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른다
해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른다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5.12.31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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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미국에서 만난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내 다음 목적지, 멕시코에 관한 끔찍한 범죄 사건을 들려주곤 했다. 국경선에서 20여 명이 넘는 멕시코인이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두려움이 앞섰다. 몇 일간 국경선을 오가며 극복해보려 했지만, 막상 국경을 넘는 날이 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인생에 가장 큰 모험이 시작된 걸까.

무시무시하다는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 자전거를 타며 보니 그간 들었던 끔찍하고 살벌한 이야기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운전자들의 매너도 괜찮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무엇보다 멕시코 국경부터 계속 내리막길이라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가끔 오르막길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내리막이라 신났다. 사실은 그 끔찍하다는 멕시코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됐다. 게다가 자전거 여행이라니!

도로 상태도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잘 포장되어 있었다. 길에서 마주친 대부분의 사람이 올라(Hola : 안녕)라고 상냥하게 인사를 해준 덕분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첫날 도착한 도시는 막달레나라는 시골 마을이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멕시코적인 색채가 가득했다. 저 멀리 지는 노을을 보며 모험 가득했던 입국 날을 마무리 지었다.

▲ 까리나의 집에서 첫째 날, 마리비와 그녀의 친구들. 마리비는 왼쪽에서 세 번째.

▲ 까리나로부터 아침식사에 초대받았다.

멕시코에서의 둘째 날은 더욱 편했다. 다음 도시가 멀지 않아 부담 없이 달릴 수 있었다. 오후 1시를 넘기고 목표한 도시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기에 텐트 장소를 물색하기가 힘들었다. 보통 해지기 전에 부탁해야 성공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오후 1시에 부탁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가족과 마주쳤다.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아이팟 사전과 바디 랭귀지를 동원해 잠자리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한 여성이 무언가 말을 했지만 뜻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고맙다고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갑자기 그 여성이 나를 부르며 따라오라고 했다. 가족의 집에 함께 도착했다. 그들은 컴퓨터를 들고 오더니 인터넷 번역기를 사용하며 자기네 집에 하루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 멕시코에 있다는 걸 실감나게 해 준 첫 번째 도시, 막달레나.

멕시코의 첫 친구, 마리비

나를 초대해준 여성의 이름은 까리나였다. 그녀는 세 딸의 어머니였다. 첫째 딸은 열여섯 살, 막내딸은 태어난 지 4개월도 안 되었다. 첫째 딸인 마리비가 동네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그녀의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현지인과 아이들과 얘기하다 보니 멕시코가 푸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리비가 다니는 학교에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리비와 함께 학교에 갔다. 수업방식이 독특했다. 역사, 수학, 영어 등 과목별 교실이 정해져 있고 수업시간표에 따라서 학생들이 이동해야 한다. 마리비가 모든 교실에 노크한 뒤 선생님께 얘기해 나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그들은 참 자유로워 보였다.

▲ 여러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과 소통했다.

한국에선 수업 중인 반에 노크한 후 학생과 선생님의 흐름을 멈추고 여행자를 안으로 들어오게 해 줄까? 이런 것들이 그들에겐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열여섯 살 친구들 덕분에 학교를 제대로 구경했다. 질문과 대답이 끝난 후 사진도 찍었다. 함께 사진을 찍은 후 많은 아이가 포옹해줬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큰 사랑 받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단 1g이라도 그들의 희망이 된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들에게 받은 값진 웃음을 희망이란 이름으로 돌려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녀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끝내고 다음 도시를 향해 달렸다. 이번에도 목표 구간이 짧아서 일찍 도착했다. 운 좋게도 한 현지인이 학교의 빈 교실에 텐트 치게 허락해주었다. 심심해서 공원을 산책하다 아이들을 만났다. 여행하며 나는 항상 아이들을 만나면 선물할 풍선을 갖고 다녔다. 이때다 싶어 아이들에게 강아지 풍선을 만들어줬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60개가 넘는 풍선을 만들어줬다. 손이 좀 아프긴 했지만,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니 금세 괜찮았다.

▲ 교실문을 노크한 뒤에 아이들이 선생님과 직접 이야기를 한다. 모든 선생님이 나를 교실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 하룻밤 신세 졌던 학교의 빈 교실.

미국 국경선에서 내게 머물 곳을 제공해줬던 멕시칸 친구 에드워드가 다음 대도시인 엘모씨오에 친구를 소개해줬다. 도착한 날 저녁 그와 함께 주변 도시 구경을 했다. 엘모씨오는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이틀 전 머물렀던 시골 마을은 멕시코의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엘모씨오에선 미국의 도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다음날 호스트의 어머니 집에 들러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매운 걸 좋아해서 칠리를 잔뜩 뿌려 먹으니 호스트가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웃는다. 자기는 절대로 나처럼 못 먹는단다. 멕시칸보다 더 매운 걸 잘 먹고 얼굴도 점점 멕시칸처럼 변하는 거 같다. 주변에서도 내가 멕시칸처럼 생겼다고들 했다. 낯선 땅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신호로 생각했다. 여러 현지인을 만나며 뉴스에서 보던 멕시코가 아닌 실제로 직접 겪은 친절하고 상냥한 멕시코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짐받이를 만들어주던 멕시칸.

