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5.10.2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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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우여곡절 끝에 자전거 세계 일주의 첫 번째 목적지였던 LA에 도착했다. 오르막보다 맞바람이 힘들다는 것을 몸소 알게 됐고, 펑크가 많이 나면 수리보다는 교체가 좋다는 것도 배웠다. 그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새롭게 알아야 할까. 설레는 마음으로 또다시 페달을 밟는다.

나에게 맡겼던 그들의 집 열쇠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공기가 상쾌해서 매우 좋았다. 미국을 여행할 때 제일 좋아했던 장소는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다. 무료로 와이파이를 사용해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 무료 와이파이를 접하는 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느낌이다.

카우치서핑(여행자 호스팅 웹사이트)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다음 도착 예정 도시에 있는 현지인이 호스팅을 해주겠다며 연락이 와있었다. 50km 떨어진 곳이라서 서둘러 가다 보니 날이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했다. 해안지방을 벗어나서 드디어 내륙으로 들어섰다. 벌써 이렇게 더위서 어떻게 앞으로 사막을 횡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막상 호스트의 집에 도착해 보니 나 말고도 다른 룸메이트가 세 명이나 더 있었다. 대학생들이 사는 곳이라 자유분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집은 고급스러웠다. 네 명은 동아리를 통해 서로 알게 되었고 지난달 함께 이곳으로 이사 왔다고 한다. 정작 나의 호스트인 브리트니는 친척 집에 가고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녀의 룸메이트들이 나에게 브리트니의 방에서 편하게 지내라며 안내해줬다. 그녀의 룸메이트들은 친절하게도 나에게 집안 구석구석을 설명해줬다.

▲ 울퉁불퉁한 길에서 아이팟을 잃어버렸다가 극적으로 다시 찾았다.

▲ 우연히 찾은 쇼핑몰이 만들어 낸 그늘 밑에서 잠시 졸았다.

호스팅 사이트인 카우치서핑이나 웜샤워를 이용하다 보면 신기할 때가 많다. 브리트니의 친구들은 내게 집 열쇠를 맡긴 채 볼일을 보러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내가 자기네 집에 혼자 있어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내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 했고, 카우치서핑 이용 횟수가 많아 추천 평이 좋았던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매번 모르는 나에게 방을 맡기고 열쇠를 넘겨주는 걸 보면 굉장히 신기했다. 요즘도 호스팅 웹사이트를 이용하며 ‘세상이 서로를 믿고 살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하루 쉬면서 사막 횡단 루트, 스케줄과 에세이를 정리해봤다. 다음날 만난 나의 호스트 브리트니는 참 환한 미소를 가진 사교성 좋은 친구였다. 다음날이 개강이라 낮에 바비큐 파티가 있다고 해서 초대받았는데, 오랜만에 또래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 갑자기 끊어진 체인.

힘들 땐 한없이 서러웠다

편히 잘 쉬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돌리려는데 너무 더워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사막 지형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나 보다. 아침부터 어쩜 이렇게 더울 수 있는지! 오전 11시가 넘어가니 자전거 위에 있는 몸이 누구 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병에 있던 물은 오후가 되기도 전에 벌써 미지근해져서 마시기가 싫어졌다. 주변에서 물 많이 먹으라는 조언을 워낙 많이해 줬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냥 꾸역꾸역 마셨지만, 아무리 가도 그늘이 보이질 않았다. 동쪽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구나.

▲ 사고 후 온몸이 멍들다.

▲ LA에서 얻은 고추장에 빵 찍어 먹으며 점심 달래기.

12시, 쇼핑몰을 하나 발견했다. 건물이 만들어 낸 그늘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대충 가방에 있는 빵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미국에서 자전거 타기란 매우 복잡하다. 주변에 작은 길이 있을 경우, 고속도를 타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로 미리 확인한 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 자갈길이 나왔다. 이런 울퉁불퉁한 길이 처음이라 결국, 아이팟(iPod)을 잃어버렸다. 인터넷을 어렵게 연결한 후 아이팟으로 지도를 확인하면, 이후 인터넷이 되지 않아도 그 지도를 다시 볼 수 있어 여행의 길잡이로 참 좋았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아찔했다. 땅만 보며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다 결국은 찾아냈다.

