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에서 잠들다…횡성 태기산 & 강릉 안반데기
설국에서 잠들다…횡성 태기산 & 강릉 안반데기
  • 글 사진 고요한 기자
  • 승인 2015.03.1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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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캠핑기

눈꽃은 없었다.
“없어. 여기에도 없어. 왜 나만 오면 사라지는 거야.”
연천 고대산, 홍성 오서산, 영주 소백산, 태백 태백산, 정선 함백산까지. 계속된 실패의 연속이었다. 겨울의 시작과 함께 떠났던 나의 ‘상고대 찾아 삼천리’는 번번이 허탕으로 막을 내렸다. 눈 소식이 없었던 고대산은 그렇다 해도, 날씨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떠났던 나머지 산들까지 제대로 살이 오른 상고대를 꺼내놓기 거부했다. 살점이 모두 발라져 앙상하게 가시만 남은 생선구이 같은 자태의 나무들만 득실거렸다. 희한하게도 내가 떠나는 날마다 한겨울이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따뜻했다. 아침 일찍부터 오른다고 했지만, 눈이 그치자마자 달려간다고 했지만, 눈꽃은 그곳에 없었다.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눈이 떨어지는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겨울의 후반기에 들어섰다. 본격적으로 영동지방에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1월 말이었다. 영동지방만큼 인심 좋게 눈이 내리는 곳이 없기에 그곳의 기상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드디어 영동지방 일대에 4일 연속으로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들려왔다. 옳거니. 때가 왔어. 눈이 그치는 날에 출발하는 2박 3일 간의 백패킹을 떠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눈꽃과 함께 잠들겠노라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단단히 다진 각오와 달리, 혼자 떠날 생각을 하니 심심해진 마음이 말랑거렸다. 외로운 여정을 방지할 요량으로 가끔씩 백패킹을 함께 다니는 대학 후배 마창(별명)에게 연락을 했다.

“야, 상고대 보러가자.”
“상고대가 어딘데?”
“어? 음…”

녀석은 상고대가 강원도 어딘가의 산자락인 줄 아는 백패킹 꿈나무였다. 나도 초보인데 생초보와 함께 겨울 여정을 함께 해야 하다니. 왠지 모를 걱정이 앞섰다. 동계 백패킹은 처음인 마창에게 준비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행선지를 알아보았다. 무리한 등산을 원하지 않는 녀석에게 맞추려고 하니 적합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미약한 정보량은 몇 안 되는 답안을 제시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려니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은 강원도 횡성의 태기산. 차로 접근이 가능하고, 경치 좋고, 눈꽃이 무럭무럭 자라난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풍력발전단지로 유명한 평창 선자령 일대보다 많은 풍력발전기가 뱅뱅 돌고 있는 산이기도 했다.

두 남자의 열망을 담은 눈꽃원정대
“형, 날씨가 왜 이래? 눈도 없어.”
“분명히 오후부터 맑아진다고 했는데. 눈은 어디 간 거야.”

여행은 불길함으로 시작됐다. 예보가 바뀌어 하루 먼저 눈이 그치고, 날이 풀린 것이다. 그간의 경험이 진하게 우러나와 날 불안함으로 적셨다. 역시. 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원주를 지나 횡성까지 다다랐지만 논밭에 얕게 깔린 눈이 전부였다.

아직은 영서지방이니 그럴 거라 위안 삼았지만 하늘까지 시무룩해 평정심 유지가 힘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랑 감정 있어? 태기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까 생각해봤다. 이제 와서 장소를 바꾼들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태기산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운이 좋아질 모양인지 태기산 들머리인 양구두미재에 가까워지자 눈꽃을 피운 나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좋았어!”
“와우!”
태기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산 아래를 달릴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산 아래라고 할 것 없이 유독 태기산 인근만 그랬다. 새하얀 눈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오동통한 상고대가 만원을 이뤘다. 나와 마창은 얼이 빠진 채 산을 두리번거리며 정상을 향했다. 헌데 그간 내린 눈을 증명하듯 도로가 얼어 있었다. 차가 도로를 타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았다. 안되겠다 싶어 중간에 차를 세우고 정상까지 걸어 올랐다. 눈꽃 행렬은 끝이 없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것을 하얀색으로 메우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듯했다.

