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그냥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 그냥 두브로브니크
  • 글 사진 길바울 기자
  • 승인 2015.06.29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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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울의 걷고 타는 유럽 횡단 ‘오늘을 산다’ 그 마지막 이야기

스타일은 바로 강남스타일
유럽 최고의 휴양도시를 꼽을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곳이 바로 두브로브니크다. 크로아티아 최남단에 있는 이곳의 여름은 정말 뜨겁다. 새파란 하늘에 태양빛이 막힘없이 내리 쬐고 있을 뿐 아니라, 여름 성수기만 되면 어김없이 도시 전체가 수만의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나는 들뜨고 용감한 마음으로 이곳의 메인 스트리트로 기타를 들고 나선다. 그 끝 아무 곳에나 앉으면 그곳이 곧 무대가 되고, 지나다가 멈춰선 사람들은 관객이 된다.

▲ 카미노 끝없이 펼쳐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시간

우선 자리에 앉으면 내가 외워 놓은 노래들로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알아주는 공연을 시작한다. 오늘은 프랑스에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단체로 여행을 온 모양이다.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당당하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하나둘씩 모인 사람들이 대략 60~70명 정도. 동양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고, 우리나라 노래들의 멜로디가 훌륭한 까닭에 언제나 관심거리다. 유럽을 다니면서 우리나라 음악보다 세련되고 신나는 음악을 들어 본 기억이 없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노래에 율동도 하고 박자에 맞춰 박수도 쳐주기도 하며, 3~4곡 즈음 불렀을 때 한 프랑스 친구가 말한다. “우리가 아는 노래 하나도 해줄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강남스타일?” 이렇게 짧은 대화에 이어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예~~ 바로 그거야.” 그 때, 그들을 담당하는 학교 선생님으로 보이던 한 남성이 외쳤다. “애들아 주목! 오늘 우리를 위해 한국에서 스타가 왔다 전부 모여 봐.” 나는 그 여세를 몰아 외쳤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버스킹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아 세이 ‘나는’, 유 세이 ‘사나이’. 오케이? “ “오케이!!!”그렇게 시끌벅적 시작된 무대. 모두가 뛰며 일명 ‘말춤’을 추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내가 입고 있던 셔츠는 땀으로 다 젖었고, 모두가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핸드폰과 환호성을 갖고 이 현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연이 끝나니 모두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모두가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 들어 그 순간을 담아갔다. 내 카메라에도 담겼고,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을 함께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에 달콤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 무리에는 한국인들도 있었고 나와 눈인사를 했다. 그 날의 공연이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외로운 여행길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공연이었지만, 모두가 노래 하나로 하나가 되었고,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순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열정과 힘을 갖고 달려야 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 공연은, 두브로브니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기억과 동시에 아직도 생생해 내 기억 속에 재생되고 있다.

▲ 카미노 상처 난 뒤꿈치를 날마다 소독하는 건 정말 곤욕스러웠다.
다시 만난 우루시와 알렉스

3개월 전에 크로아티아에서 만난 슬로베니아 친구들을 이번엔 슬로베니아에서 만난다. 유럽 횡단을 하기 위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데 가는 길목에 슬로베니아가 있다. 우리는 헤어진 이후로 서로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됐다. 여행의 짬을 좀 먹으면 인연도 많아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다가도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인연이 닿았던 이들이 초대를 해주기도 한다. 알렉스와 우루시의 가족들을 만나고 잠시 머물면서 나는 배려라는 것을 배웠다. 나는 파란색 펜으로 일기를 썼는데, 마미(알렉스 어머니)가 펜의 잉크가 다 닳은 것을 보더니 파란색 펜을 찾아 선물해주기도 하고,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대접해주는 모습에 사실 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특별히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곳에서 알프스가 시작되는데 그 자연은 한국과는 전혀 달랐다. 물의 색이며 나무의 생김새 모두가 여행의 기분을 한껏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알렉스가 내게 말했다. “폴, 나는 한국, 일본, 중국인들을 구별할 줄 몰라. 다 같은 아시안으로 보여.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어.” “어떻게?” “우선 한국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꼭 모자를 쓰고 있어. 여자들은 대부분 화장을 진하게 하고, 사진을 많이 찍어.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사진만 찍고 이동하자고 해. 왜 그런거야?”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알렉스의 질문은 정확했다.

이래저래 둘러 댈 것도 없었다. 그것은 잘못이라는 이야기보다는 수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나만큼은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증거를 남기는 여행이기 이전에, 나를 만나는 여행, 뒤돌아보는 여행, 잠시 쉬는 여행, 바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알렉스와 우루시와 함께 멋진 여행을 하고 이제 다시 서쪽으로 향해간다.

▲ 카미노 넘어가는 어느 숙소에서. 노트는 추억으로 가득하고 길은 아득하다.

▲ 슬로베니아 알프스가 시작되는 깊은 산 속 폭포 앞에서
드디어 목적지 카미노 데 산티아고

2014년 5월 12일 터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힘차게 시작되었던 여행은 10월 2일, 143일이 흐른 뒤, 스페인 순례자길에 닿았다. 11개의 나라를 지나왔고, 수천의 사람들을 만났고, 내 인생 속에 수많은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그 길을 시작하기 직전에 서있게 되었다. 두꺼운 내 일기장이 가득해졌고 3개의 펜이 일기장에 스며들었다. 이제 다른 텅 비어 있는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D+1이라고 적었다.

