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보는 여행 속 휴가
처음 맛보는 여행 속 휴가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6.03.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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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멕시코에서 과테말라 국경 넘기 전, 많은 사람이 환전해주겠다며 달라붙었다. 정신이 없었다. 자칫 사기라도 당할까, 이미 환전했다며 거짓말했다. 그런데 국경을 넘고 보니 환전소가 한 군데도 없었다. 멕시코 국경에선 환전소가 많았는데, 내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 현지인에게 직접 환전해야 했다. 옆 사람에게 환율이 어떻게 되는지 묻고, 좋은 환율이라 하기에 갖고 있던 멕시코 돈을 다 바꿔 버렸다. 결국, 속았다. 20달러 정도 손해를 봤다. 국경 넘을 땐 환전 가격을 제대로 알아놔야겠다.

중미의 보석 아티틀란 호수
과테말라의 아티틀란 호수는 중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졌다. 주변엔 여러 마을이 있다. 그중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마을은 파나하첼과 산 패드로다. 산 패드로가 파나하첼보다 조용하고 숙박비와 음식값이 저렴해 일주일간 산 패드로에 머물기로 했다. 숙소는 하룻밤에 30깨쌀(4,200원)이다.

30깨쌀짜리 숙소치고는 좋았다. 무엇보다 숙소에서 아티틀란 호수가 보였다. 앞으로 이렇게 저렴하고 괜찮은 위치의 숙소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 화장실과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은 밖에 있었고, 샤워할 때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았지만 어떤가. 숙소 앞이 아티틀란 호수인데!

▲ 과테말라에선 전통 복장을 한 현지인을 자주 볼 수 있다.
숙소에서 호수를 바라볼 수 있어서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빨래하는 사람을 매일 볼 수 있었다. 호수 한 쪽에선 빨래하고, 다른 한 쪽에선 샤워하는 풍경이 종일 펼쳐졌다. 밤늦게 화장실을 가다 말고 호수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화장실이 밖에 있었던 덕분이다. 여행하며 밤하늘을 바라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멕시코에선 밤하늘을 쉽게 바라볼 수 없었다. 안전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별자리를 하나하나 세었다.

내가 머물던 숙소 주변엔 유럽과 북미 사람들이 많아 항상 영어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이 좋았던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모든 상점이 다 현지 주민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이다. 숙소에서 5분만 걸어 위로 올라가면 현지시장, 학교를 구경할 수 있어 관광지에 있다는 걸 깜빡 잊게 된다.

아티틀란 호수에는 승마, 카약, 등산 등 많은 여가 활동이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승마는 2시간에 60깨쌀(8,400원), 카약은 1시간에 10깨쌀(1,400원)이다. 멕시코에서 말을 탄 기억이 좋아 처음으로 여행사를 이용해 말을 타보기로 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아티틀란 호수 바로 옆을 말을 탄 채 지나갔다. 푸른 하늘과 멋진 풍경.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아티틀란에 온다면 꼭 승마를 추천한다.

아티틀란에선 모든 게 평온했다. 자전거로 여행을 떠난 지 6개월. 항상 길 위에 있다 보니 단 한 번도 나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처음으로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여행이 삶이 되니, 여행 속 휴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전형적인 과테말라 밥상.

▲ 현지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원주민.

마야 문명에 담긴 아픔

멕시코와 과테말라는 같은 라틴 아메리카고 스페인어를 공용으로 사용한다. 과연 이 두 나라의 차이점이 뭘까 생각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전통 복장을 한 마야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안티구아에서 흥미로운 미국인 그렉을 만났다. 그는 미국에서 과테말라까지 6,000km를 2달 만에 달렸고, 2,700만 원이라는 후원금을 만들어내 봉사했던 과테말라 병원에 전액 기부했다.

사실 한국의 제주도 4.3사건과 비슷한 아픔이 이곳에 있다. 당시 한국은 무구한 4만 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과테말라에서는 27만 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배경에 미국이 있다는 것.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알록달록한 전통 의상을 입고 있던 마야 원주민들에게 슬픈 역사가 있었다.

그렉은 학살주동자들을 찾아 처벌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정의를 구현하려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엘살바도르에서 먹은 1,500원짜리 점심.

엘살바도르의 기억

엘살바도르의 입국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엘살바도르는 입국 도장이 없다. 입국 기록은 오래된 종이에 여권 번호와 이름을 적는 게 다였다. 자국 화폐 대신 미국 달러를 썼다. 당황스러워서 직원에게 엘살바도르는 안전한 나라냐고 묻자 내가 방금 건너온 과테말라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도중 현지 여성이 길에서 만두 같이 생긴 걸 기름에 튀기고 있었다. 나에게 맛보라고 한 개를 줬는데 안에는 감자 반죽이 들어 있었다. 맛있어서 몇 개 샀는데 가격이 뜻밖에 쌌다. 4개에 25센트. 미국 달러를 써서 물가가 비쌀 줄 알았는데 예상외다. 길에서 사 먹는 밥 한 끼도 2달러 정도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빈곤층이 늘어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엘살바도르에서의 자전거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현지 남자들이 자꾸 입을 내밀고 쪽쪽 소리를 냈다. 불쾌하고 짜증났다. 이 일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어느 샌가 현지 남자들을 쳐다보는 걸 꺼리게 됐다.

