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온 연인
독일에서 온 연인
  • 글 사진 최상식 기자
  • 승인 2014.10.2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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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씨의 캠핑이야기

가을 들판에 억새가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어느 가을날 독일로 시집가서 오랜만에 한국으로 들어온 유영이와 그녀의 남편 로니를 제주에서 만났다. 수없이 스쳐간 많은 사람들 중에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덕분에 독일에서 긴 휴가를 받아 한국에 온 두 사람은 시간을 내 제주로 여행을 왔다. 그 둘을 만나 내가 꿈꾸는 로망 중의 하나인 유럽 캠핑 여행에 대한 궁금증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곽지의 꽃밥이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짧은 시간이나마 내가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제주의 가을 풍경을 보러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좋다고 했다. 김영갑 작가가 사랑했던 풍경을 만나러 평화로를 향해 출발했다. 왕따나무 부근에 차를 세우고 가을의 햇살이 들녘에 따뜻하게 번지는 느낌을 받으며 들판을 걸었다.

가까운 새별오름의 억새도 보러 갔다. 오름의 입구에 내려 하늘을 바라보니 억새가 넘실거리는 그 풍경 너머 하늘 위로 뭉게뭉게 구름들이 흐르는 것이 가을의 대지와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던지. 잠시 그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유영이가 로니의 선물이라며 잭나이프를 내게 내밀었다. 어릴 적부터 로니가 써왔다던 그 추억이 깃든 물건을 단지 몇 시간의 마음을 주었을뿐인 나에게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어떤 비싼 물건보다도 그 순간 내게 전하고자 했던 로니의 마음이 전해져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감흥이 여전히 기억 속에 오롯이 각인되어 있다.

억새들 사이를 걸어서 정상에 오르니 넓게 펼쳐진 대지와 주변부의 오름들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오름에서 내려와 즐거워하고 있는 두 사람을 위해 나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화로를 타고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억새들판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마침 억새들은 역광으로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데 날씨마저 좋았다. 문득 나도 모르게 다정한 키스를 부탁했고, 황금 억새를 배경으로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의 실루엣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로맨틱했다.

억새밭에서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차를 몰아서 석양빛의 잔영이 남아있던 한담해안으로 가서 그날의 마지막 풍경을 마음에 담아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유영이와 로니를 배웅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렀지만 짧았던 그 만남의 여운은 진했기에 가끔 우리는 페이스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가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자동차 키의 열쇠고리에 달고 다니는 그 잭나이프를 볼 때마다 언젠가 독일에서 유영이가 말했던 로니의 시골할머니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다던 알프스를 배경 삼아 캠핑하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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