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적산에서 본 청산도의 아름다운 모습. 바다, 하늘, 들판이 푸른 청산도의 진면목이 펼쳐진다.
서편제 돌담, 청보리밭, 갯돌 해안, 범바위 등 절경 20㎞ 이어져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인정받은 청산도. 우리나라 전통 마을의 원형을 간직한 청산도에서는 무조건 걸어야 한다. 하늘도 바다도 들판도 푸른 섬을 거닐다 보면 청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느껴지고, 흥겨워 서편제 영화 주인공들처럼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난다.
청산도가 걷기여행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세상에 조금씩 알려졌던 청산도는 2007년에 담양 창평, 장흥 유치, 신안 증도 등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인정받으면서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슬로시티와 청산도의 슬로길 코스가 기막히게 어울리면서 걷기여행의 명소로 떠오른 것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9㎞ 떨어진 청산도는 면적 약 33.3㎢, 해안선 둘레 85.6km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이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명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산도만큼 걷기여행과 궁합이 잘 맞는 곳도 드물다. 드넓은 청보리밭, 마늘밭, 마을 앞 공동 우물, 당산나무, 작고 아담한 단층집과 돌담 등 우리나라 고향 마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청산도는 고향 지키는 어머니처럼 멀리서 찾아온 도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1코스 서편제길, 얼쑤! 돌담길 따라 흥겨워 어깨춤이 들썩
▲ 서편제 촬영지 당리 돌담길. 보리밭이 유채와 마늘밭으로 변한 것이 좀 아쉽다. |
45분 만에 청산도에 닿자 사람들이 바빠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민들은 모두 사라지고, 걷기 여행자 서너 팀이 길을 나선다. 여객터미널에서 ‘슬로길’ 지도를 받고, 도청항을 빠져나가자 인적이 뚝 끊긴다. 구부러진 화살표의 ‘슬로길’ 팻말은 도락리 골목을 가리킨다. 재미있게도 골목 담벼락에는 이곳 주민들의 옛날 사진들이 걸려 있다. ‘1960년도 도청리 초등학교 운동회’, ‘졸업을 앞두고’, ‘1964년 12월 탈상’ 등 흑백 사진 속 주민들의 모습은 낯익다. 다름 아닌 우리 집 앨범 속의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다.
마을을 벗어나 동구정 샘에서 물통을 채우고 도락리 해변을 지나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서편제 촬영지인 당리 언덕으로 가는 길은 온통 청보리밭이 넘실거리고,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마늘밭에서는 허리를 숙인 아낙이 김을 매고, 보리밭을 흔든 바람이 머리칼을 어루만지다가 역광 속에 반짝이는 도락리 해안으로 사라진다. 아~ 평화롭다!
▲ 도락리에서 당리로 오르는 길은 서정 넘치는 아름다운 길이다. |
당리 언덕에 서자 초가집 서편제 세트장이 나오고, 그 뒤로 유명한 돌담길이 시작된다. 천천히 그 길로 들어서자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즐거워하던 서편제 주인공들의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어깨춤이 절로 난다. 돌담길 끝에는 TV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서 있다. 현대식 2층 건물이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아 좀 당황스럽지만, 당리 언덕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봄의 왈츠’ 세트장을 지나 바다로 이어진 길을 따르면 화랑포 입구 사거리다. 여기서 슬로길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새땅끝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사거리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청산도 아니면 보기 힘든 초분이다. 비록 진짜가 아니라 축제를 위해 만들었지만, 청산도에서는 아직까지 초분을 볼 수 있다.
“옛날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뱃일 나간 아들들이 들어와야 장례를 치러요. 일단 풀로 임시 무덤을 쓴 겁니다. 그게 풍습이 된 거죠.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초분을 만들어요. 한 2~3년 정도 있다가 다시 매장을 하죠. 헌데 번거롭고 돈도 많이 들어서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있어요.” 초분 사진을 찍는 필자에게 이곳에서 작업하던 아저씨가 친절하게 일러준다. 초분에서 왼쪽 바닷가 길을 따르면 2코스 입구가 나온다.
2코스 범바위길, 어흥! 제 울음에 놀란 호랑이 전설
▲ 범바위에 본 권덕리 해안. 뒤로 보이는 곳이 새땅끝이다. 푸른 바다에 놓인 양식장의 무늬가 인상적이다. |
읍리 우리민박 옆의 정자에서 산비탈로 접어든다. 길섶에는 붓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해안길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낚시꾼들 사이에서 유명한 권덕리다. 미리 연락해둔 민박집에 들자 아주머니는 서둘러 밥상을 내놓는다. 정갈한 상에는 두릅이 올라와 있다. 아저씨가 산에서 따왔다고 하더니 아주머니는 매실주를 따라준다. 고단한 하루 걷기를 끝내면서 이렇게 행복한 밥상을 받아본 적이 또 있을까.
▲ 드넓은 바다와 권덕리 일대 조망이 기막힌 범바위와 전망대. |
말탄바위에서 안부를 내려섰다가 올라서면 범바위. 청산도에 살던 호랑이가 자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범바위에 부딪히면서 더욱 크게 울려 퍼지자 더 크고 힘센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섬 밖으로 내뺐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범바위 위의 커다란 전망대에 오르니, 남쪽으로 외롭게 솟은 여서도 너머로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범바위 주차장으로 내려와 보적산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본래 슬로길은 장기미 해변으로 내려갔다가 매봉산으로 오르는 것이 정석이지만, 매봉산 대신 보적산을 택한 것이다. 보적산에서 아름다운 청산도가 한눈에 들어올 것 같은 예감은 적중했다. 둥글둥글한 산은 부드럽게 구릉으로 내려오고, 그곳에 마을들이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청산도란 이름처럼 바다도 하늘도 들판도 모두 푸르다.
▲ 청산도에서는 청보리밭을 흔드는 매혹적인 바람을 느낄 수 있다.
3코스 돌담길, ‘청산도에서 글자랑 말라’
보적산을 넘어 청계리 방향으로 내려서면 장기미 해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3코스가 시작된다. 이어 매봉산과 청계리 마을로 가는 길이 갈리고, 마을 입구에서 만난 지창희(77세) 어르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 돌담이 잘 보존된 상서리 마을. 청산도의 대부분 마을은 상서리처럼 돌담이 놓여 있다. |
청산도에는 고등학교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을 따라 많은 집들이 완도로 광주로 떠난다고 한다. 청계리 마을로 들어서자 가지런히 쌓은 돌담이 반긴다. 목이 뚝뚝 꺾인 동백꽃이 돌담 아래 떨어져 눈부시게 빛나고, 그 돌담 너머 할머니가 소에게 여물을 주고 있다. 할머니와 소들은 너무 친근해 보인다. 마을 옆으로는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는데 이리 구불 저리 구불거린다.
청계리 마을을 빠져나오면 긴 뚝길을 따르고, 원동리를 지나 상서리 마을로 들어간다. 상서리는 돌담이 가장 잘 보존된 마을로 슬로시티란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골목길은 마을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휘돈다. 창처럼 솟은 빌딩숲과 각지고 모진 아파트에 사는 도시 사람들은 이런 마을에 오면 가슴이 뭉클해지기 마련이다.
마을을 벗어나 산비탈을 돌자 널찍한 청보리밭이 펼쳐진다. 햇살이 고랑고랑 빈틈없이 떨어지는 다랑이밭에서 봄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청보리를 보고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물결 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래 보리처럼 푸르고 힘차게 흔들리며 살자!’라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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