천천히 걷고 있으니 눈 속에 있다는 생생함이 온몸으로 전달됐다. 불안했던 마음은 눈 위에 녹아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신명만이 남았다. 둘이 합쳐 칠순을 바라보는 두 남자는 어린애마냥 촐싹거리며 들뜬 발걸음을 옮겼다. 군부대가 있는 산 정상부는 상고대의 절정이었다. 정말로 빈틈없이 새하얬다. 날은 흐렸지만 시야가 나쁘진 않았다. 상고대와 함께 내려다보는 산 아래 풍경은 짧은 글로 표현이 어려울 만큼 속을 시원케 했다. 목을 얼얼하게 하는 맥주 한 캔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걷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여유를 부렸더니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세지 않아 시야가 트인 곳을 먼저 찾았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장소는 없었다. 그나마 평지가 있는 곳은 풍력발전기 밑이었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있기도 했지만, 풍력발전기 바로 아래에서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안전문제와 더불어 소음문제가 걸렸다. 풍력발전기가 돌기라도 하면 그 시끄러움은 밤새 잠을 쫓아낼 터였다.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눈 쌓인 숲에서 잠들어 보는 게 소원이기도 했기에 아쉬울 건 없었다. 무릎까지 우습게 잡아먹는 눈밭을 헤치고 텐트를 칠 만한 곳을 찾았다. 나무들이 온통 눈꽃 드레스를 입고 있어 진정한 설국에 왔음을 체감했다. 눈에 발목이 잡혀 뒤뚱거리는 몸을 힘겹게 가누며 최종 야영지를 선정했다. 만개한 눈꽃이 텐트를 감싸 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지는 자리였다.

야영지 구축을 위해 눈삽을 꺼내들었다. 삽은 하나였다. 그리고 가지고 온 텐트는 5인용짜리 알파인 텐트였다. 맹렬한 삽질이 예상되었다. 나와 마창은 서로 번갈아가며 불 같은 삽질의 진수를 선보였다. 군 제대 후 10년만이었다. 내 맘과 다르게 몸이 노화되었음에 깊은 탄식을 내뱉고는, 마치 지치지 않은 듯 눈을 펐다.

마창이 텐트를 펼치는 동안 야영지 주변을 정비하며 집 공사를 끝냈다. 팩은 제대로 박히지 않고, 바닥도 울퉁불퉁 했지만 훌륭했다. 풍경이 좋으니 모든 것이 좋았다. 적당한 타이밍에 약한 눈발이 나리기 시작했다. 눈을 맞아 사르륵 소리를 내는 텐트 속은 작은 랜턴 불빛을 받아 운치를 더했다. 두 남자는 인스턴트 저녁과 가벼운 술 한 잔을 친구로 소환하여 설국의 밤을 붙들었다.

표백제를 사방에 뿌린 듯 아침 숲속은 더욱 하얗게 변해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 눈꽃을 풍성하게 가꿔놓았다. 어제 벌어진 입으로도 충분히 턱이 아팠는데 아침부터 입이 다시 벌어졌다. 카메라를 들고 신들린 사람마냥 셔터를 눌렀다. 텐트가 사람이었다면 오만 포즈를 취해달라고 주문할 기세였다. 말 그대로 눈 숲에 파묻힌 아침이었다.

올 겨울, 아니 앞으로 겪을 수많은 겨울에서 이만한 설국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 더 머무르고 싶었다. 허나 우리에겐 가야할 길이 남아 있었다. 어제와 달리 미치도록 맑은 하늘이 가지 말라며 뒷덜미를 연신 낚아챘지만, 모진 마음을 먹고 태기산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 만남에도 설국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어제와 다른 그림을 만나다
둘째 날 목적지는 강릉 안반데기. 60만 평이 넘는 배추밭과 감자밭이 해발 1,100m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고랭지 채소밭이다. 미리 정하고 온 행선지는 아니었다. 즉흥적으로 가보지 않은 곳을 생각하다보니 떠올랐다. 태백 매봉산의 고랭지 배추밭과 귀네미 마을 고랭지 배추밭을 이미 봤기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는 예상됐다. 사방이 밭이다 보니 태기산의 눈꽃 숲과는 다른 사방이 트인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짐작했다. 이곳 역시 많은 눈이 내렸는지 마을입구를 2.7km 가량 남긴 진입로부터 길이 얼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배낭을 맸다. 적당한 야영지가 있을지 확실치 않아 3인용 텐트 하나로 집을 바꾼 후 마을로 향했다. 빙빙 도는 임도를 따라 걷기 시작한지 1시간째. ‘? ’ 모양의 배추밭이 펼쳐졌다. 예상대로 하얀 눈이 배추밭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대단한 규모에 또 한 번 입이 열렸다. 눈에 보이는 곳만 배추밭이 아니었다. 농로를 따라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이 밭이었다. 고랭지 배추밭을 처음 본다는 마창은 진심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이런 풍경은 처음이네. 태기산이랑은 완전히 다르다. 대박이야.”
“여기가 1,000m가 넘는다는 게 더 신기한 거지.”

