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릉(리지, RIDGE)을 따라 짧은 암벽을 오르거나 내려오고, 서로 로프를 연결한 채 능선을 걷는 등의 방식을 반복하며 산을 오르는 것을 ‘리지등반’이라 한다. 국내에서는 리지등반이 본격적인 암벽등반보다는 더 쉽고 덜 위험한 것으로 알고 기술과 장비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리지등반 만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리지등반 역시 본격적인 암벽등반의 기술과 장비가 모두 적용되며 오히려 위험요소가 더 많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리지등반 역시 본격적인 암벽등반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 40m 슬랩을 오르는 원기정 씨. 빤빤한 슬랩이지만 기본적인 암벽등반 요령을 익힌 사람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
암릉을 따라 오르면서 주변의 경관을 조망하는 즐거움이 바로 리지등반의 매력이다. 또한 산에서 만나는 다양한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이 등산의 즐거움이라면 리지등반은 그 즐거움을 한층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적절한 기술과 장비 그리고 든든한 동료가 있다면 리지등반은 걷는 등산에서는 다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즐거움을 안겨준다.
▲ 숨은벽리지에서 가장 까다로운 구간인 콧등바위 슬랩 구간을 오르는 한상섭 씨. 크랙을 따라 올라도 된다.
놀랍고 신나는 ‘신세계’ ▲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빨래판바위 앞에 선 취재팀. 뒤로 40m 슬랩과 콧등바위가 보인다. 맨 위 꼭지점이 숨은벽리지의 종착지인 768m봉.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836.5m)와 매끈한 화강암 첨봉 인수봉(810.5m)에서 각각 북쪽으로 뻗어 내린 원효봉능선과 우이능선 사이에는 꽤나 실팍한 암릉 한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양쪽 능선에 숨은 듯 가려있지만 만경대리지, 원효봉리지와 함께 북한산 3대 리지등반 코스로 그 명성이 자자한 숨은벽리지다.
산행 들머리는 밤골안내센터 국사당 앞. 일행은 정승권등산학교,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등 국내 유수의 등산학교를 수료하고 유럽 알프스 마터호른(4,478m) 북벽을 오른 바 있는 베테랑 등반가 한상섭 씨와 작년 코오롱등산학교를 수료하고 지금 한창 암벽등반에 맛을 들여 매주 등반에 나서고 있는 원기정 씨. 두 사람은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같은 동문 사이. 3년 전 남한산성 범굴암 암장에서 우연히 만나 범상치 않은 인연임을 서로 알아채고는 단짝이 되어 틈만 나면 함께 등반에 나서고 있다.
▲ ‘남조선 최고 귀엽상’ 원기정 씨의 등반모습. 작년 등산학교를 졸업한 후 암벽등반의 재미에 푹 빠졌다. |
밤골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는 본격적인 암릉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1시간 정도 순탄하게 이어진다. 작지만 제법 위용 있는 모습의 폭포를 두 개 정도 지나면 왼쪽으로 암릉이 시작되는데 바로 해골바위다. 해골바위 앞 키 높이의 바위 턱에 볼트가 하나 박혀있는데 이곳부터 등반이 시작된다.
우리는 일상처럼 안전벨트를 차고 헬멧을 쓰고 로프를 묶고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암릉에 서자마자 대번에 주변 풍광이 웅장해졌다. 맞은편 원효봉능선의 기암들이 백운대를 향해 도열했고, 숲은 아침 미명에 눈부셨다. 건너편 인수봉 뒤로 이어지는 우이능선과 상장능선은 아슴아슴 아득하게 이어졌다. 우리가 가야 할 숨은벽암릉은 좌우로 짙은 숲을 거느린 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산정을 향해 치달아 있었다.
▲ 숨은벽리지를 대표하는 40m 슬랩 구간. |
로프를 사려 목에 두른 채 잡목 숲을 지나고 고정로프가 있는 암릉을 걷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고된 일이기도 했다. 원기정 씨는 고래바위까지 로프를 사려 목에 걸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다. 캠핑과 백패킹에 열중했던 그에게 새롭게 펼쳐진 암벽등반의 세계는 놀랍고 신나는 ‘신세계’였다. 자칭 ‘남조선 최고 귀엽상’이라는 그의 얼굴에는 내내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큰 고래, 작은 고래가 있는 고래바위 오른쪽 벽면에는 얼마 전에 부부클라이머 최석문, 이명희 씨가 개척한 고난도 크랙등반 루트 ‘고래의 꿈(5.12b/c)’이 있었다. 25m가량 호를 그리며 손가락이 겨우 들어갈 만한 가느다란 틈으로 이어진 크랙에는 그들의 치열한 등반을 증명하는 초크 자국이 선명했다.
