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때문이었다. 어떤 것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슬란드로 떠난 건. 11월에서 3월이 가장 좋은 시기라니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오로라를 기다리는 시간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얗게 빛나는 눈 덮인 언덕 위로 초록빛깔 오로라가 뜨는 모습을 본 후, 그 시간을 오롯이 바친 내 스스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 어떤 것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슬란드로 떠난 건 오직 오로라 때문이었다.
오로라, 자연이 만든 드라마
세 번의 시도 끝에 오로라 투어를 떠났다. 첫날은 구름이 많아서 실패, 다음날은 눈이 와서 출발조차 못했다. 인내심 강한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오로라의 도도함이 이런 것일까. 아이슬란드의 날씨는 흐릴 때가 많고, 바람이 강하게 불거나 추운 날에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나는 운 좋게도 열흘 안에 두 번의 오로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오로라 레벨은 3~4부터다. 구름이 없고 레벨이 높을수록 더 선명한 오로라를 만날 수 있는데 오로라를 처음 본 날은 레벨 4였다. 느낌이 좋았다. 매일 밤 9시에 가이드가 탄 차량이 숙소로 픽업 왔다. (자정쯤 다시 숙소로 데려다 준다.) 출발하는 차량도 떠나는 인원도 많았다. ‘오늘은 기필코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차에 올랐다.
차가 멈춰 섰다. 사람들은 바삐 내려 카메라 위치를 잡았다. 너무 추워서 잠시 차로 몸을 피해 손을 녹이고 있는데 주변에서 환호가 터지기 시작했다. 예고도 없이 오로라가 나타난 것이다. 후다닥 내려 하늘위로 고개를 젖혔다. 그 많던 별빛이 사라지고 검푸른 하늘이 거대한 녹색 빛으로 가득 찼다.
“세상에!!”
차츰 초록색 레이저빔 같은 무리가 선명하게 나타나더니 금세 또 사라졌다. 너무 빨리 사라져서 오로라가 맞나 싶었던 순간 고개를 돌려 반대쪽 하늘을 올려다보니 더 강한 빛의 오로라가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가 숨죽여 오로라에 집중했다. 그 모습 또한 색다른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오로라를 멋지게 찍어놓은 사진은 수도 없이 봤었기에 큰 욕심은 없었다. 단지 오로라가 펼쳐진 하늘아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 오로라는 절대자가 하늘에 한 땀씩 수놓은 듯한 하늘 위의 예술작품이었다. |
눈으로 직접 보는 것 보다 사진에 더 강하게 담겼다. 기대했던 것 보다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가세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사진 실력이 부족한 터라 오로라와 함께 담긴 내 모습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고 DSLR을 챙기지 않은 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일단 기록을 남겨두는 일은 성공.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찍어놓은 사진을 보는데, 몹쓸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많은 칭찬을 퍼부었다. 심지어 함께 공유해주길 원했다. 누군가가 내 사진을 좋아해주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주는 놀라운 경험에 감사했다.
또 다시 오로라를 만난 것은 2박3일 간의 남부 해안 투어 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로라와 마주했다. 저녁을 먹고 각자의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가이드 앨리스가 방문을 두드리며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가보니 밤하늘에 오로라가 색을 바꿔가며 빠르게 나풀거린다. 그 순간 자연이 펼치는 가장 신비로운 쇼를 감상했다. 그동안 오로라 투어는 왜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이전 보다 훨씬 선명하고 많은 오로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 내 머리위에 오로라가 있다는 걸 꿈에서나 생각해 봤을까.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아이슬란드의 상징과도 같은 블루라군은 계속되는 투어로 지친 나에게 최적의 휴식 장소였다. 세계 5대 온천중 하나인 이곳에서 뽀얀 우윳빛 온천수에 몸을 담구고 실리카 머드팩을 하며 한가롭게 몸을 달랠 수 있었다. 실리카는 특이성분을 가진 갯벌 진흙인데 피부 디톡스와 아토피에 효과가 좋다고 하여 따로 판매하기도 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각자 구입한 패키지 가격에 맞는 색깔의 팔찌로 교환해준다. 라커 열쇠 겸 온천을 마치고 정산하는데 쓰이는 팔찌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가운이 포함된 패키지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 주변은 화산암과 검은색 모래사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연경관을 바라보니 마음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찬 공기를 맞으면서 나도 얼굴에 실리카를 발랐다. 좋다고 하니 괜히 또 피부에서 빛이 나는 듯하다. 온천을 즐기면서 생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선하긴 했다. 하지만 나는 슬러시를 시켰다.(웃음)
물속을 걷다보니 포인트에 따라 라군 속 물 온도가 달랐다. 조금 더 뜨거운 부분도 있고, 미지근하기도 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본인에게 알맞은 온도의 구역에 가서 즐기면 그만이다.
