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발걸음을 위로하는 호화로운 풍경
외로운 발걸음을 위로하는 호화로운 풍경
  • 글 사진 김동규(경희대 산악부 OB)
  • 승인 2016.06.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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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알프스 단독 종주 ③히로가와라~시로네고치 산장~기타다케~아이노다케~구마노타이라 산장

▲ 시라네고치 호수 근처에 산두릅이 지천이다.
기타다케(北岳, 3,193m)
야샤진(夜叉神峠) 고개로 내려와 온천에서 4일 간의 때를 말끔히 씻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히로가와라로 돌아와 보관함에 맡겨놓았던 짐을 찾았다. 주말이 끝나는 시점이라 텐트 사이트는 빈 곳이 많아 여유로웠다. 시간이 남아 어슬렁거리는데 한 청년이 산을 내려와서 텐트를 쳤다. 가까이 가서 보니, 비닐 같이 얇은 텐트다. 스틱을 사용해 양쪽 끝을 지지하는 형태다. 일본 알프스 횡단 산악 달리기(TJAR : Trance Japan Alps Race)에서 경주자들이 사용하는 초경량 텐트였다.

TJAR은 도야마 앞 바다에서 시즈오카 태평양까지 415km 거리를, 그것도 3,000m급 산들인 일본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남알프스를 일주일 안에 횡단하는 경주다. 음식은 산장 등에서 사먹을 수 있지만 잠자는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그 외 주변 도움을 받으면 실격이다. 엄격한 사전 심사로 선수를 선발하고 사전 훈련도 진행한다. 위험 요소가 많아 경기 때는 신발에 GPS를 부착해 실종 시를 대비할 정도다. 일본어를 어느 정도는 읽어야하고 회화도 필요해 외국인은 체력만 좋다고 참가할 수 없는 대회다.

그는 텐트를 치며 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몇 번 도전했지만 사전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제 친구는 지난여름 출전해 중도 포기했습니다. 주말마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보통 20여명 밖에 자격심사에 통과하지 못해 자신은 없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그가 활짝 웃으며 비상 빵과 소시지 두 개를 나눠주었다. 도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 기타다케가타노 산장에서 바라본 능선길.

▲ 기타다케에서 본 기타다케 산장과 아이노다케. 멀리 보이는 산은 시오미다케다.
어느새 일찍 잠드는 것이 습관이 돼 저녁 7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바닥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와 엎치락뒤치락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새벽 3시면 잠이 깨 아침 식사를 하고 4시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일찍 출발해 열심히 오른 보람이 느껴졌다. 시로네고치 산장(白根御池小屋)을 지나 능선에 오르자 예상대로 후지산이 보인다. 후지산은 서두르던 발걸음을 유유자적하게 바꾸어 놓았다. 하늘은 연한 파란 톤의 수채화처럼 비현실적으로 펼쳐져 절대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심연의 간격을 두고 오직 멀리서만 바라보게 하는 신비감을 자아냈다.

능선길 일대는 빨간 시오가마(ヒメヨツバシオガマ)가 잔디 같이 깔려 있고, 그 너머에 기타다케가 우뚝 솟아 있었다.

육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피라미드 형태의 산세는 끝을 약간 비틀어 뾰족한 창으로 마감했다. 완전 무장한 일본 사무라이 같은 기타다케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후지산을 지켜주는 맹주였다.

후지산은 외롭다. 흔한 영웅들이 거느리고 있는 호위 무사 하나 없다. 간신히 호에이산(寶永山, 2,693m)을 옆구리에 지니고 있지만 스스로 우뚝 솟아 모든 것이 시야 아래 있으니 외로울 따름이다. 하지만 남알프스 맹주가 항상 바라보고 있어 후지산은 더욱 아름답다. 후지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타다케를 올라야 하는 이유다.

▲ 능선에 자리잡은 기타다케가타노 산장. 멀리 보이는 산은 가이고마가다케다.

▲ 돌무더기가 아기자기하게 놓인 기타다케 정상.

기타다케 정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후지산과 커피 한잔을 대작했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나홀로 등산가들과 정상에서 인사와 소감도 나누었다. 저마다 아쉬움 속에서 기타다케 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점점 구름이 몰려와 활처럼 휜 기타다케와 아이노다케를 연결하는 능선 동쪽에 구름바다가 형성됐다. 태평양에서 몰려 온 구름은 고봉에 부딪히면 위로 올라가 휘어져 제자리로 되돌아갔고, 덕분에 주능선 서쪽은 구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 청천의 하늘을 연출하며 대비를 이루었다. 그 경계에 선 기타다케 산장의 빨간 지붕이 하얀 구름 위로 보일 듯 말 듯했다.