고래바위를 지나 바위 사이를 내려서면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40m 슬랩이 나타난다. ‘빨래판바위’라고도 불리는 이 슬랩은 4개의 볼트가 설치되어 있다. 경사 45도 정도의 빤질빤질한 슬랩이지만 기본적인 등반기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종료지점에는 쌍볼트와 체인이 설치되어 있고, CCTV 카메라가 있는 철제 박스가 있다.
▲ 고래바위를 지나 숨은벽리지 암릉 위를 걷는 취재팀. 멀리 뒤쪽으로 노고산과 고양시 일대가 보인다. |
빨래판바위를 지나면 20m 정도의 슬랩과 크랙이 있는 ‘콧등바위’다. 가운데 오목한 슬랩을 오르거나 오른쪽 크랙을 이용해 오를 수 있다. 콧등바위 위 볼트가 한 개 설치되어 있는 슬랩은 숨은벽리지에서 가장 까다로운 구간이다. 신발의 마찰력만을 이용해야 하는 구간이라서 초보자의 경우 추락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왼쪽 바위틈으로 돌아 오른다.
해골바위를 제외하고는 빨래판바위나 고래바위, 콧등바위 등의 이름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제각각 보이는 대로 지어 붙인 이름이다. 누군가는 물개바위나 바나나바위, 오리바위로 부르기도 한다.
이후로도 슬랩과 크랙을 연달아 오르고, 암벽의 모퉁이를 돌고, 2m 정도 되는 바위 턱을 하강하고, 좁다란 바위 틈바구니를 빠져나와 잡목지대를 걸어야 했다. 손으로 잡을 만한 곳에 서 있는 소나무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에 닳아 반질거렸다.
▲ 밤골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작은 폭포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본격적인 암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걸어서 오르느냐, 기어서 오르느냐 ▲ 콧등바위 아래 20m 슬랩 구간을 등반하는 한상섭 씨. 내려다 보는 고도감이 아찔한 구간이다.
뒤를 돌아보면 어느덧 우리가 오른 숨은벽리지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크고 작은 암봉이 겹겹이 이어지고, 좌우로는 효자리계곡과 밤골계곡의 숲이 짙었다. 건너편 인수리지를 등반하는 사람들과 염초봉에서 백운대로 이어지는 파랑새리지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 768m봉에서 숨은벽리지는 마무리된다. 널찍한 바위 봉우리는 등산객들의 점심식사 자리로도 제격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장비를 정리하고 오른쪽 구멍바위를 지나 호랑이굴 크랙 밑에서 쉬었다. 일행들이 이곳에서 쉬는 동안 원기정 씨와 걸어서 백운대를 다녀왔다. 위문을 지나 백운대로 오르는 구간에는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아 정체가 되고 있었다. 백운대 정상에는 늘 그렇듯이 태극기가 휘날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고, 백운대에서 빤히 보이는 인수봉 정상에서는 일찍 등반을 마친 이들이 하강하고 있었다.
암벽등반에 입문한 많은 이들의 계기가 바로 백운대를 오르다가 바라본 인수봉 때문이다. 걸어서는 올라갈 수 없는 인수봉 정상에 서고자 끝내 암벽등반에 입문했다는 것. 인파에 밀려 백운대를 오르고 내리니 그들의 암벽등반 입문 계기에 과연 고개가 끄덕여진다. 걸어서 오른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과 기어서 오른 정상에서의 풍경은 분명 다른 것이다. 안전벨트를 차고 헬멧을 쓴 채 로프를 묶고 기어서 오른 산정에서 동료와 함께 악수를 나누고 말없이 발아래를 굽어보는 것. 그것으로도 바위를 오르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산을 내려오다가 올라갈 때 보았던 작은 폭포 앞에서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목청껏 부르는 이가 있었다. 그이의 소리도 아마 혼신을 다해 폭포를 거슬러 기어오르고 있었을 테다.
▲ 물고기처럼 생긴 바위를 오른다. 서로를 연결한 로프는 믿음과 우정을 잇는다. 기어올라 맞이하는 하늘빛은 걸어올라 바라보는 하늘빛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
▲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에 있는 숨은벽리지의 종착지인 768m봉 정상. |
▲ 마지막 암릉 구간을 오르는 원기정 씨. 뒤로 여태껏 오른 숨은벽리지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멀리 우이능선에서 이어지는 상장능선과 다섯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늘어선 오봉리지가 보인다. |
INFORMATION / 숨은벽리지(초급) 들머리 경기도 고양시 효자동 밤골입구나 사기막골입구를 들머리로 삼는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704번, 34번 버스를 타고 효자2동에서 내려 국사당 입구로 들어선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국사당 앞에 차량 10여대를 주차할 수 있다. 등반시간 등반장비 하산코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