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성지순례, 홍콩
여행의 성지순례, 홍콩
  • 글 사진 전영광 기자
  • 승인 2015.07.2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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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OAD | 이니그마가 담는 세상

DVD도 불법다운로드도 없던 시절, 비디오 가게 문턱이 닳도록 오가며 홍콩 영화를 탐닉하던 이들에게 홍콩은 꿈의 도시였고, 홍콩 여행은 성지순례였다. 마천루 아래에서 쉽게 길을 잃던 그 발걸음은 언제나 특별했고 설레었다. 하지만 홍콩도 변하고 우리도 변한 지금, 이제는 홍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도시의 재발견이란 거창한 미션을 품고 다시 홍콩을 찾았다.

샴수이포
홍콩의 상징은 무엇일까?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 아니면 화려한 야경?
한때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였고 그곳에 가는 것이 많은 사람의 꿈이자 버킷리스트였다. 하지만 아시아 각국의 빠른 성장으로 도시들이 상향 평준화된 지금, 첨단 도시로서 홍콩의 매력은 어쩌면 조금 희석되었는지도 모른다. 고층 빌딩과 근사한 쇼핑센터를 가진 도시는 이제 꽤 많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홍콩의 낡고 예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장 낡고 오래된 모습의 홍콩을 만나기 위해 샴수이포를 찾았다.

▲ 가장 낡고 오래된 모습의 홍콩을 만나기 위해 샴수이포를 찾았다.

▲ 샴수이포의 한 가게에 빼곡히 쌓인 전자제품.

MTR 샴수이포 역을 나서자 깜짝 놀랐다. 어지러울 정도로 낡은 건물들, 거리를 향해 돌출된 커다란 간판들. 그 속에 복잡하게 뒤섞인 한자와 영문.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것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였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제5원소’ , ‘매트릭스’ 등 많은 SF 영화들이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받았으니 처음 만나는 샴수이포의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샴수이포는 전자상가가 자리한 까닭에 홍콩의 용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최신 제품 보다는 오래된 중고게임기나 저렴한 생활용품 같은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1930년대 건물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샴수이포는 많이 낡았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그 공간에선 많은 이야기가 다가온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그리고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뒤섞여 ‘혼돈 속의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 내는 풍경. 어쩌면 홍콩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 샴수이포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배경이 된 곳이다.

타이쿠

새로운 발견을 위해선 우선 익숙한 것들과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침사추이를 뒤로한 채 홍콩섬 타이쿠에 숙소를 잡았다. 익숙하게 오가던 관광지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거리는 무척이나 차분한 모습이다. 다만 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만이 여전히 이곳이 홍콩임을 말해준다. 견고하게 늘어선 무채색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성벽을 형성한듯하다. 고개를 들어 그 높이를 가늠하다 이내 깨닫는다. 높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빼곡함이라는 사실을.

건물 가득한 작은 창문에는 에어컨 실외기들이 아찔하게 매달려있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그 실외기 너머에는 오늘의 홍콩을 살아가는 저마다의 삶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이 잿빛 건물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무심한 듯, 모두 똑같은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자리한 복잡하고 각기 다른 이야기들, 어느 순간 이 건물 하나하나가 거대한 생명체는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 홍콩섬 타이쿠에서 바라본 전경.

타이쿠의 거리에서 익청빌딩과 우연히 마주했을 때, 그 엉뚱한 상상은 더욱 분명해졌다. 전체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건물. 수천 개의 창문과 실외기가 건물을 빼곡하게 뒤덮은 모양새다. 직접 보지 않는다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이 건물은 마치 거대한 공룡처럼 느껴졌다. 그 수많은 실외기를 통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한 것이 적어도 나만은 아닌가 보다.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 4’역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주인공 마크 월버그는 이 거대한 건물 위를 뛰어다니고, 공룡 위에 올라탄 옵티머스 프라임은 디셉티콘과 이곳에서 결투를 벌인다. 영화 덕분일까? 익청빌딩은 지금 홍콩의 새로운 명소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 수십 개의 창문과 실외기가 건물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다.