멕시코에 있는 3달 동안 이런 일은 한 번 당해봤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이 불쾌한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치나(China:중국여자)라고 소리치는 건 기본, 그 외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소리쳐댔다. 여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는데 항상 남자들이 그랬다. 심지어 꼬마 남자아이들도 예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루는 찜통더위에 잠시 서서 코코넛을 사 먹으려는데 등이 아팠다. 열매가 등 뒤로 떨어진 줄 알고 돌아보니 열매가 아닌 빵 반죽이 떨어져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또띠야를 던진 것이었다. 코코넛을 팔던 사람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여행자뿐만이 아니라 그냥 아무한테나 다 던진다고. 아프고 분했다. 또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데 어떤 현지인이 손가락 욕을 해댔다. 이런 일이 계속 쌓이다 보니 더는 엘살바도르에서 자전거 여행을 즐길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자전거로 이동했다.

▲ 빨래와 샤워가 동시에 가능한 아티틀란 호수.

온두라스 스쳐 지나가기

온두라스 국경은 마치 시장판 같았다. 이민국이라고 하기엔 낡았지만, 엘살바도르에 비하면 체계적이었다. 스탬프도 있고 입국세도 받았다. 오르막과 내리막, 찜통더위 속에서 열심히 달렸다. 엘살바도르에서 많은 남자가 예의 없이 소리 지르고 쪽쪽 소리를 냈었는데, 사실 온두라스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엘살바도르보다는 수위가 약했다.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고 추파를 던지는 건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인가보다. 운 없게도 엘살바도르에서 처음 이 문화를 접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38도의 습한 무더위 속에서도 열심히 달린 덕택에 해지기 전 목표한 도시에 도착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한낮의 해가 너무 뜨거워서 일찍부터 달리기 위해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났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밤엔 깊게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다리는 벌레와 모기에 뜯겨 흉하고 장딴지는 햇볕에 화상을 입어 붉게 달아올랐다. 화상 입고 벌레에 이리저리 뜯긴 다리를 보고 있으면 속상했다. 온두라스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내가 건너온 국경에서 다음 국경까지의 거리가 가까워 이틀 밤을 지내고 바로 다음 나라로 갔다. 그야말로 스쳐 지나간 셈이다.

▲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다

오늘도 아침 일찍 달리기 시작했지만, 온두라스 국경에서 시간을 허비했다. 출국 신고를 하려는 데 직원이 점심 식사하러 갔다고 해서 한참을 기다렸다. 이후엔 니카라과 입국신고를 하려는데 환전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무더위 때문에 도통 잠을 못 자고 있다. 국경을 넘은 뒤 오후 1시쯤 일찍 마무리하려 했지만, 근처 숙소 물가가 비쌌다. 결국, 계속 달렸다. 오후 늦게까지 달리다가 한 공사현장을 발견했다. 현지인들을 위해 무료 펌프를 지어주고 있었다. 이곳에 있던 해먹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잠자리를 해결했다. 호텔이 하나 있어서 들어가 봤는데 내 텐트가 수십만 배는 나을 것 같았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경찰서를 발견했다. 그동안 멕시코, 중미에서 여러 번 경찰서에 부탁해봤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항상 거절당했다. 그런데 이곳에선 흔쾌히 허락받았다.

사실 경찰서에 처음 들어갔을 때 안쪽에 마당이 보이기에 “아, 저기가 괜찮겠네요”라고 말하려는데,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이 보였다. 순간 머리가 쭈뼛쭈뼛. 결국, 경찰서 구석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려면 마당에 가야 했고 마당에 가려면 죄수들을 마주쳐야 했다. 처음엔 너무 무서웠는데 자주 화장실을 가면서 괜찮아졌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들을 쳐다보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역시나 잠은 설쳤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에서 한 현지인 집에서 삼일 밤 정도 머무르면서 쉬기로 했다. 우연히 현지인의 친구가 라디오 DJ였던 덕분에 생방송 라디오에 출연했다. 길 위에서 배운 스페인어는 유용했다. 간단한 대화만 했지만 내 인생 첫 방송출연을 남미에서 이뤘다.

무엇보다 날이 더워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벌레와 모기에 뜯겨서 간지럽고 빨갛게 화상 입은 다리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은 이틀 밤만 머물고 버스를 이용해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호세까지 가기로 했다. 산호세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해발도 높다. 그러니 시원한 곳에서 조금은 쉴 수 있지 않을까?

▲ 코스타리카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했다.

