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고등어’의 텐트 이야기 | 블랙다이아몬드(상)
‘양식고등어’의 텐트 이야기 | 블랙다이아몬드(상)
  • 글 사진 ‘양식고등어’ 조민석 기자
  • 승인 2015.03.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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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아웃도어 브랜드

이번 호에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릴 텐트메이커는 미국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다이아몬드BLACK DIAMOND입니다. 캠퍼들을 설레게 한 텐트메이커 블랙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에 앞서 블랙다이아몬드의 전신인 취나드 이큅먼트Chouinard Equipments. Co. Ltd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이를 이야기하려면 창업주인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 아웃도어 메이커 블랙다이아몬드의 전신인 취나드 이큅먼트를 창립한 이본 취나드입니다.

▲ 이본 취나드가 야생 매 길들이기를 좋아했던 10대 당시의 모습입니다. 저렇게 가파른 절벽을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르내렸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신선한 충격입니다.
매를 좇던 소년, 암벽 등반 장비를 만들다

블랙다이아몬드의 창업주이자 취나드 이큅먼트 창업주로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이본 취나드의 유년기는 ‘비범함’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본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1938년에 수리공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메인 주의 루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7년 남서부의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딱히 특별하거나 이렇다 할 비범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에게 9년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지요.

주목해야 할 것은,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하고 나서 수리공인 아버지로 물려받은 유전자에는 없던 비범한 잠재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캘리포니아 주에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코스트 산맥이 있었는데, 이전부터 야외활동을 즐겨 하던 이본이 이러한 환경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 잠재력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본은 15세 때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면서까지 가파른 절벽에 사는 야생 매를 키우는 취미에 푹 빠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10대의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야생 매를 키우는 동호회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야생 매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절벽이나 나무에 산다는 점을 생각하면 10대의 나이에 그가 한 일이 평범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학교를 중퇴해가면서까지 젊은 시절을 암벽 등반에 올인한 이본 취나드. 그는 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학교에서 수학 공식을 외우고 있는 시간이 제일 아까웠다’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암벽을 사랑했고, 자연을 사랑했습니다.

▲ 이본 취나드가 당시 암벽 등반가들을 상대로 직접 만든 암벽등반 장비를 판매하던 모습입니다. 암벽 등반가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입소문으로 그가 직접 만든 장비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이는 취나드 이큅먼트 설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절벽을 오르내리며 야생 매를 키우는 일을 즐기던 이본은 항상 머릿속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민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절벽을 좀 더 쉽게 오르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지요. 수리공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이것저것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이본은 자신의 손에 맞는 암벽등반용 장비들을 직접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만든 맞춤 장비를 등반 파트너들과 함께 매 키우기 동호회 사람들에게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용돈을 벌기 위해서였겠지요.

암벽 등반가들을 상대로 시작한 장사는 예상 외로 잘 되었습니다. 이본과 그의 가장 친한 암벽 등반 친구인 톰 프로스트Tom Frost는 취나드 이큅먼트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허름한 대장간 하나와 무엇보다도 소중한 동료들, 그리고 갓 스무 살을 넘긴 청춘의 피만으로 시작한 일이었지요.

20대 청춘의 열정 하나로 시작된 취나드 이큅먼트. 회사를 설립한 전후로 이본 취나드는 북미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험준한 북벽들을 암벽등반으로 오르는 일을 즐겼습니다. 1961년에는 캐나다의 로키 산맥을 정복했고, 에디트 카벨Mt. Edith Cavell과 도날드경봉Mt Sir Donald 북벽을 올랐습니다.

한때는 노스페이스 사의 창업주인 더글라스 톰킨스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남미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고, 더 나아가서는 캐나다의 부가부Mt Bugaboos 산의 정상 루트를 최초로 개척하는 쾌거도 이루었지요. 이본이 당시 등정했던 산과 북벽들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암벽 등반가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곳입니다. 물론 그의 등정에는 언제나 그가 개량한 취나드 이큅먼트 사의 대표 상품인 피톤piton이 함께 했지요.

