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경영 이어가는 아웃도어 브랜드는?
가족 경영 이어가는 아웃도어 브랜드는?
  • 임효진 기자
  • 승인 2017.04.06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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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웃도어 패밀리 1…잠발란, 하그로프스, 힐레베르그

시작하기에 앞서, 가족 경영과 세습, 장인 정신의 차이는 뭘까. 가족이 대를 이어서 가업을 이어나가는 공통점이 있지만, 규모와 얼마나 투명하게 경영 승계가 됐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나뉜다. 이번에는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가족 경영을 이어나가는 아웃도어 브랜드를 살펴보기로 한다.

3대를 이어오는 이태리 등산화 명가, 잠발란
가족경영은 말 그대로 가족이 대를 이어 경영을 이어가는 구조이다. 대부분 창업자에 이어 그의 아들과 손자가 경영을 맡으며 혈연으로 대주주의 자리가 유지돼 결속력이 좋다. 한국에서는 가족 경영을 북한과 재벌로 인해 장인 정신보다는 불투명하게 기득권을 이어가는 세습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가족 경영이란 엄연히 경영 방식의 한 부류로 장점도 많다.

가족 경영의 가장 큰 장점은 창업자의 문화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중간에 중단되지 않고 몇 십 년에 걸쳐 완수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완성도가 높고 역사성을 가져 소비자들에게 깊은 신뢰를 준다.

이태리 등산화 브랜드 잠발란이 그렇다. 1929년 이태리의 북부 산악지역에서 시작된 잠발란은 할아버지 주세페 잠발란이 창업해 지금은 손자인 마르코 잠발란이 경영 전반을 이어가고 있다.

돌로미테 산맥이 굽어보는 스키오 마을에서 자란 주세페 잠발란은 등산을 좋아하는 신발 수선공이었다. 그러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늘어난 산악인과 장비 수요를 보고 신발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당시에는 여전히 가죽으로 된 바닥 창에 쇠로 징이 박힌 등산화를 사용할 때였다.

주세페 잠발란은 그 등산화가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었고 접지력이 좋은 고무가 있다면 무겁고 불편한 쇠로 된 징이 박힌 등산화를 벗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등산화에 대한 열망은 비브람 창업자인 비탈 브라마니와 극적인 만남으로 이어졌고 그 둘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느라 여러 밤을 지새웠다.

비탈 브라마니와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주세페 잠발란은 기계를 사들이고 동업자를 고용해 작은 공방을 열었다. 이 공방에서 오늘날과 같은 고무창으로 만들어진 등산화가 만들어진다. 그때 만들어진 고무창 등산화는 오늘날까지 대체하는 제품이 없이 등산화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잠발란의 작은 공방이 성공적인 공방으로 자리 잡는 데는 주세페의 아내 마리아의 역할 또한 컸다. 숙련된 솜씨를 갖고 있던 그녀는 기계공과 봉제공 역할을 도맡아 잠발란 공방의 밑거름을 다졌다.

아버지의 창업 과정을 보고 자란 에밀리오 잠발란은 공방과 함께 등산화에 대한 열정까지 물려받았다. 에밀리오는 처음에는 공방에서 아버지를 도와 등산화를 만드는 작업을 하다 경영자 자리까지 맡는다. 그는 공방을 물려받은 데서 그친 게 아니라 해외 시장을 목표로 회사를 경영했다. 여기에는 에밀리오 아내가 참여해 경영 전반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꼬를 터놓은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에밀리오의 아들이자, 주페세의 손자인 마르코 잠발란이 굳히기에 들어간다. 마르코 잠발란은 ‘독보적인 가족 경영’, ‘차별화된 우수한 품질’, ‘메이드 인 이태리’가 잠발란이 가진 강점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한 켤레를 만들어도 완벽한 품질의 제품을 만든다는 잠발란 사의 자부심이 허세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데 있을 것이다. 잠발란은 등산화를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가 됐지만 여전히 60% 수준을 수제로 작업한다. 또한 장인 정신을 이어가는 곳이 으레 그러하듯 1:1 도제식 교육을 최소 3년 6개월 간 거친다.

하그로프스 가家 DNA가 살아숨쉬는
스웨덴 아웃도어 브랜드 하그로프스는 몇 해 전 창립 100주년을 맞은 장수 기업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창립자 빅토르 하그로프스는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농부였던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많은 농기구를 싣고 먼 거리에 있는 밭으로 다니다보니 배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빅토르. 그는 거친 농기구를 담아도 쉽게 구멍이 나지 않는 배낭을 연구했다. 시안을 직접 제작한 후 봉제 기술이 좋았던 옆집의 마리아에게 제작을 부탁했다.

100주년 행사에 참석한 창업자의 차남인 한스 하그로프스(오른쪽)

그의 배낭을 보고 이웃집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배낭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고, 그는 농사보다 배낭을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배낭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빅토르는 1935년에는 공장을 짓고 대량 생산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그의 장남인 롤프 하그로프스도 경영과 디자인 전반에 참여한다. 여기에 몇 해 뒤에는 차남인 한스 하그로프스까지 참여해 프레임이 들어간 배낭을 제작했고, 그 배낭은 ‘대박’을 쳤다.

1975년, 창립자인 빅토르는 회사가 지금보다 더 세계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 경영 전반을 맡겼다. 그 뒤 하그로프스 형제들은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들이 남긴 하그로프스 가(家) DNA는 여전히 제품 곳곳에 스며있다.

플라이와 이너를 결합한 최초의 텐트, 힐레베르그
산림 감독관이었던 보 힐레베르그는 1971년 산림 장비를 생산하는 힐레베르그 AB 사를 설립했다. 그 해는 스키 강습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르네를 만난 해이기도 하다. 그녀와 결혼은 힐레베르그가 텐트 전문 브랜드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전까지 보는 캠핑을 다닐 때 이너텐트와 플라이를 따로 치면서 매우 번거롭다고 느꼈다. 좀 더 간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손 기술이 좋은 르네를 만났다. 보는 그녀와 함께 이너텐트와 플라이를 동시에 설치할 수 있는 텐트를 개발했고 그 텐트는 유럽 시장에서 단번에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지금은 레이드라는 이름으로 업그레이드 돼서 나오고 있는 켑 텐트다.

켑 텐트의 인기를 실감하고 난 후 보는 본격적으로 텐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르네가 바느질을 맡을 동안 보는 디자인과 영업을 담당했고 힐레베르그 사는 승승장구한다. 오늘 날도 여전히 가족 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힐레베르그. 보는 회장직과 함께 디자인과 개발을 맡고 있으며, 르네와 그의 아들 로프는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그의 딸 페트라가 힐레베르그 그룹의 CEO가 돼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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