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산을 오르다
처음 산을 오르다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6.05.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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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열심히 페달을 굴리다 보니 저 멀리 큰 산이 보였다. 콜롬비아의 대도시 메데진을 가려면 높은 산맥을 지나쳐야 한다. 저녁에는 주민에게 허락받고 앞마당에 텐트를 쳤다. 어쩜 이렇게 모든 사람이 허락해주는지 신기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자전거 여행자와 배낭 여행자도 멕시코와 콜롬비아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곳은 정이 넘치는 나라다. 특히, 며칠 동안 지나쳐온 풍경은 상상 이상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내일부터는 산을 넘어야 한다. 첫 자전거 산행기, 잘해낼 수 있을까?

자전거 첫 산행기
새벽 3시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면 그칠 줄 알았는데, 멈출 기색이 없었다. 아주머니께서 타주신 따뜻한 코코아를 먹으며 오전 7시까지 기다려 봤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다. 비를 홀딱 맞으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경사가 너무 높아 1시간 동안 2km를 채 못 달렸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와 경사 때문에 힘들었다. 아침도 먹을 겸 쉬기로 했다. 비옷은 이미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비에 홀딱 젖은 몸으로 자전거를 밀고 가느라 너무 힘들었다. 어느 순간 뒤 돌아보니 안개 속에 감춰진 산이 보였다.

▲ 현지인 집 앞마당에 텐트를 쳤는데, 새벽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정오쯤 되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 겨우 첫 마을에 도착했다. 비도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힘들었다. 이미 비에 젖어 너무 추웠다. 무릎도 아파왔다. 제주도에 살 때 계절마다 한라산을 등반했지만, 자전거로 산을 오르는 건 처음이다.

멕시코시티에 갈 때 자전거로 해발 2,600m를 넘은 적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오늘은 다르다. 오전 7시부터 정오까지 총 이동 거리 10km를 넘지 못했다. 물론 의미 없는 고생은 아니었다. 풍경이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자전거 산행에서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경을 접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큼은 구름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 8,000km 기념. 비에 홀딱 젖었다.

▲ 자전거로 지나가기엔 너무 힘들지만, 풍경만큼은 멋졌던 곳.

현지인에게 허락을 받고 집 앞에 텐트를 쳤다. 역시 환상의 장소였다. 내 생에 최고의 캠핑장이다. 텐트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절경이 펼쳐진다. 친절한 집주인의 배려 덕분에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밤에는 강아지가 나를 안전하게 지켰다. 다음날 현지인으로부터 역시나 따뜻한 차 한 잔 대접받았다. 콜롬비아에 텐트 치고 지내면서 단 한 사람에게도 빠짐없이 항상 아침에 차를 대접받았다. 아무래도 차를 대접하는 건 콜롬비아의 문화인 거 같다.

텐트 안에서 물건들을 확인해봤다. 비닐봉지에 겹겹이 씌웠는데도 비가 스며들었다. 하나하나 꺼내 말리는데 저절로 속이 상했다. 자전거값의 절반에 가까운 돈을 방수 가방 사는데 들였지만, 방수는 하나도 되질 않았다. 빗속에서 자전거를 타며 가장 큰 문제는 방수다. 방수의 신이 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방수의 신이 될 수 있을까?

▲ 평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자전거 타는 게 불가능해서 계속 자전거를 밀었던 곳.

잊지 못할 우유 맛

다음 날 아침은 어제보다 더한 신기록을 경신했다. 2시간 동안 고작 1km를 이동했다. 뭐 이런 황당한 기록이 다 있나. 경사가 어째 어제보다 더 심한 거 같다. 무릎이 아파서 자전거를 계속 끌고 갔다. 한 발자국 이동할 때마다 쉬었다. 아침에 지나쳐온 길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막상 보니 평지 같아 보였다. 실제로는 엄청나게 경사길인데, 억울했다.

어제부터 구멍가게며 집들이 종종 나왔는데, 오늘은 아무리 가도 가도 슈퍼가 없다. 사실 내 속도가 느려서 오래 걸렸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비상식량을 깜박했다. 아침에 마신 차가 전부였다. 빈속으로 자전거를 몇 시간 동안 끌고 간 내가 참 미련스럽고 불쌍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견한 슈퍼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 내 인생 최고의 우유를 마시다.

▲ 현지인 앞마당에 텐트를 쳤다.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지점부터 내리막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 내리막은 아니었다. 오르막 내리막이 다시 반복되었다. 많은 자전거 여행자들이 오르막 내리막 언덕보다 차라리 순수 오르막만 있는 게 더 낫다고 한다. 나도 동감하는 부분이다. 내리막에는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러다 오르막이 나타나면 몇 배의 힘을 더 줘야 한다.