▲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에 생산된 취나드 이큅먼트 피켈입니다. 빙벽 등반에 사용되는 장비인데, 35년 가량이 지난 지금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 이본 취나드가 당시 그의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차렸을 때 촬영한 사진입니다. 취나드 이큅먼트의 본사는 사진 속에 있는 대장간 건물이 전부였습니다.

반면 공동 창업주나 다름없었던 이본의 친구 톰 프로스트는 암벽 등반 장비 개발을 넘어서 빙벽 등반에 필요한 장비들을 개발하는 데 온 역량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크램폰crampon이라는 빙벽 등반 장비를 개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크램폰은 오늘날 사용되는 빙벽용 아이젠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장비인데요, 크램폰의 개발을 계기로 톰 프로스트는 빙벽 등반 분야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인수봉 취나드 A·B의 그 취나드
6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본은 주한미군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처음 맺었습니다. 이본은 미군에서 복무 중인 군인의 신분이었지만, 군인이라는 신분이 암벽 등반에 대한 이본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본이 한국에서 주한미군 신분으로 복무하는 동안 암벽 등반을 시작한 데에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습니다. 이본이 한국을 대표하는 암벽등반가인 선우중옥 씨를 찾아가서 다짜고짜 한국의 암벽을 등반하고 싶다고 영어로 이야기를 했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선우중옥씨가 이본의 제스처를 우여곡절 끝에 이해하여 이본을 데리고 북한산 인수봉으로 가서 그를 상대로 기본적인 자일을 매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 회사 설립 후 피켈에 새겨졌던 취나드 이큅먼트 사의 로고입니다. 현재의 것과는 달리 마름모 안에 알파벳 C가 들어 있는 형태의 CI가 주된 특징이며, 취나드의 이름과 함께 그의 친구인 톰 프로스트의 이름이 함께 로고로 새겨진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 취나드 이큅먼트 사의 대표 상품이었던 개량형 피톤의 모습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정교하고 견고해졌지만, 요세미티 절벽에 있는 금이 벌어진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 제품이기도 합니다.
선우중옥 씨는 그가 묵묵히 매듭법을 배우는 것을 보고 암벽 등반에 대한 경험이 없는 미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비범하다 싶을 정도로 암벽 등반에 능숙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본이 당시에 미국의 정상급 암벽 등반가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지요. 서로의 능력을 확인한 것을 계기로 선우중옥씨와 이본 취나드는 1963년 7월 선우중옥 씨의 동료 몇 명과 함께 자신이 직접 만든 장비를 동원하여 인수봉을 오르는 취나드길 2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본이 암벽 등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암벽 등반이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이본은 영창 갈 각오를 하고(!) 상관의 사무실 책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등반할 시간을 얻어내기 위한 1인 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국 그의 열정을 못 이긴 상관은 그를 보일러병으로 차출했고, 보일러병이 된 이본은 매일 아침마다 보일러에 기름을 가득 채워 두고 하루 종일 등반을 하다가 돌아오는 일상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이본이 1964년 제대하여 미국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암벽 등반이라는 연대의식과 동질감 하나로 한국에서 맺었던 선우중옥 씨와의 인연을 잊지 않았던 이본은 1971년에 선우중옥 씨와 그의 부인 선우영옥 씨를 미국으로 초대하여 그의 회사인 취나드 이큅먼트에서 인연을 이어나갔습니다. 각자의 조국을 빛낸 바위꾼들 사이의 의리와 인연이 서로의 인생에 서로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만든 것이지요.

▲ 톰 프로스트가 직접 개발한 크램폰의 모습입니다. 당시에는 결합 방식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졌다고는 하나 이는 오늘날 빙벽에서 사용되는 아이젠의 근간이자 모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70년대 초반까지 이본 취나드와 톰 프로스트가 설립한 취나드 이큅먼트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안정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대한 장애물 하나가 취나드 이큅먼트의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바로 이본이 초창기에 개발하여 당시까지도 회사의 주력 상품이었던 개량형 피톤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본래 피톤이라는 장비는 손도끼를 쓰듯 암벽에 찍으면서 등반하는 장비였는데, 이 장비가 요세미티 암벽에 생긴 틈을 계속 더 벌어지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암벽 등반가들에 의해 밝혀지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본은 사내 매출의 70%를 담당하던 개량형 피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큰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요? 다음 호에서 계속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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