아이팟을 찾았다는 마음에 기분 좋게 가던 도중 복잡한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캐나다와 미국은 워낙 운전자들의 매너가 좋아서 항상 건널목이든 어디서든 날 기다려 줬다. 이때도 당연히 날 기다려 줄 거라 생각하고 전진했었는데, 한 차가 서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 결국, 내가 그 차의 옆구리를 치고 넘어졌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조슈아 트리 공원을 멀리 바라봤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그 차는 계속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 한쪽에 차를 댈 줄 알았는데, 그 차는 그렇게 계속 전진해서 갔다. 설마 도망가는 건가 싶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한없이 멀어져가는 차를 멍하니 쳐다봤다. 하지만 끝내 그 차는 돌아오지 않았다.

때마침 다음 차가 앰뷸런스였다. 어떨결에 앰뷸런스를 잡아 그 차에 앉아 혈압을 재고 눈동자도 확인하고 맥박도 체크했다. 혹시 이거 돈 내는 거냐고 물으니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앰뷸런스 직원이 경찰에게 보고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경찰이 온 뒤, 확인 결과 내 과실이 커서 진술서를 작성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자전거는 자동차와 같아서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그래서 그냥 됐다고 하고 내 갈 길을 다시 갔다.

▲ 조슈아 트리 옆을 지나다.

▲ 짐 덕분에 말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온몸이 아픈 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까 앰뷸런스에서 안 아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 후회가 몰려왔다. 왜 그 운전자는 서지 않고 계속 갔던 걸까? 서러움에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좋은 사람을 만날 땐 여행의 활력을 얻게 되는데,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여행을 지속하는 게 두려워진다.

영화의 슬픈 한 장면처럼 서럽게 울며 30분 페달을 밟았는데, 알고 보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영화의 가련한 여주인공이 되겠나. 내 인생은 시트콤에 훨씬 잘 어울리는 거 같다. 한참 즐겨 보던 시트콤의 효과음이 내 귀에서 울러 퍼졌다.

▲ 자전거, 내 텐트, 그리고 별 궤적.

고맙지만 혼자 힘으로 갈게요

길을 헤매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저 멀리 지는 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어둠이 내려앉으면 모르는 곳에 있는 것이 싫다. 결국, 30분 정도 내가 싫어하는 야간 라이딩을 한 후에 초대해준 현지인 집에 도착했다. 정말 긴 하루였다. 사막에 본격적으로 진입해서 종일 땀을 많이 흘렸고, 교통사고에 몸이 좋지 않았다.

이날 나 이외에도 다른 독일인 게스트가 있었다. 그들은 차를 렌트해서 다니고 있는데, 앞으로 내가 갈 경로와 같다며 함께 싣고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교통사고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터라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대답했다. “고맙지만 제 혼자 힘으로 갈게요.”

이날 저녁 한 외국인 친구로부터 메일이 한 통 왔다. 그 친구는 세계 여행을 했기에 경험이 풍부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데 어떻게 하면 여행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친구의 답변이 꽤 감동적이었다.

“자전거 여행은 결코 쉬울 수 없습니다. 항상 힘든 일이 동반되기 마련이죠. 쉬운 걸 기대하지 마세요. 쉬운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많지 않답니다. 오히려 날 힘들게 하는 것들이, 날 더 강해지게 할 수 있어요.”
어쩌면 이 교통사고로부터 나는 강해지는 법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 밤늦도록 캠프파이어 하며 사막에서의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쉴 여유가 생기지 않아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여러 군데 멍이 들어서 온몸이 찌뿌둥했지만 뼈가 부러지지 않았으니 다시 페달을 돌려야 할 운명이라고 믿었다. 아침 9시에 출발했지만, 여전히 찜통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출발하자마자 바퀴에 구멍이 나서 그늘 밑에서 수리를 핑계로 쉴 수 있었다.

펑크를 수리 한 후 다시 달리다가 오후 1시쯤 길 위에서 결국 자포자기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자전거가 만들어 놓은 그늘 뒤에 몸을 웅크리고 30분 정도 졸았다.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내가 걱정되었는지 30분 거리 떨어져 있는 다음 도시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한다. 어제 독일인이 제안한 건 너무 먼 거리였기에 거절했었는데, 이런 짧은 거리 이동하는 건 큰 반칙이 아니겠지. 더위 먹은 핑계로 “감사합니다.” 하며 차를 얻어 탔다.