▲ 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이 이곳이 홍콩임을 말해준다.

트램

홍콩의 여름은 참 덥다. 고층빌딩과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도시의 열기는 온도계의 숫자를 한참 뛰어넘는다. 호기롭게 나선 여행자의 발걸음도 홍콩의 더위 앞에선 녹아내리기 일쑤다. 다행히 그럴 땐 좋은 방법이 있다. 홍콩의 명물, 2층 트램에 오르는 것이다.

1904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홍콩의 2층 트램은 오늘도 홍콩의 복잡한 거리를 유유히 달리고 있다. 홍콩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트램은 아주 느린 속도로 달린다. 가끔은 부지런히 페달을 돌리는 자전거에 뒤처지기도 한다. 급할 것 없는 여행자에겐 그 느림이 참 좋다. 운이 좋아 2층 맨 앞자리에 앉으면 홍콩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복잡한 도시를 잰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어떤 오늘을 살고 있을까? 그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는 사이, 맞은편에선 또 다른 트램이 다가오고 이내 스쳐 지난다. 화려한 광고로 뒤덮인 홍콩의 트램은 똑같은 모양을 찾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광고로 덮여있다. 글로벌 브랜드의 광고에서부터 알 수 없는 한자들로 가득 찬 광고까지. 트램만 보고 있어도 홍콩의 트렌드가 읽히는 듯하다.

▲ 트램 위에선 복잡한 도시를 잰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도시를 바라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다가오면 내리면 그만이다. 다시 오르고 싶을 때면 또 다른 트램이 금세 다가올 테니 말이다.

이 길의 끝에는 어떤 풍경이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여행자는 마침내 트램의 종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샤우케이완에 도착한 트램은 모든 사람을 내려놓고 운전사마저 내려놓았다. 눈치를 살피다 쭈뼛쭈뼛 내려선 그곳에서 작은 시장을 만났다. 야채와 고기 그리고 생선을 파는 상인들, 장을 보는 사람들. ‘오늘은 뭘 해 먹을까?’ 고민하며 서성이는 그 모습은 우리네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다. 도도하게만 느껴지던 홍콩이 조금은 더 살갑게 다가온다.

▲ 1904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2층 트램은 홍콩 역사의 산증인이다.

란콰이퐁

도시에 어둠이 내리면 화려한 조명과 네온사인이 제 빛을 발하고 홍콩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더운 나라들이 대개 그렇듯, 무더웠던 시간이 지나고 서늘한 밤이 찾아오면 도시는 더 활기차게,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고 이 밤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모든 이들은 란콰이퐁으로 향한다.

▲ 란콰이퐁에서 만난 아름다운 홍콩의 여인들.
차분한 센트럴에서 고작 한 블록 들어섰을 뿐인데, 란콰이퐁의 분위기는 제법 심상치가 않다. 나지막한 언덕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 누군가는 큰 소리로 떠들고, 누군가는 흥에 겨워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술잔을 부딪치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 란콰이퐁은 그 자체로 커다란 파티장이 되고 클럽이 된다.

오래전 여행길에서 만나 친구가 된 엘라와 실비아를 란콰이퐁에서 다시 만났다. 건물과 건물 사이 비좁은 틈으로 이끄는 친구들. 어두운 그 틈 사이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놓인 펍이 자리하고 있다. 머리 위로는 에어컨 실외기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고 이따금씩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어디선가 새어 나온 라디오 헤드의 음악 소리는 좁은 공간에 부딪히며 증폭되었다. 실외기가 만들어내는 간헐적인 소음과 브릿팝 멜로디가 뒤섞이는 사이 홍콩의 화려한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린 칵테일 몇 잔을 마셨다. 홍콩의 달큰한 밤공기가 뒤섞인 칵테일의 맛은 물론 훌륭했다. 란콰이퐁의 분위기는 참으로 묘하다. 그 공간은 몽환적이다. 그리고 조금은 위태로운 듯 로맨틱하다. 마치 오래전 보았던 홍콩 영화들처럼 말이다.

▲ 란콰이퐁은 그 자체로 커다란 파티장이 되고 클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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