오후 5시가 넘었는데 마을이 안 보였다. 어제에 비해 집들도 거의 없다. 긴장하며 서두르려는데 무릎 때문에 자전거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젖소에게 우유를 짜던 청년에게 텐트 칠 허락을 구했다. 청년은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늦었던지라 그냥 가려고 했는데, 30분이면 온다며 조금 기다리라 했다. ‘그래. 나중에 안 된다고 하면 불쌍한 연기라도 해야겠다.’ 다행히 청년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줬다.

▲ 레닌 집에서 먹은 현지 음식.

▲ 기타를 배우는 레닌의 딸.

이 동네는 우유 생산이 한창이었다. 내가 우유 짜는 걸 신기하게 바라보자 즉석에서 짜낸 우유 한 컵을 건네주었다. 바로 짜 먹는 우유는 비리고 맛없다는 얘길 들었다. 사실 원래부터도 그냥 우유는 비려서 잘 못 먹는다. 망설였지만 성의가 있으니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다! 태어나 먹은 우유 중 최고의 맛이다. 내가 맛있게 먹자 쿠키와 함께 우유를 한 잔 더 짜주었다. 정말 이렇게 맛있는 우유는 처음이다. 저녁에는 식사에 초대받아서 현지 가족과 함께 수다도 떨었다.

새벽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이번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가방에 씌웠다. 철저히 준비하다 보니 출발이 늦어졌다. 역시나 풍경이 멋졌다. 주변에 젖소도 많이 보였다. 어제 먹었던 우유 맛을 잊지 못해서 우유를 짜내는 현지인을 멀리 지켜보곤 했다.

▲ 꿈에 그리던 기타를 사다.

영혼의 소리 듣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3일을 달렸다. 총 이동 거리는 오늘까지 52km. 노력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오늘은 내리막이 많아서 좋았다. 해 질 무렵 길에서 오토바이 탄 두 사람이 말을 걸어왔고, 그 두 사람이 친구를 나에게 소개해줘 잠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집주인 레닌과 그의 아내는 의사였다. 그들은 산 중턱에 있는 집에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공기가 맑고 풍경이 고요했다. 첫째 딸은 일주일에 한 번 바이올린 강습을 받는다. 선생님은 기타로 강습하는데, 기타 소리가 아름다워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결국, 그동안 미뤄왔던 꿈을 실행하기로 했다. 바로 기타 배우기!

▲ 레닌의 아버지.

▲ 레닌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커피 농장에서.

메데진 시내를 가서 결국 기타 하나를 장만했다. 자전거 세계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 건 2010년 11월. 1년도 안 되어서 꿈을 실행했다. 하지만 기타 치는 꿈은 10년 전부터 계속 꿔왔다. 마음이 참 설렜다. 생각해보면 자전거를 사던 날보다 더욱 설렜다. 10년 전의 꿈, 평생 꿈으로만 남을 수 있었던 걸, 시작해보려 한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주제에, 그것도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내가, 그렇게 기타를 샀다. 도대체 그 무거운 걸 어떻게 싣고 다니려고? 여행기 쓸 시간도 없어서 매번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언제 연습하려고? 모르겠다. 그냥 내 영혼이 원하는 소리가, 내 영혼의 진정한 소리가 크게 들려서 샀다.

주말 오후 늦게 레닌과 함께 레닌의 아버지가 사는 곳에 갔다. 오토바이로 1시간 넘게 달렸다. 마을에 도착해보니 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 체험시켜주려고 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말을 타고 한 시간 더 산속 깊이 들어가야 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산속 깊이 사는 레닌의 아버지 댁에서 이틀간 머무르며 직접 볶은 커피를 마시고 현지 음식도 먹으며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레닌은 저번 주에도 아버지 댁에 왔었다. 이번 주에도 또 왔고,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찾아간다고 한다.

강물도 넘고 진흙도 건너야 하는 험한 곳에 자주 간다는 게 신기했다. 차가 막혀서 1년에 한두 번 부모님 뵈러 간다는 말, 레닌은 절대 이해 못 할 거다. 영혼의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주변 환경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험한 산을 매번 찾아오는 레닌. 레닌에게는 산보다 아버지 얼굴이 먼저 보였나 보다.

▲ 레닌의 아버지 댁에 가는 길.

메데진으로 가는 날 아침, 레닌이 의사인 덕분에 무료로 황열병 주사를 맞았다. 볼리비아로 가려면 황열병 주사가 필수다. 그동안 구급약을 잃어버리고 여행자 보험도 없이 다녔다. 레닌 덕분에 주사 한 방 맞으니 갑자기 준비성 철저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자전거 여행자의 꿈,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으로 가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힘들 때마다 레닌에게 배운 것을 떠올려야겠다. 영혼의 진심을 담는다면 그곳엔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을 살려서 하루하루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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