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고등어’의 텐트 이야기 | 노스페이스의 텐트 (상)
‘양식고등어’의 텐트 이야기 | 노스페이스의 텐트 (상)
  • 글 사진 조민석 기자
  • 승인 2014.10.28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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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이뤄낸 텐트의 혁명

텐트메이커 가루다와 낚싯꾼들의 이야기, 재밌게 읽으셨나요? 마냥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이 잠식해나가는 아웃도어 시장에서 짧고 굵은 획 하나를 남긴 브랜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모스와 가루다가 ‘짧고 굵은’ 선이었다면, 오늘 소개할 텐트메이커는 ‘길고 가는’ 선입니다.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그 선이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노스페이스의 텐트 이야기입니다.

▲ 아웃도어 메이커 노스페이스의 공동 창업주인 케네스 합 클롭의 모습입니다. 기업 경영 전문가답게 1990년대 말까지 약 30여 년간 아웃도어 메이커 노스페이스의 경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나간 인물입니다.

노스페이스가 텐트메이커라는 사실에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사실 노스페이스가 국내에 진출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텐트의 판매에는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게다가 애초에 텐트 제작을 주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브랜드도 아니다 보니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텐트 메이커로 노스페이스를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이유를, 지금부터 하나하나씩 풀어가보겠습니다.

등반가와 자본가가 만나다
196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등산용품점으로 시작한 아웃도어 메이커 노스페이스와 텐트는 실로 가깝고도 먼 관계였습니다. 처음으로 매장을 연 창업주인 더글라스 톰킨스(Douglas Tompkins)는 9살에 등반 학교를 졸업하였을 만큼 아웃도어 레포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지만, 학교라는 현실적인 틀에 자신을 맞추지 못한 채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로 암벽등반과 스키를 좋아하는 열혈 스포츠맨으로 전 세계를 떠돌며 20대를 보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가 창업한 노스페이스와 텐트라는 장비의 거리는 가까운 것처럼만 보입니다.

▲ 공동창업주 케네스 합 클롭의 제안으로 노스페이스의 텐트 제작 과정에 일원으로 참여하였던 세계적인 건축 디자이너 버크민스터 풀러입니다. 버크민스터 풀러는 1975년에 내놓은 노스페이스의 지오데식 텐트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공신력과 영향력을 한층 더 굳게 다졌지요.

이후 케네스 합 클롭(Kenneth ‘Hap’ Klopp)이라는 한 자본가의 투자 제안에 힘입어 매장의 규모를 대폭 확장하여 브랜드화시킨 이후에도 더글라스 톰킨스는 아웃도어 ‘장비’ 개발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노력은 세계 최초로 내한온도를 표시한 침낭 개발과 다운 점퍼의 원조격인 시에라 파카의 출시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더글라스 톰킨스는 케네스 합 클롭의 넉넉한 재정적 지원을 등에 업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단계에서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텐트였지요.

▲ 아웃도어 메이커 노스페이스의 공동 창업주인 더글라스 톰킨스의 모습입니다. 자본가인 케네스 합 클롭과 공동 창업주이기는 하나 실제로 경영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이 크게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난관 속에서 별다른 해답을 찾지 못한 더글라스 톰킨스는 제품의 방향성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됩니다. 바로 의류 산업이었지요. 이 덕에(?) 에스프리라는 여성복 메이커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를 계기로 더글라스 톰킨스가 종전부터 계속 시장에 선보이고 있던 내한온도가 표시된 침낭이나 시에라 파카의 생산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사실상 더글라스 톰킨스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장비를 추가적으로 창조해내는 일에 있어서 백기를 들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침낭이 있어도 텐트가 없으면 결국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당시 더글라스 톰킨스에게 있어서 텐트라는 아웃도어 장비는 일종의 한(限)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 때,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스폰서 케네스 합 클롭은 자체적인 텐트의 개발 없이는 전문성 높은 아웃도어 시장으로의 진출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며 뾰족한 수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끊임없이 방안을 모색하던 도중 비상한 두뇌를 가진 한 건축디자이너와 손을 잡기에 이릅니다. 그와 손을 잡은 것이 노스페이스를 텐트메이커로 만드는 분수령이 되었지요. 이제는 그 ‘천재 건축디자이너’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죠.

건축가, 텐트를 만들다
리처드 버크민스터 버키 풀러(Richard Buckminster ‘Bucky’ Fuller). 평생 발명가를 비롯하여 건축가, 엔지니어, 수학자 등 6개의 직업을 가졌던 것으로 인해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세상에 더 잘 알려진 그는 아웃도어 업계가 아닌 건축 디자인 업계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지요.