코스타리카에서 투표하다

버스의 도움을 받아 코스타리카에 도착했다. 사실 이렇게 열심히 코스타리카에 온 이유는 바로 선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민주주의 권리를 행사한 건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였다. 이후 2008년엔 국회의원 선거, 2010년 다시 한 번 나에게 주어진 권리는 지방 선거였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에 몇 개월 살다가 원래의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래서 서류 정리 시기를 놓쳤다. 결국, 나의 투표권은 이미 떠나온 제주도에 있었다.

지난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그 시대의 아픔을 겪어보진 못했지만, 피와 눈물로 어렵게 얻어낸 민주주의라는 것을 안다. 지방 선거를 위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19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방 선거보다 더 복잡했다. 국외 부재자 신고는 멕시코대사관에서, 투표는 코스타리카에서 하게 됐다.

나는 왜 투표에 의미를 두는 걸까? 지구를 아름답게 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남을 돕는 방법, 자연을 보존하면서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 글과 시를 쓰면서 많은 사람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 방법. 지금 내가 지구를 아름답게 할 방법은 투표다.

그렇다면 투표는 뭘까? 투표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일까? 내게 투표는 철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인간의 껍데기 안에 있는 근본이다. 철학이 지구를 파괴하기도 하고, 지구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내기도 한다. 나는 지구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철학을 선택하고 싶었다.

▲ 말에 올라타 호수 옆을 지나가다.

나의 이상형, 코스타리카

태평양과 카리브 해를 끼고 있는 코스타리카는 풍요로운 해변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시내 모습은 여느 선진국과 다를 바 없이 많은 패스트푸드점, 은행,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있다. 산호세는 해발이 1,000m 이상이라서 좀 시원할 거라 예상했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게 덥다. 그래도 밤에 땀 흘리며 뒤척거리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코스타리카에서 한 현지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코스타리카에는 군대가 없다’라는 것이다.

코스타리카는 1949년 6주 동안 벌어진 내전의 비극을 계기로 세계 최초로 외압이 아닌 국민의 의지로 평화헌법을 제정하고 군대를 폐지했다. 아리아스 대통령은 중앙아메리카 5개국 평화협정을 실현한 공로로 198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얘길 듣고 보니 코스타리카에서 군복 입은 사람을 못 본 거 같다. 코스타리카는 군대를 없애고 그 대신 교육과 복지에 돈을 투자하고 있다. 얼마나 근사한가? 내가 꿈꾸는 세상보다 더 멋지고 근사했다. 교육에 많이 투자한 덕분에 코스타리카는 중미에서 가장 부유하다.

자연보호도 중요하다. 국토의 25%가 국립공원과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있다. 덕분에 자전거 위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녹색의 지대를 보면서 달릴 수 있었다. 코스타리카는 ‘중남미’ 국가에서 교육환경 2위(1위는 칠레), 의료복지 2위(1위는 쿠바)다.

나는 왜 지구상에 군대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군대를 폐지힌다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코스타리카는 나의 이상형 국가가 되었다. 코스타리카에서 자전거를 타는 내내 비가 와서 힘들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국가 시스템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오래도록 코스타리카가 기억에 남는다.

▲ 파카야 화산 탐사를 떠났다.

파나마에서 모험을 결심하다

국경에서 파나마 시티로 넘어가는 길, 수많은 언덕 때문에 자전거 타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스타리카 이후부터는 무더운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는 것. 멀리서 바라본 파나마 시티 풍경은 참 멋져 보이지만 실제로는 슬럼가가 많았다. 파나마 시내에서도 역시 남자들에게 조롱을 많이 받아 스트레스가 쌓였다. 여자 혼자 중미를 여행하려면 이런 스트레스는 감수해야 하나보다.

파나마시티에서 포르또벨로까지 하루 만에 달렸다. 포르또벨로에 온 목적은 단 한 가지, 콜롬비아로 가기 위해서이다. 파나마에서 콜롬비아로 가려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사이에 강이 흐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파나마와 콜롬비아 사이에는 밀림이 있고 그 밀림에는 마약 갱들이 활동하고 있다. 아무리 용감하고 용기 있는 사람도 이 지역은 절대 통과하면 안 된다. 밀림에서 생존도 어렵고, 혹시나 살아나도 마약 갱들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다.

파나마에서 콜롬비아로 가는 배를 찾을 수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무모한 모험이 시작되려나? 하루빨리 남미로 내려가고 싶었다. 남미는 산으로 둘러싸여 절대 쉽지 않겠지. 그래도 이제는 남미로 가고 싶다. 제발 운이 따르길.

▲ 무더위를 식히려고 사 먹은 수박.

▲ 시장판 같았던 온두라스 국경.

▲ 총 달린 거리 6,000km를 넘어섰다.

▲ 경찰서 구석에 텐트를 쳤다.

▲ 해맑게 웃는 온두라스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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