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으로, 횡성 태기산 백패킹
눈보라 속으로, 횡성 태기산 백패킹
  • 글 성신여자대학교 산악부 Ι 사진 정영찬 기자
  • 승인 2017.02.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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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산에 알록달록 추억 그리기
찬 겨울의 한가운데서 찾은 태기산은 온통 하얗게 빛나는 눈 속 세상이었다.

연말연시가 더욱 의미 있는 건 한 해를 정리하며 새로운 삶을 맞이할 준비로 벅차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1년의 끝자락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2016년의 끝을 장식한 우리만의 특별한 장소는 눈 덮인 태기산이었다.

눈 소식이 있는 겨울 산에 오른다면 철저한 준비가 필수다. 커다란 배낭 가득 장비를 담았지만 즐거운 마음에 무거운 줄 모른다.

설산을 맞이하는 자세
2016년 마지막 산행지는 강원도 횡성에 자리한 태기산(1,261m)이다. 횡성에는 며칠 전 내린 폭설이 잔뜩 쌓여있을 테고, 강원의 산은 대개 높고 험하니 이번 여정도 쉽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행일에 눈 예보까지 내려졌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지다 우연히 태기산의 설경 사진을 발견했다. 눈부셨다. 많은 이들이 눈이 오기를 기다려 태기산을 찾는단다. 가장 아름다운 절정을 맞은 태기산에 가는 것이 문득 행운으로 다가왔다.

설산을 만끽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준비는 필수다. 아이젠, 스패츠, 우비, 장갑, 모자까지. 출발 전 꼼꼼히 장비를 확인하는 동아리 방안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산에서 발이 젖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선배는 방수 등산화와 스패츠로 단단히 무장했다. “다 챙겼어?” 산행 때 마다 준비물 하나씩은 꼭 빠뜨리는 통에 선배들의 불안한 눈빛이 이쪽으로 몰린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겼습니다!”

‘투둑, 툭.’ 이제 막 출발했는데 자동차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럴 수가, 비라니…. 깨끗하고 하얀 설경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축축하고 질척해진 땅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에 가까워지는데도 비가 그칠 기미가 없어서 다들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때, 빗줄기가 별안간 눈송이로 바뀌었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도와주는 것 같았다.

안전한 겨울 산행을 위해서는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심은 눈을 타고
태기산 들머리인 양구두미재에 도착했다. 눈발이 점점 거세진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장착하고 우비를 입는다. 배낭 커버를 씌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목숨 같은 장비가 젖어선 안 된다. 머리 위로 선명하게 쏟아지는 눈이 첫눈은 아니지만, 야외에서 제대로 함박눈을 맞는 것은 올 들어 첫 번째다. 산에 올라가는 동안 마치 난생처음 눈을 만난 강아지들처럼 신이 났다. 하얀 세상 위로 노란색, 보라색, 연두색, 주황색 우비가 색색이 점을 찍는다. 어쩜 이리 알록달록한지!

별안간 한바탕 눈싸움이 벌어졌다. 누구 할것 없이 신나게 설산을 만끽했다.

숙영지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손을 마주 잡은 노부부와 행복한 연인들을 마주쳤다. 엄마, 아빠를 따라 겨울 산을 찾은 어린이 등산객들도 있다. 아이들은 깨끗한 눈밭 위에 누워 팔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눈천사 자국을 남기는 데 여념이 없다. 갑자기 차가운 눈 속에서 마음껏 뒹굴고 싶어졌다. 잠자고 있던 동심이 다시 살아나는 듯 괜스레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가족끼리 오셨어요?” 인상 좋아 보이는 한 부부가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여러 산행객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가족이냐는 물음은 처음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요! 대학 산악부에서 왔어요!” 우리가 한 가족처럼 비칠 만큼 끈끈해 보인 모양이다. 같이 산을 오르고 좁은 텐트 안에서 부대끼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우리를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었나 보다.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아쉽게 발길을 돌린다.
운 좋게 눈썰매를 빌려 타고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숙영지는 풍력발전기 아래 공터다. 지대가 평평하고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어서다. 특히 겨울에는 풍력발전기 날개에 얼음이 얼었다가 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위치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챙겨온 삽으로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텐트 그라운드시트를 깐다. 이렇게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날 텐트 사이트 구축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스피드. 선자령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텐트를 세웠는데,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다.

탁 트인 풍경을 자랑하는 태기산은 본디 일출 명소로 이름난 곳이다.

한 겨울밤의 꿈, 그리고 겨울왕국
이번 백패킹은 성신여자대학교 산악부의 종강산행이다. 이번 학기 마지막 산행을 기념하는 포도와 조각 케이크가 텐트 안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졌다. 선배가 특별히 챙겨온 캔맥주 냄새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 있는 노래가 공기 중에 기분 좋게 뒤섞인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풍력발전기 소리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처럼 맹렬한데, 이 작은 공간은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이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아온 서로를 위로하며 언제나 함께해주는 고마움에 한 잔, 더욱 즐거운 내년을 당부하며 또 한 잔 술잔을 기울인다.

짙은 눈보라로 하늘과 땅조차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보라가 더 심해졌다. 텐트 주변으로 눈이 한 뼘은 쌓여있고,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하늘과 땅조차도 구분이 안 된다. 아름다운 설화를 배경으로 한 태기산의 일출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텐트를 걷고 정상에 올라 태기산성비를 보고 오려던 계획도 아쉽지만 전면 취소다. 오늘따라 날씨가 마음 같지 않아 괜스레 서운하다.

‘뽀득뽀득’. 아무도 아직 지나간 적 없는 깨끗한 눈을 밟고 내려가는데, 누군가 눈 위로 풀썩 드러눕는다. 일순간 예고도 없이 눈싸움이 시작됐다. 물기가 없어 전혀 뭉쳐지지 않는 눈이지만, 공중에 흩뿌려지는 눈 알갱이로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신나게 놀 수 있다. 운 좋게 눈썰매도 빌려 타본다. 겨울 산이 주는 즐거움을 이렇게 만끽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누가 만들어 놓고 떠난 눈사람과 사진을 찍은 뒤, 가지마다 눈꽃이 만개한 나무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겨울왕국에서 한 컷.

하얀 눈이 뒤덮은 세상은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이전에도 겨울 산행은 해봤지만, 이렇게 눈보라 속을 뚫고 걷는 것은 처음이다. 칼바람이 조금 날카로웠지만, 이제야 비로소 진짜 겨울 산 맛을 본 것 같아 상쾌한 기분이다. 돌아오는 차 안, 서울에는 눈 내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지난 1박 2일이 마치 꿈결 같다. 이미 어린아이로 돌아간 우리는 태기산을 떠올리며 동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모두 하얀 나라였지, 어젯밤 꿈속에. 썰매를 탔죠. 눈싸움했죠.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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