미국인이 사랑한 도시, 산까를로스

현재까지 하루 최대 장거리 기록은 127km였다. 그런데 엘모씨오부터 다음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140km. 중간에 머물 도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록에 도전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라이딩을 시작했다. 야간 라이딩은 정말 싫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다행히 평지라서 달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보통 미국에 있을 때 하루에 80km 정도 달렸다. 그런데 이 날은 정오까지 90km를 달렸다. 신기록이다. 12시를 넘기고 너무 무리한 거 같아서 처음으로 길에서 점심을 사 먹었다. 그런데 아뿔싸! 아침부터 무리했나 보다. 몸에 기운이 쫙 빠지는 게 도저히 자전거에 다시 올라갈 힘이 안 났다. 아무래도 탈진증상 같다. 점심 후 한 시간을 주변에서 쉬었다. 결국, 이걸 반복했다. 1시간 달리고 1시간 쉬고, 1시간 달리고 1시간 쉬고…. 체력분배 대실패다. 멕시코를 와도 난 여전히 초보 자전거 여행자였다.

▲ 마약과의 전쟁 선포 후 엄격해진 풍경이다. 차량 검사를 받기 위해 길게 기다리는 트럭들.

가까스로 해지기 직전에 목표한 도시에 도착했다. 마침내 하루 최대 이동 거리인 140km 신기록을 세웠다. 날 호스트 해 줄 현지인은 일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다행히 호스트와 함께 일하고 있는 프랑스 친구 줄리와 함께 있게 됐다. 줄리는 프랑스 출신인데 멕시코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도착한 다음 날은 푹 쉬고 이튿날 줄리의 친구이자 프랑스인 캐서린을 만났다. 그녀가 옆 동네 산까를로스를 구경시켜줬다. 산까를로스에는 미국 사람과 캐나다 사람이 많다. 그들은 퇴직 후 이곳으로 이사를 온다. 갑자기 영어권으로 동네 분위기가 확 바뀐 거 같았다.

자전거 여행자라고 매일 힘들기만 한 건 아니다. 산까를로스 비치에서 케서린, 줄리와 함께 멕시칸 맥주를 즐기며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다. 이곳에 사는 많은 미국 갑부들은 미국, 멕시코에 각각 한 개씩 집을 갖고 있다. 멕시코에는 추운 겨울을 피해 온다. 캐서린은 프랑스인이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남편도 미국인이고 퇴직 후 산까를로스에 8년 넘게 살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평화로운 바다 풍경을 즐기다 보니 마치 퇴직 후의 여유로운 삶이 어떤 건지 간접 경험하게 된 거 같았다.

▲ 평화로운 산까를로스 오후의 풍경.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다음날 달려야 할 이동 거리 역시 절대 쉽지 않았다. 아침 일찍 라이딩을 시작했다. 하지만 길을 헤맸고, 이슬비가 내렸고, 장비를 챙겨야 했고, 무엇보다 도로 상태가 꽝이었다. 결국, 자전거 앞 짐받이가 부러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멕시코의 고속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지만, 도시의 도로는 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길 넘다가 엘모씨오에서 한 번 휜 적이 있던 짐받이가 완전히 부러졌다. 스포크(바퀴 살)까지 휘어버렸다.

강한 바람, 스포크 휨, 짐받이 부러짐, 시간 부족. 이 네 가지 요소가 결국 날 히치하이크 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다음 도시까지 이 상태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에겐 히치하이크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0분이면 성공할 줄 알았는데, 30분이나 기다린 뒤 겨우 차 한 대를 얻어 탔다. 친절한 운전자 덕분에 무사히 오브레곤이라는 다음 도시에 도착했다. 스포크도 10페소(800원)로 두 개 교환했다. 차를 태워준 사람이 내 짐받이를 무료로 고쳐 줄 수 있다고 해서 재료를 구하러 같이 돌아다녔다. 내 짐받이를 고쳐준다는 말은 알고 보니 똑같이 새로운 걸 만들어준다는 소리였다.

▲ 멕시코는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도로 위에는 많은 사람이 제각각 돈을 벌고 있다. 구걸, 과일 장수, 과자 장수, 신문팔이. 심지어 저렇게 서커스를 하기도 한다.

