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에서 숨은 겨울 찾기
선자령에서 숨은 겨울 찾기
  • 글 박지인 |사진 진근호 기자
  • 승인 2016.02.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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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크루 선자령 백패킹

무시무시한 겨울바람이 메마른 언덕을 범람한다.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어린아이의 바람개비마냥 빙글빙글 돌려내는. 나무 한 그루 자라날 자리조차 내어주지 않는 강하고 건조한 바람이다. 언덕 위로 펼쳐진 광활한 초원은 저항할 생명력을 잃고 그만 진한 커피색으로 말라 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앗아갈 듯이 내리치는 잔인한 바람은 눈앞의 모든 걸 지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혹하고 쓸쓸한 풍경이다. 새하얀 눈이 녹고 숨김없이 드러난 선자령의 전라는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겨울왕국이란 수식어 뒤에 가려져 있던 진짜 모습. 그곳에서 우리는 진짜 겨울을 만났다.

아름다운 설국을 기대했다
최고의 겨울 산행지를 꼽으라면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 바로 선자령이다. 흐드러지게 핀 새하얀 눈꽃과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순백의 설원. 능선을 중심으로 반대편에는 강릉 시내와 겨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서 텐트에 부딪히는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눈 녹인 물로 밥을 짓고 얼큰하게 술 한 잔 나누면 더없이 황홀한 시간이 된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역시 그런 상상을 하며 기다렸다. 제발 눈이 펑펑 쏟아지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 날씨 앱을 체크했다.

그런데 출발하기 불과 1주일 전, 선자령의 눈 소식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그날 저녁 뉴스의 기상캐스터는 슈퍼 엘니뇨의 영향이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마지막에는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라는 허무한 말까지 덧붙였다. 그야말로 꽃 피고 눈 녹는 겨울이 아닌가. 그래도 선자령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으리라. 우리는 숨어 있는 겨울을 찾아 선자령 깊숙한 곳을 향해 떠났다.

겨울의 흔적을 따라서
횡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20분을 달려 대관령 국사성황사에 도착했다. 마침 제를 올리고 있었는지, 경쾌하면서도 음울한 악기 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기상캐스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관령은 말 그대로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였다. 쌀쌀한 늦가을 날씨 정도.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내리쬐는 햇볕의 따스한 온기가 입자 단위로 느껴졌고, 잔잔한 바람이 이따금 앞머리를 가볍게 흔들 뿐이었다.

우리는 산행로를 확인한 후, 두꺼운 겉옷을 벗고 길을 나섰다. 달랑 니트 한 장에 팔까지 걷어붙이고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온화한 날씨가 이어졌다. 상상했던 아름다운 선자령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조금씩 실망감이 밀려올 때쯤, 선자령이 남긴 겨울의 흔적과 마주했다. 나무 발치에 지난주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앙상한 나무가 온 힘을 다해 햇볕을 막아 내고 겨울의 흔적을 지켜냈으리라. 계곡 물은 발만 닿아도 깨질 것처럼 가늘고 위태롭게 얼어 있었다. 우리는 그 흔적을 계속 추적해 나갔다. 선자령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겨울은 점점 선명해졌다. 눈이 녹으면서 생긴 진흙 길을 터프하게 밟으며 정상을 향해 더욱 힘차게 걸었다.

선자령을 만나다
숲을 벗어나자 선자령 풍력발전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더 거세게 불어왔다. 코끝이 아리고 몸이 비틀거렸다. 이윽고 눈앞에는 참혹하리만큼 빛바랜 쓸쓸한 초원이 펼쳐졌다. 온통 하얗게 덮였어야 할 선자령이 벌거벗은 채 그곳에 있었다. 무언가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린 듯한. 오직 풍력발전기만이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바람에 정면으로 맞섰다. 드디어 매서운 바람이 지배하는 언덕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해는 반쯤 떨어져, 새파란 하늘과 메마른 언덕이 저녁 노을을 경계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상까지 오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남은 일정은 미루고 서둘러 숙영지로 이동해 텐트와 쉘터를 설치했다. 주황색 노을이 점점 적빛을 잃어가며 분홍, 보라빛으로 가라앉다 결국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찾아온 선자령의 차가운 밤. 새까만 어둠조차 겨울 하늘의 선명했던 파랑을 가리지 못했는지, 밤하늘은 남색에 가까웠다. 인공적인 불빛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밤은 이토록 농밀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걸까. 몰아치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수많은 별이 밤하늘에 빛났다. 능선 너머에는 강릉 시내의 아름다운 빛이 반짝였다. 황량한 초원에서 만난 생동감 넘치는 밤의 풍경. 우리는 쉘터가 바람에 무너지는 것도 모르고 한동안 넋을 놓았다.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떠올렸다.

다음 날 아침. 어둠을 뚫고 동쪽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점점 하늘에 번진다. 하늘에는 구름이 물결무늬로 깔렸다. 구름이 만든 물결을 타고 태양광이 굴절되어 더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하늘 가득한 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마치 테이프를 빨리 감기 해 놓은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움직인다. 하산길에는 선자령 정상에 들렀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정상석 인증사진을 찍고 나서야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겨울’하면 떠오르는 단상은 양면적이다. 누군가는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눈사람을 떠올리며 행복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춥고 혹독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보통은 전자의 이미지가 매우 강해서 후자는 잊고 지내는 편이다. 상상 속 선자령은 새하얀 겨울왕국이었다. 겨울의 흔적을 따라 올라간 선자령은 눈이라는 베일을 벗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춥고 혹독하고 무섭도록 시린 바람이 부는 선자령의 하늘은 유난히 새파랬다. 그렇게 겨울은 그냥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눈이 있든 없든 겨울은 역시 추워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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