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을 따라 오르는 감동의 걸음
능선을 따라 오르는 감동의 걸음
  • 글 사진 김동규(경희대 산악부 OB)
  • 승인 2016.05.2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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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알프스 단독 종주 ②

등산로 초입의 오타이라(大平) 산장에서 멀리 북알프스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수확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여름이면 찾았던 북알프스의 모습을 멀리 남쪽에서 한눈에 바라보게 된 것이다.

▲ 호오산 오르는 길. 뒤편의 산이 센조가다케이다.

그때와 지금의 내가 교차하다

센조가다케 (仙丈ヶ岳, 3,033m)
뾰족 솟은 산봉우리는 야리가다케(3,180m)가 분명했고, 그 앞으론 북알프스 제1봉인 오쿠호다카다케(3,190m)가 선명했다. 두 봉우리를 잇는 능선에는 내가 세계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트레킹 코스라고 단언하던 다이기레토가 도끼로 찍은 듯 V자로 푹 파여 있었다.

지난여름 나는 저곳에서 낙석의 위험을 무릅쓰고 암벽을 기어 오르내리며 한발 한발 전진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남알프스를 바라보며 오늘을 동경했다. 이제 반대 방향에서 북알프스를 바라본다. 다이기레토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는 개미같이 조그만 나, 이곳에서 전체를 관조하는 나. 두 곳의 내가 오버랩 되자 또 다른 내가 어디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호오산 능선에 올라서기 직전에 화산석 무더기가 나타난다.

▲ 푸석푸석한 화강암이 자유자재로 형태를 변형한다.

너도밤나무가 우세한 숲 속의 길은 고즈넉했다. 모두들 기타자와 고개에서 직접 능선 길을 택했는지 유유자적 걷는 중에 아줌마 둘만 마주쳤다. 계곡을 따라가는 오솔길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계곡의 깊은 틈 사이에는 지난여름의 더위에도 만년설 덩어리가 살아남아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계곡을 빠져나오니 깊은 수림대가 이어졌다. 이윽고 나무들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바짝 엎드리더니 그 위로 센조가다케의 둥글게 파인 칼데라가 내 쪽으로 기울여 속살을 보여 주었다.

칼데라에서는 계곡물이 졸졸졸 흘러나오고 그 옆으로 센조가 산장이 고개를 내밀며 반겨주었다. 센조가 산장 마당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북쪽의 중앙알프스 산군은 히말라야와 다름없었다. 생맥주 한 잔을 마시며 높은 봉우리들과 그 위를 감싸는 하얀 구름 띠를 내려다보자 천상에 올라온 느낌이었다.

센조가 정상에 올랐으나 후지산은 보이지 않았다. 산의 날씨가 항상 그러하듯 오후가 되니 벌써 태평양 쪽에서 구름이 몰려와 있었다.

후지산이 언제까지 나를 피할 수는 없을 터이고 오늘은 일본 제2의 봉우리 기타다케만으로도 충분했다. 동쪽으로 센시오(仙?) 능선이 아래를 향하여 흐르다가 반동을 받아서 아이노다케(間の岳, 3,189m)를 만들고 다시 왼쪽 아래로 휘어지더니 탄력을 받아 튀어 오른 것이 기타다케였다.

북쪽으로 가이고마가다케, 기타다케 북쪽으로 호오산, 남쪽으로는 아이노다케, 노토리다케, 시오미다케와 그 너머로 내가 걷게 될 고봉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이를테면 기타다케는 남알프스 고봉들 속에서 호령하듯 서 있는 왕이었다. 그렇다면 한발 물러서서 이들을 바라보는 센조가다케는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능선상에 일렬로 붙어 있는 저 봉우리들은 서로를 잘 볼 수 없겠지만 센조가다케는 어떤 봉우리에게든지 멀리서 그윽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기타다케가 무섭고 위엄 넘치는 아버지라면, 센조가다케는 항상 바라보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저들의 어머니임이 틀림없었다.

▲ 지조다케 정상. 오벨리스크라고 부른다.
센조가다케 칼데라 끝단을 따라 걷는 길은 새로웠다. 동으로는 기타다케를 바라보고 서로는 거대한 칼데라가 깊게 패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센조가 정상에서는 세 개의 능선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두 개의 칼데라가 더 형성되어 있었다.

“센조가다케는 칼데라를 세 개나 지니고 있으며 다른 산에 비해 규모가 큽니다. 센조(千丈)란 칼데라의 크기를 다다미 천장의 크기(千?)라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도 하며, 키가 일만 척(千丈、一万尺)이란 의미라고도 합니다.” 어젯밤 다케모토(竹元直亮)씨가 들려준 말을 확인하게 해주는 풍경이었다.