타고난 지능으로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부적절한 두 번의 행동으로 인해 퇴학 처분을 받고 난 후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직물 포장 공장과 고기 포장 공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그러던 중 결혼하여 낳은 딸은 설상가상으로 소아마비를 이겨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버리게 되지요. 게다가 중도에 장인과 함께 창업한 건축회사도 결국 문을 닫게 됩니다.

가정의 파산 앞에 서야만 했던 그는 사망보험금으로 무너지는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버크민스터 풀러는 그의 삶을 180도 바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내용은 5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대한 명언으로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 다이맥시온 프로젝트가 끝난 뒤 등장한 버크민스터 풀러의 대표작인 지오데식 돔입니다. 지름 4.3미터의 돔 구조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여 건설한 것으로, 이 구조물은 노스페이스의 지오데식 텐트 라인업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앞으로, 너는 너의 일시적인 생각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 너는 네 자신을 제거할 권리가 없다. 너는 너의 것이 아닌 우주의 것이다. 너의 중요성은 너에게 영원히 모호한 것으로 남아있겠지만 네가 만약에 너의 경험을 남들에게 특권으로 바꿈으로서 너 자신에게 그것을 적용시킨다면 만족할 것이라고 추측하게 될 것이다.’

이후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와 ‘소비되는 자원은 최소화하고, 효율성은 최대화한 지속 가능한 건축’이라는 모티프를 기반으로 발명가로서의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 이사오 노구치와 협업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은 다이맥시온 프로젝트(Dymaxion Project)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 세계의 건축 업계에 큰 족적을 남기기에 이릅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버크민스터 풀러는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이라는 구조물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돔은 반구형 지붕이나 천장을 뜻하는데 지오데식 돔은 삼각형 모양의 조각들을 모아 반구를 이룹니다. 삼각형의 변들이 서로 지지하며 튼튼한 구조를 만드는 이치입니다. 4.3미터의 지름을 가진 이 철골 구조물 역시 다이맥시온 프로젝트 못잖은 결실을 거두었지요.

▲ 케네스 합 클롭의 협업 제안을 수락하고 난 이후 텐트 구조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당시 버크민스터 풀러의 모습입니다.

텐트 구조의 혁명, 지오데식 돔

지오데식 돔 공개 이후 전성기를 맞은 버크민스터 풀러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 들어옵니다. 지오데식 돔 구조를 활용하여 텐트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 제안의 핵심이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텐트를 만들기 위해 지오데식 돔을 디자인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기에 그 제안이 아주 당황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제안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네, 케네스 합 클롭이었습니다. 더글라스 톰킨스가 아닌 케네스 합 클롭, 자본가의 마인드에서 그런 기발하고 독창적인, 그러면서도 간단명료한 아이디어가 나올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을까요.

▲ 버크민스터 풀러와 노스페이스의 텐트 제작 기술진의 노력 끝에 탄생한 노스페이스 최초의 텐트인 오벌 인텐션입니다.
▲ 지오데식 텐트 디자인의 일환으로 오벌 인텐션 모델과 함께 출시된 VE-23 모델입니다. 상대적으로 지오데식 돔 구조의 형태가 많이 희미해진 듯한 느낌입니다.

버크민스터 풀러는 잠깐의 고민 끝에 이 일을 수락하였고, 당시 노스페이스에서 텐트를 개발하기 위해 골몰히 노력하고 있던 기술진들과 버크민스터 풀러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제안이라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폴은 재질의 특성상 한 줄로 이어져야 하고, 꺾이는 부분도 최대 1곳 내지는 2곳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알파인 텐트를 한 번쯤 써보신 분들이라면 이 난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놀랍게도, 버크민스터 풀러와 노스페이스 사의 텐트 개발 기술진들은 1년 만인 1975년에 오벌 인텐션(Oval Intention)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스페이스 최초의 4계절용 텐트를 시장에 출시했습니다. 뒤이어 3계절용 텐트인 VE-23, 4계절용 텐트인 VE-24, 노스 스타를 세상에 내놓기에 이르지요. 물론 이들의 구조는 원안으로 삼았던 지오데식 돔에 비해 많이 다르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지나치게 단순하고 추상적이었기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케네스 합 클롭의 아이디어를, 그것도 1년 만에 현실로 옮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본가 케네스 합 클롭의 단순한 아이디어와 세계적인 건축 디자이너 버크민스터 풀러의 역작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침내 꽃을 피운 텐트메이커 노스페이스. 과연 그들의 향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호에서 그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오벌 인텐션에 비해 약 2년 정도 늦게 출시된 4계절용 텐트인 VE-24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차례의 개선을 거쳐 꾸준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 1979년도에 출시된 지오데식 텐트 시리즈의 마지막 모델인 노스 스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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