수평으로 광활한 배추밭의 풍광은 수직으로 상고대를 만들어내던 나무들과는 다른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눈꽃 숲이 환상적인 느낌이라면 60만평의 밭은 장엄했다. 넓기도 했지만 밭의 경사도가 상당해 도대체 어떻게 배추를 심고 재배하는지 쉬이 그려지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이 넓은 곳을 맨 손으로 일구었을 화전민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오후의 해가 제법 기울어진 상황이라 터져 나오는 감동을 꿀떡꿀떡 삼켜가며 야영지를 찾았다. ‘멍에 전망대’라 쓰인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먼저 향했다. 제법 긴 오르막길을 낑낑거리며 올랐다. 안반데기는 물론, 백두대간 자락인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이 조망되는 훌륭한 장소였지만, 텐트를 칠만한 곳이 없었다. 지척이 모두 밭이었다. 하는 수 없이 풍력발전기가 있는 반대편 언덕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사가 있어서 그런지 등산한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언덕은 텐트를 칠 수 있을 만큼 평평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지 않아 삽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맘에 든 건 거침없이 트인 시야였다. 안반데기의 넓은 배추밭과 작은 마을 너머로 길게 이어진 산자락, 높은 하늘까지 한 눈에 들어 왔다. 전날 잠을 청했던 숲과는 다른 느낌이기에 더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나와 마창은 주저 없이 결정을 내리고 텐트를 쳤다. 어제보다 차가워진 공기였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견딜 만했다. 텐트를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저물었다. 맑은 날의 저녁은 많은 풍경을 건네주었다. 해질녘의 붉은 하늘, 반달이 밝히고 있는 짙푸른 밤하늘,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배추밭, 밝은 밤하늘을 비집고 나타난 별들까지. 얼어가는 손과 발이 내지르는 비명을 외면할 만큼 안반데기의 밤은 고즈넉했다. 다운부티와 다운바지가 없어 춥다는 이유로 오래 나와 있지 못하는 마창의 사정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만큼 놓치기 아쉬운 밤의 시간이었다.

모자랐던 식수로 새벽부터 갈증이 찾아와 일찍 눈을 떴다. 여명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홀로 눈밭에 나있는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따뜻하게 고개를 내미는 아침 태양의 온기를 받으며 걸으니 눈 속에 푹푹 빠지는 발걸음마저도 포근했다. 바지가 젖든 말든 눈밭에 주저앉아 눈을 떠먹기도 했다. 이대로 태양의 손길을 계속 받고 싶었다. 기분 좋은 고양이 마냥 ‘크르렁크르렁’ 거릴 것 같았다.

마냥 한적한 나와 달리 마창은 목을 찢는 갈증을 참지 못하고, 짐과 쓰레기를 챙겨 먼저 마을을 떠났다. 나는 바로 내려갈 수 없었다. 마음 정리가 되지 않았다. 30분 간의 여유를 더 부린 뒤에야 일어설 수 있었다. 눈은 이리저리 밟아 놓았지만 그 외에 다녀간 흔적은 남기지 않기 위해 꼼꼼히 주변을 살핀 후, 안반데기와 안녕을 고했다.

여행의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했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루만 더 있다 올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여행의 끝에서 매번 반복하는 일상이지만, 그토록 원했던 눈꽃을 만났던 여정이라 아쉬움을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겨울이 있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비집고 나오는 욕심을 억지로 구겨 넣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도로는 막힘없이 뚫려 있었다. 집이 가까워왔다.

※ 편집자 주 : 토요일 자정 마지막 독자 캠핑기가 도착했습니다. 0:00이라 적힌 시각에 바로 이 캠핑기, 눈꽃 찾아 떠난 고요한 님의 캠핑기가 배달되었습니다. 저희 취재팀도 1월에 상고대 찾아 소백산 갔다가 결국 못 보고 돌아왔는데, 저희와 달리 고요한 님은 끝내 환상적인 상고대를 보셨더군요. 고요한 님, 네, 저희 12월 호 ‘상식 씨의 캠핑 이야기’의 사진을 찍으셨던 분입니다. 내부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보일 우려가 많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원고와 사진의 수준을 기준으로 고요한 님의 캠핑기를 이달의 독자 캠핑기로 선정하였습니다. 고요한 님께는 MSR 엘릭서2 텐트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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