눈잣나무와 키 작은 빨간 향목(香木)이 감싼 칼데라 밑으로 다시 센조가 산장이 눈에 들어왔다. ‘환상적일 일몰·일출 장소로 유명한 이곳에서 언젠가 멋진 하룻밤을 보내는 날이 있겠지’ 스스로 오겠다는 다짐을 되뇌었다. 기타자와 고개로 향하는 고센조(小仙丈) 능선으로 들어서 하산을 시작했다.

아! 감격의 후지산
호오산(鳳凰山)
일본의 산 이름은 봉우리 개념이다. 우리나라처럼 지역을 포괄하는 산이 있고 봉우리는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크든 작든 저마다 동등한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지역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연합해야 한다. 호오삼산은 지조다케(地?岳, 2,764m), 간논다케(?音岳, 2,840m), 그리고 야쿠시다케(藥師岳, 2,780m)의 연합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세 봉우리의 간격이 좁아서 호오산(鳳凰山)으로 불린다.

당초 하야오네(早川尾根) 능선을 따라 호오산에 들어서고자 하였으나 간밤에 다케모토씨와의 대화 중 능선 중간이 산사태로 길이 끊겼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어차피 호오산장까지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기에 주저 없이 히로가와라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 바위틈에도 불상이 모셔져 있다.

▲ 지조다케의 불상들. 사람들이 하나씩 매고 와서 모셔놓았다.

히로가와라에서 호오고개를 오르는 초반은 급경사였다. 철 사다리도 연달아 나타났다. 도중 식수가 없어 많은 물을 챙겼더니 배낭의 무게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도 도중 올라가는 몇 팀을 만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적적함을 면할 수 있었다. 드디어 화산 특유의 돌무더기 길이 나타나고 탁 트인 시야의 등 뒤에서 어제 올랐던 센조가다케가 응원하기 시작했다.

호오고개에 이르러 한숨 돌리며 점심을 먹고 편안한 능선 길을 걸었다. 다카네(高嶺)부터는 이 산의 화강암이 그 특색을 나타내어 푸석푸석한 하얀 모래를 드러냈다. 아카누케자와노아타마(垢拔け?ノ頭, 2,750m)는 ‘때까지 말끔히 벗긴 대머리’라는 이름대로 풀 한 포기 없는 모래 언덕이었다. 북한산 사모바위 일대를 연상시켰다.

▲ 간논다케에 턱걸이하자 나타난 후지산.

▲ 호오산장 내려가는 길의 사스레나무.

능선 길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지조다케가 나타났다. 엄지손가락을 우뚝 치켜세운 듯한 형상은 여기 사람들이 흔히 표현하는 대로 오벨리스크였다. 그 힘차게 뻗은 모습은 의심할 바 없이 지옥에 갈 중생도 구제해줄 능력의 보유자였다. 이와 함께 모래 언덕 위에 안치된 많은 불상은 일본인들이 산에 대한 소망, 그 간절한 기도를 이보다 잘 나타낼 수는 없었다. 같은 화강암이라도 습기가 많은 탓인지 일본의 것은 연약하다. 그 덕분에 자유자재의 기암기석을 만들어 냈다. 조그만 불상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하고 있는 바위와 조화를 이루어 부처님을 충분히 감동시킬만한 설치 예술로 바뀌어 있었다.

호오산장은 야생화들로 넘쳐났다. 버들란(ヤナギラン)의 분홍색 이파리가 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벌써 꽃에 취했는지 사케(일본 술)에 취했는지 마당에는 많은 사람으로 웅성거렸다.

새벽 3시가 되자 텐트 여기저기서 소란이 시작했다. 간밤 대화를 통해 호오산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후지산을 바라보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내게도 남알프스는 기타다케가 일본 제2의 봉우리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만 후지산과 대면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기타다케보다 훨씬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식사를 하고 텐트를 걷은 뒤 새벽 4시에 출발했다. 깜깜한 숲길에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능선에 올라서자 이내 동이 텄다. 서쪽으로 센조가다케가 불에 달궈진 쇠뭉치처럼 빨갛게 상기돼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깐 파르스름한 하늘이 서서히 능선을 타고 넘었다.

조금 더 오르막을 따르니 저만치 앞서 오른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그도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간논다케 정상에 이르자 후지산도 보조를 맞추어 살짝 머리를 내밀어 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조우했다.

구름 위에 올라탄 이등변 사각형. 후지산을 이루는 선은 군더더기 없는 직선이었다. 산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도형이었다. 그것도 입체도가 아닌 평면의 도화지 위에 그려진 선이었다.

▲ 야쿠시다케 너머의 후지산.

간노다케에서 보이는 것이 어찌 후지산 뿐이겠는가? 건너편 야쓰가다케가 있고 뒤돌아보면 기타다케, 센조가다케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나는 오직 후지산만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감격스러울까? 왜 이리 가슴이 후련할까? 원통형 아니 이등변 삼각형의 말쑥한 후지산은 하얀 구름위에서 짙은 회색빛으로 떠있는 것뿐인데.

▲ 간논다케에서 본 지조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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