우선 짐받이를 고정해줄 머리 부분을 만들고, 짐받이를 자전거에 고정하기 위한 틀을 불로 지지고, 나사 고정을 위해 망치로 납작하게 두드린 후 구멍을 뚫었다. 이후 모든 부품을 불로 접착했다. 마무리로 페인트칠까지 해줬다. 설치까지 마무리했다. 내 앞 짐받이 왼쪽이 100% 멕시코 친구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짐받이다. 오른쪽과 비교했을 때 완전 똑같다. 오른쪽보다 더욱 단단한 재질이라고 한다. 세상 어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100% 손과 땀으로 만들어진 짐받이다.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에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고 만나려고 열심히 달린다. 나의 고마운 멕시칸 친구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짐받이를 만들어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멕시코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뜻밖의 횡재, 치과 치료

미국 멕시코 국경에서 나를 호스트 해준 에드워드가 이번에는 오브레곤 도시에 있는 형제 로베르토를 소개해줬다. 로베르토는 의사다. 멕시코 병원 시스템에 관련되어 그의 부인 아드리아나와 얘기를 나눴다. 사실 이전부터 치아가 아프던 참이었다. 혹시나 해서 내 치아 문제를 얘기했다. 그러자 아드리아나가 자신이 다니는 치과 의사를 소개해줬다. 외국에선 병원비가 비싸 가는 게 망설여졌지만, 혹시 모르니 아드리아나를 따라갔다. 치과 의사는 내 여행이야기를 듣더니 적게나마 후원을 해주고 싶다며 오른쪽 어금니 신경치료와 크라운 씌우는 걸 무료로 해주었다.

치아 문제는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 때 시작됐다. 캐나다 치과 비용은 상상초월이라 멕시코에서 치료받을 생각을 하고 참아왔던 참이었다. 그런데 무료로 치료받을 줄이야. 만약 아드리아나에게 얘기하는 걸 시도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는 절대 오지 않았을 거다. 왼쪽 어금니가 깨져 치료 기간은 2주가 걸렸다. 가격은 미국달러 100불. 엄청나게 싼 가격이다. 이틀만 머물기로 했던 로베르토의 집에서 2주를 머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2주간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실제 멕시칸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조그마한 케이크 가게를 운영하고 주말엔 대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 2주 동안 점심 준비를 돕고 아드리아나의 케이크 가게를 도왔다. 아드리아나는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덕분에 2주 동안 배고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멕시코에선 오후 2~3시에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내가 다니는 치과도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문을 닫는다. 학교는 대부분 아침 일찍 7시에 시작해서 오후 2시에 끝난다. 멕시코의 점심은 오후의 만찬이라고 보면 된다. 저녁은 대체로 간소하게 먹는다. 로베르토도 오후 2시면 밥을 먹으러 집에 왔다. 멕시코 점심에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직접 만든 주스다. 물과 과일, 설탕을 조합해서 매일 새로운 주스를 만든다.

▲ 거센 바람과 비포장 길 때문에 짐받이가 완전히 부러졌다.

혹시 모르니 한번 시도를

사실 난 이곳에서 카드 문제로 두 번 고생했다. 우선 내 캐나다 비자카드가 도난 결제 당했다. 내 지갑에 고스란히 비자카드는 있는데 결제내역을 보니 누가 700달러나 긁었다. 카드는 멕시코에서 딱 한 번 돈 찾을 때 썼다. 아무래도 멕시코 국경에서 돈 꺼낸 후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버린 게 잘못 되었나 보다.

처음에 캐나다 은행에 전화했을 때는 새로운 카드를 미국 국경 호스트였던 에드워드의 집에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전화해보니 이번엔 다른 상담원이 그게 가능하며 해킹당한 돈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 멕시코에서 만난 모든 아이는 티 없이 밝았다. 나에게 몰래 다가오려다 들키자 저렇게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다른 문제는 멕시코에서 만든 카드를 이용할 수 없는 것. 은행에 가서 물어보니 카드를 만들어 준 사람이 실수로 내 카드를 취소했단다. 심지어 통장에 있는 돈을 받기 위해선 처음 카드를 만든 은행 지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멕시코 국경까지 다시 가라니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더군다나 이건 자기네들 실수인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마인드 컨트롤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혹시나 모르니 다른 은행지점을 가봤다. 역시나 또 안 된다고 한다. 노갈레스에서 오브레곤까지 2주 걸려 왔건만 다시 돌아가야 한다니! 이번에는 애걸복걸했다. 다른 카드는 도난결제 당했고, 자전거로 왔는데 다시 왔던 길 갈 수 없다며 부탁했다. 결국, 은행직원이 노갈레스에 연락을 한 뒤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은행에서 3시간을 기다린 끝에 모든 멕시코 돈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 아드리아나에게 치과 치료를 말하지 않았다면? 캐나다 비자카드 도난신고로 두 번씩 전화하지 않았다면? 멕시코 카드를 위해 다른 은행을 가보지 않았다면? 모르는 일이다.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다. 누가 알겠는가. 다시 시도했을 때는 다른 결과를 얻을지. 모든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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