▲ 기타다케 산자 텐트 사이트. 정면으로 후지산이 보인다.

▲ 기타다케 산장의 아침. 저 멀리 후지산이 아련하다.

산장에 도착해 먼저 도착한 등산가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가 완성되자 한 사람이 생맥주를 사와 텐트 앞에 자리를 잡았고, 이내 다른 사람들도 맥주를 들고 자기 텐트 앞에 앉았다.

“실례지만 연세가 저보다 많은 것 같은데요?” “아이쿠 형님뻘이네요.” “그런데 이 쪽 형씨는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명함을 보니 ○○○ 회사에서 근무하시는군요?” “예. 거기 ○○○ 부장이 제 친구입니다.” “세상 참 좁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산을 내려가면 우리 도쿄에서 술 한 잔 나눕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들의 자리는 결코 좁아지지 않았고, 간간히 큰소리로 날씨 얘기나 나누는 정도였다. 나는 괜히 그들 앞을 오가며 실없이 말을 걸어 보기는 했으나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 시라네고치 산장 인근 헬기장에서 부상을 입은 한 등산객이 구조되고 있다.
아이노다케(間ノ岳, 3,189m)
아이노다케는 기타다케와 형제봉이라 할 만큼 높이나 규모가 별 차이 없다. 노토리다케(農鳥岳, 3,026m)와 묶어서 눈 덮인 흰 봉우리라는 뜻의 시라네산잔(白峰三山)이라고 부르는데, 세 봉우리는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것이 오히려 비극이다. 훌륭한 노토리다케가 일본 백명산에서 제외된 이유다. 그런데 아이노다케가 백명산에 들어간 것은 산 이남의 능선에서는 아이노다케만 보일 뿐 그 너머의 기타다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봉우리는 남알프스에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역할분담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노토리다케의 이름은 봄이 되면 정상 바로 밑의 잔설이 새의 형체로 보인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이는 농사철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주니 산 밑에 사는 농부들에게 친숙한 산이다. 이런 개성 넘치는 이름만으로 백명산에 끼지 못한 불명예를 충분히 보상받을 만하니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아이노다케는 일본 4위 봉우리이고 기타다케와 노토리다케 ‘사이(間)’라는 수동적인 이름이 아닌가?

주 등산로는 노토리다케를 거쳐 나라다로 내려가는 길이라 아이노다케를 지나서는 인적이 드물었다. 구마노타이라 산장에서도 아무도 없는 혼자였다. 텐트 사이트는 산장 건물과 떨어져 있었다. 텐트를 치고 점심을 먹은 후 개울물로 몸도 씻고 눅눅해진 침낭을 햇빛에 말렸다. 따스한 햇살이 적막감을 더했다. 산장 건물로 올라가니 주인은 긴 사다리를 타고 산장을 수리하고 있었다. 성수기가 지나 폐쇄를 며칠 앞두고 단속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홀로 독차지한 아이노다케 정상.

기웃 기웃 구경하는 사이 엄청난 짐을 진 산적 하나가 들어섰다. 이름이 미야다(宮田龍一, 46세)인 그는 도야마 앞 바다 오야시라즈(親知らず)를 출발해 이곳까지 24일 걸렸으며, 앞으로 6일 이내에 시즈오카 앞 바다 스루가만(駿河灣)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덩치가 일본인답지 않게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그가 내 옆에 텐트를 치더니 어느새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이 산장 주인이 소주 한 병을 들고 내 텐트를 두드렸다. “이 곳 ‘구마노타이라’란 이름은 ‘곰이 뛰어 노는 평원’이라는 뜻입니다만,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곰은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셔도 됩니다.”

내가 기타다케 고개에서 지난여름 곰이 목격되었다는 공고문을 보았다고 말하자, 음식물이 담긴 배낭은 텐트에서 멀리 나무에 매달아 놓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언젠가 사진에서 본 일본 곰은 덩치가 작았으나 무서운 얼굴이었다. 옆 텐트에서 오토바이 소리처럼 시끄럽던 미야다 씨의 코고는 소리가 경찰차의 삐야삐야 경고음처럼 들렸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자 날카로운 곰의 이빨도 어느덧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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