해 먹었죠. 자연스레 캠핑 기술도 늘었고요. 한동안 암벽등반에 미친 삶을 살았어요.(웃음)

등반의 매력이 뭘까요
생각이 없어지는 것. 바위에 매달린 순간에는 그것에 집중하니까 다른 생각이 안 들어요. 평소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잖아요. 등반할 때는 정신이 맑아진다고 할까요? 오로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죠. 한마디로 잡생각이 없다진다는 게 매력이에요. 또 암벽등반은 체력과 기술력을 요구하는 스포츠예요. 1m 높이의 바위지만, 몇 시간씩 고민해 루트를 짭니다. 오로지 내 체력과 기술력을 사용해서 정상에 섰을 때 큰 자부심을 느껴요. 그 짜릿한 맛 때문에 암벽을 탑니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텐데요
두려움은 늘 있죠. 하지만 항상 로프를 사용하고, 밑에서 확보를 봐주기 때문에 ‘죽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추락해서 다칠 수는 있겠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바위를 타다가 낙상사고를 당했었거든요. 무릎이 심하게 다쳐서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했어요. 지금도 달리기는 힘들어요. 그 후로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때때로 ‘몸을 사린다’, ‘진정한 암벽 등반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는데, 암벽 등반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요. 암벽 등반 자체를 즐기는 거죠.

남극에서 일과 후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요
펭귄을 연구하는 생명팀 안전요원으로 활동할 땐 주로 펭귄 사진을 찍었어요. 생명팀의 경우 위험 요소가 적은 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지질팀에서 일할 때보다 안전요원으로서 할 일이 적거든요. 그리고 마땅히 찍을만한 게 펭귄밖에 없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펭귄 행태를 보는 게 재미있어요. 한 두 달 사이에 새끼에서 어미로 성장하는 펭귄을 보면 부성애가 솟기도 하고요.

펭귄 사진으로 제7회 극지사진 콘테스트 우수상도 받았네요
운이 좋았죠. 제가 카메라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거든요. 사용설명서로 기본 지식을 익힌 후, 소장용으로 애완묘를 촬영하면서 기술을 연마했어요.

드론 촬영도 한다던데요
2016년 장보고과학기지 지질팀 안전요원으로 활동할 때 드론을 접했어요. 당시 국내에서 한창 드론 열풍이 불었는데, ‘드론을 이용해 지질 지형도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항공 사진을 갖다 붙여, 지질 지형을 3D로 구현하면 연구에 도움 될 거라고요. 마침 기지에 드론이 있어서 공중에 띄웠는데 종종 추락하는 거예요. 빙하가 이동하기 때문에 실제 남극점과 나침반의 진북, 자북, 진남, 자남의 위치가 달라요. 편각(자석이 나타내는 방향과 자오선이 이루는 각)이 130도 이상 차이 날 때도 있고요. 출시된 드론으로는 남극 촬영이 불가하다고 판단, 직접 드론을 조립, 제작했어요. 조립한 드론으로 남극 지질 지형도를 만들고 연구팀에 도움을 줬죠. 생명팀 연구에도 도움이 됐어요. 생명팀은 매년 펭귄의 개체수를 조사하거든요. 예를 들어, 기후 변화가 펭귄에게 미치는 영향, 지난해보다 펭귄 개체수가 줄어든 이유, 펭귄 둥지 등을 조사해요. 모든 조사는 연구원의 손으로 진행됐어요. 일일이 손으로 펭귄을 세거나 헬리콥터를 타고 몇 시간씩 사진을 찍었죠. 오차도 크고 육체적으로 힘들었는데, 드론을 띄운 후엔 조사가 훨씬 수월해졌어요.

열정이 대단해요
누군가 시킨 일이 아니에요. 저 스스로 하고 싶었고 또 연구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진행한 거죠. 덕분에 이전보다 연구도 쉬워졌고 계속 남극에 갈 수 있었어요. 만약 안전요원으로서만 활동했다면 몇 년간 남극에 갈 수 없었을 거예요. 안전요원에 지원하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으니까요. 지금은 안전요원보다 항공 촬영가로서 남극에 가는 일이 많아요. 어찌 보면 일자리를 창출해 낸 거라 할 수 있겠네요.(웃음)

앞으로 목표는요
아직 드론 촬영이 공식화되지 않았어요. 드론 기술을 남극에 적용하는 수준이죠. 조금씩 노하우를 쌓는 중이고요. 연구팀이 제게 제안한 일이 아니라 제가 먼저 연구팀한테 제안한 일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막중하고요. 제가 벌여놓은 일을 잘 마무리 하는 게 목표예요.(웃음) 남극 드론 조종사란 직업의 초석을 잘 닦고 싶기도 하고요. 남극에서의 삶이 마무리되면 스페인으로 등반을 가고 싶어요. 등반으로 시작해서 등반으로 끝나는 인생이죠. 스페인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여유롭게 암벽을 타고 야영하는 게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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