카미노 길에 대한 내 기대와 환상은 거대했고, 마치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들뜬 기분과 함께 다 끝나간다는 지침의 마음도 뒤섞였는데 이상하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내 눈앞으로 파노라마는 계속 되어 천국의 그림이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 산티아고로 귀결되는 순례길은 다양하다.

그 중 나는 프랑스에서 시작하는 길을 걷는다. ‘생장 삐 에드 포흐’ 라는 프랑스 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향했다. 이쯤 오면 순례자 길을 걷기 위해서 배낭을 메고 전 세계 각국, 각 지역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곳을 향하는 버스 짐칸에는 배낭들이 한 가득 이다. 저 배낭들마다 갖고 있는 이야기가 있고, 또 앞으로 나와 같이 만들어져 갈 것이다. 이 지구에 수많은 인생들이 만들어지고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감사했다. 생장에 도착해서 짐칸에서 배낭을 내려 들쳐 매는데 이 때, 짊어진 배낭은 이전과는 묘하게 달랐다. 각오가 있었고, 기대가 들어있었다. 그 무게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아니 조금 더 무거웠던 것 같다. 전쟁에 나서는 군인이라기보다 죽음을 각오한 군인의 느낌에 더 가까운 듯 했다.

▲ 카미노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만난 스웨덴 친구들이다. 여기서는 모두 친구가 된다.

길이 있다는 것

출발 지점에 도착해서 짐들을 점검한다. 그리고 잠시 나와 테라스에 앉아서 하늘을 따스한 노을로 물들이며 물러가는 태양이 나를 비췄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매번 이 순간이 되면, 불안이나 걱정이 조금씩 마음 속으로 들어오곤 했다. 늘 그 다음날에 대한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아, 내일은 어디로 향하지?’ ‘내일 잘 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 없이 평안했다. ‘아.. 이제 길이 있구나.” 그제서야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다. 서러웠던 것일까. 그래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것 같다.

▲ 프랑스 2년 전 그 자리 그대로 같은 자세로

어쨌든 이제는 길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길이 정확하다. 길이 없던 곳을 떠돌아다니는 무모함과 일종의 자유로움 뒤로 바짝 쫓아오던 불안감은 사라졌다. 길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황홀한 일인지 몰랐다. 어떤 진리의 흉내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실은 황홀했다. 지난 5개월간 시달렸던 불안과, 매번 요구되었던 일종의 도전은 이제 잠시 쉬어도 된다. 먼저 걸어간 선배들이 뚫어 놓은 길을 신나게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프랑스 니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해마다 20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이곳은 지난 달 9월까지 최대 성수기를 맞는다. 나는 그 성수기를 피해 10월에 걷는다. 다행이었다. 이제 텅 빈 거리처럼 텅 비어 있는 마음으로 걸을 것이며, 그 걸음걸음으로 새겨질 마음들과 생각들을 잘 적어 가며 여행의 마무리를 할 생각이다.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조차 없다. 기간이 얼마나 될지, 어떻게 걷게 될지, 다 걸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디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포기는 없을 것이다. 입 한번 뻥끗 없는 조용한 저녁을 보내며 넘어가는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서쪽의 산을 넘어가는 태양의 마지막 모습이 가장 따스하고 그 빛이 가장 아름답듯이 여행의 끝을 향해가는 내 마음과 내 모습도 많이 변해있었다. 중요한 것은, 조금 더 얌전해진 이 마음을 얻은 곳이 성공과 기쁨이 있던 거리가 아니라, 불안과 그걸 견디어 왔던 그 과정이라는 거다. 그것은 잔잔한 기쁨이었다. 그 기쁨은 마치, 뒤로 잡아 당겨야 열리는 문을 앞으로만 밀어붙여 열어 보려다 지쳐있을 때, 누군가 조용하게 뒤로 문을 열고 나갈 때 느끼는 그런 허무함과 해방감이 섞인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내 삶을 조금씩 해방시켜가고 있었다. 초반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뒤꿈치 살이 패여 나갔다. 물집 정도가 아니었는데, 미련하게 걸었다. 혹시나 포기하게 될까 상처도 보지 않고 걷다 몇 시간이 흐른 뒤에나 벗어 봤던 것이 화근이었다. 의사가 걷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난 걸을 겁니다.” 그렇게 난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 카미노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다. 잠시 쉬고 있다. 발에는 피가 나지만 즐겁다

내 이야기를 나눠 가신 모든 분들에게도 여행을 권한다. 나처럼 무모할 필요 없다. 되도록이면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여행, 여행을 통한 그 무엇을 기대하기 보단 여행 그 자체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진 10장 찍을 것 8장으로 줄이고 2장은 글을 써보자. 하루는 카메라를 두고 거리를 걸어보고, 나라를 하나씩 줄여 보자. ‘여행은 어쩌면 포기한 만큼 주어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해보면서 이 글을 나누게 해주신 월간 <캠핑> 관계자 분들과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려 드린다.

▲ 카미노, 홀로 걷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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