▲ 블루라군은 세계 5대 온천중 하나로 뽀얀 우윳빛 온천수에서 실리카 머드팩을 할 수 있다. |
화창하던 날씨도 잠시, 안개 낀 상태가 오래 지속 됐다. 온천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600m 정도만 걸어가면 도착하는 가까운 곳이었다. 블루라군과 연계되어있는 유명한 곳으로 대부분 커플들이 찾는다고 한다. 혼자인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투숙객에게만 주어지는 프라이빗 풀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무제한으로 블루라군과 같은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물에 둥둥 떠다닐 수 있도록 마련되어있는 튜브도 탐나는 아이템이었다. 낭만은 덜 했지만 캄캄한 밤 북적거리지 않는 여유로움이 참으로 좋았다.
라군 주변에는 이 숙소 외에 아무것도 없다. 볼 것이라곤 눈 덮인 산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게는 큰 휴식이 됐다. 흔들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는 정말 큰 위로가 됐다. 누군가와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다.
▲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차갑지만 한편으로 온기가 스며있다.
마음이 머무는 곳
여행지에서도 하루를 마무리하며 돌아갈 곳이 필요하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서 총 다섯 개의 숙소를 이용했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보통은 경비에서 숙박비를 가장 많이 아꼈다.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먹자는 생각에서 그랬다. 게스트하우스와 민박은 물론,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배낭여행을 하던 학생 때는 그런 게 자랑이고, 긍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편하고 좋은 곳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내 몸을 보다 편한 공간에 누이고 싶은 본능도 있겠지만,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다가 오는지에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도심의 비싸고 화려한 호텔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투어에 포함된 숙소 빼고는 이동거리와 가격, 디자인, 조식 여부 등을 따져가며 나름 꼼꼼하게 따져 예약을 했다.
▲ 얼굴에 실리카를 바르고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여독을 풀었다. |
대부분의 숙소는 만족스러웠고, 혼자 누리고 간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곳도 있었다. 내일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이곳에서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기대됐다. 이 마음은 하루하루의 여정이 허투루 보낼 수 없는 특별한 시간임을 매일 상기시켜주었다. 아름다운 곳에서 꾸는 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했다. 아침에 화장실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투어를 떠나기 전 하루 묵었던 숙소에서 사건이 터졌다. 기분 좋은 아침, 씻기 위해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화장실 바닥에 물이 가득했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천장 위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간밤에 많은 눈이 왔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어디서 물이 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급히 나가야 했기에 씻고 체크아웃을 하러 내려갔다.
▲ 이번 여정은 좋은 숙소를 골라서 묵었다.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
그냥 가버릴까 했지만, 돈을 지불한 손님 입장에서 말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화장실 천장에서 많은 물이 샜고,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는 문장을 연습하며 다가갔다. 카드키를 내밀며 입을 여는 순간, 이른 아침부터 친절하게 웃는 직원의 얼굴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데 난 왜 따지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이 머무를 수 있게 해준 보답이었을까. 결국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간밤에 이런 일이 있긴 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고 말한 뒤, 미소를 남기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 블루라군은 계속되는 투어로 지친 나에게 최적의 휴식 장소였다.
▲ 블루라군 주변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우여곡절 끝의 해피엔딩
굿바이 아이슬란드. 어색하게 나를 맞아주던 그 공항에 다시 도착했다. 이른 새벽인데도 공항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서둘러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서려는데 직원들은 보이지 않고, 기계가 나란히 서있다. 눈치껏 살피니 다들 셀프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나라고 못할쏘냐. 짧은 줄을 찾아 뒤에 섰다. 설명이 잘 돼있는 그림을 따라 여권정보를 입력하고 수화물 스티커도 부착했다. 짐 무게를 재러 다른 기계로 이동하는 중에 2명의 직원이 창구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고민이 시작됐다. 맘 편하게 직원을 통해 짐을 보낼 것인가. 셀프 진행을 계속 할 것인가. 창구로 길게 늘어진 줄을 보고는 처음 계획대로 기계로 향했다. 짐 무게를 재고 차근차근 설명에 따라 짐을 보내고 났더니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후련했다.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한국까지 무사히 도착해주기를 바랐다. 비행기에 올라 긴 비행을 했다. 해외에 나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수화물을 기다리는데 아이슬란드에서의 불안함이 현실로 다가왔다.
▲ 난 여행을 통해 내 인생을 들여다보곤 한다. |
▲ 내 다음 여정에는 어떤 태양이 떠오를지 기대된다. |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짐이 나오질 않았다. 나 말고도 5명의 사람이 안절부절 상태로 함께 해주었다. 잠시 후 공항 직원이 해당 항공사 직원과 연결을 해주었다. 짐 번호를 조회해 보니 내 짐은 암스테르담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들의 부주의라고 했지만 나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고, 내일 택배로 보내준다고 하니 편하게 집에 갈 수 있었다.
무언가를 보려면 눈을 떠야 하지만 눈을 감아야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추억. 난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며 경험하고 보았던 것을 이따금 눈을 감고 추억한다. 첫 출발의 설렘, 낯선 거리에서 느낀 감정, 마치 미리 예정된 것 같던 만남, 절대자가 하늘에 한 땀씩 수놓은 듯한 오로라. 매일 밤 잠들 기 전 그날의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 내가 지나왔던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하나씩 떠오른다. 눈 덮인 설원 위의 말들. |
▲ 짧지만 강렬했던 아이슬란드와의 만남, 굿바이 아이슬란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