이후 스타벅스에서 인터넷이 잡혀서 웜샤워스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다. 집이 산 중턱이라서 어쩔 수 없이 픽업을 나와 줬는데 막상 도착한 집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게스트를 위한 전용 별장이라고 한다. 날 호스트 해준 크레이그는 71살인데 얼마 전 호주에서 자전거 여행을 했다고 한다.

크레이그는 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다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크레이그는 내가 며칠 뒤에 갈 사막 경로를 10년 전에 이미 다녀왔다고 했다. 어려울 것 없다는 격려도 해주었다. 직접 경험해본 크레이그의 말을 따라 내가 가고 싶은 경로로 쭉 가기로 했다.

이래서 웜샤워스 호스팅 사이트가 좋다. 실제 경험자들을 만나서 실질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하다. 크레이그는 여기서 주말에만 지낸다며 1시간 떨어진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아쉬웠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활발한 기운으로 전해졌다. 외국에서 여행하면서 느끼는 건 일부 외국 사람들은 나이를 잊고 산다는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 실천 하는 그들의 모습에 가끔 감동 받곤 했다.

▲ 별하늘 밑에서 더욱 강해지리라 다짐해본다.

쉬운 길을 기대하지 말자

다음 날 아침 얼마 가지 못해 기어를 바꾸며 체인이 끊어졌다. 내리막길이라 우선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다가 자전거가 멈춰 섰을 때쯤 히치하이킹을 했다. 얼마 못가 한 현지인이 차를 태워줘서 자전거 수리점을 갔는데, 토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수리점이 열려 있었다. 심지어 수리도 무료로 해주었다. 다음에 똑같은 사고가 나면 고쳐 쓰라고 여분용 부품도 공짜로 줬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당시에 왜 모든 게 다 공짜였는지.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태워줬던 짐이 자기네 가족도 소개해주고 집 주변도 구경시켜주겠다며 초대해줬다. 그들의 집에 도착하니 카우보이 분위기가 물씬 났다. 땀이 많이 나서 샤워를 하는데, 자꾸 그의 손자가 문을 열려고 해서 꽤 진땀을 뺐다. 3살짜리 꼬마아이는 내가 꽤 좋았는지 할아버지한테 나를 애인으로 삼으라고 설득까지 했다. 미국 시트콤을 찍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짐은 서부 사람답게 3~4마리의 말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말 타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아침에 체인이 부러졌을 땐 속상해하지 말자고 나 자신을 설득했었는데, 설득한 덕분인지 오후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겨서 좋았다.

짐이 조슈아 트리 (Joshua Tree National Park)까지 차로 태워준다기에 느긋하게 오후까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떠나기 전에 물 8L를 준비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물 많이 먹어. 안전하게 여행해. 차 조심해. 좋은 여행해”였다.

조슈아 트리 공원에 도착해서 텐트 칠 곳을 살피는데 누군가 인사를 하며 이미 캠핑장 꽉 차서 찾기 어려울 것이니 자기네 캠핑장에 텐트를 치라며 천사 같은 호의를 베풀었다. 심지어 곧 바비큐를 먹을 건데 음식이 많으니 같이 먹자고까지 했다. 전생에 내가 미국 서부를 구했었나?

나중에 장소를 옮겨 더 큰 캠프파이어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새벽 4시에 일어났던지라 밤이 깊어지니 피곤이 몰려왔다. 손에 있던 맥주 캔을 다 비우고 일어나려 하자 날 초대했던 친구가 또다시 맥주 한 캔을 건네줬다. 그 맥주 한 캔에 다시 주저앉았다. 결국 12시가 넘어 우리 그룹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함께 자리했다.

원래 하루만 머물다 가려고 했는데 하루 더 머물며 사막을 즐겨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바람이 텐트를 흔들 때 내는 소리가 꽤 무서웠다. 문득 교통사고 났을 때 내게 이메일로 조언을 준 현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포기하는 순간 결국 모든 걸 다 잃게 될 거야. 힘든 순간을 견뎌 내야지만 결국 성취할 수 있어.”

머리 위로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물어봤다. ‘얼마나 많은 힘든 날을 극복해야 집에 갈 수 있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한 거 같다. ‘포기하지 않는 한 끝나는 건 하나도 없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언젠간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도착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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