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버 다이빙 | 수단 홍해 다이빙
스쿠버 다이빙 | 수단 홍해 다이빙
  • 글 사진 최성순 스쿠버넷(www.scubanet.kr)
  • 승인 2014.07.21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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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최고의 다이빙, 난파선 움브리아

유명한 수중촬영가 한스 하스(Hans Hass)가 세계 최고의 난파선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움브리아는 매우 보존이 잘 된 난파선이다. 이탈리아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던 날 움브리아는 포트 수단에서 35km 떨어진 곳에 가라앉았다. 갑판의 나무 데크만 세월에 삭아 없어졌을 뿐 침몰되었을 때의 화물과 배의 구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 움브리아 선체 내의 피자 오븐이다.

움브리아는 1911년 12월 30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바이아블랑카란 이름으로 진수됐다. 2개의 6기통 증기엔진으로 구성된 2층 증기선인 움브리아는 최고 14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승객 2000명, 화물 9000톤을 탑재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길이는 153m, 너비는 18m다.

▲ 키리 리프 절벽의 크랙과 다이버.
1912년에 취항해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던 움브리아는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억류됐다. 이후 1935년에 이탈리아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매입하면서 움브리아로 이름 붙이고 군수송선으로 개조했다. 다시 2년간 수천 명의 군인들을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로 수송하는데 사용하다 1937년에 트리에스티노 라인에 팔렸다. 이후 움브리아는 이탈리아와 지중해 및 홍해 연안의 다양한 항구에 취항됐다.

1940년 5월이었다. 움브리아는 36만톤의 폭탄, 60박스의 기폭장치 등 총 6600톤의 화물을 탑재했다. 1940년 6월 3일 포트 세이드에 도착했지만 영국해군이 출항을 막다가 6월 6일에 출항을 허락했다. 하지만 영국 군함 HMS 그림스비가 따라붙었고 포트 수단 가까이 왔을 때 그림스비가 움브리아를 정박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영국 전함 HMS 레안드로스가 도착했고 20명의 해군이 움브리아에 올라타고 밀수품을 찾는다고 배에 계속 남아 있었다. 6월 10일 새벽 움브리아의 뮈에산 선장은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배에 실린 폭탄 등 군수품이 영국 해군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될 것을 우려한 선장은 영국 수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배를 스스로 침몰시켰다. 전후 영국의 폭탄처리 전문가들은 움브리아에 선적된 폭탄이 만약 폭발했다면 포트 수단의 절반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엄청난 양이라고 말했다.

움브리아에서는 3회의 다이빙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선셋에 입수한 야간 다이빙과 마지막 날 오전에 진행한 2번의 다이빙이었다. 테크니컬 다이버인 안드로메다의 가이드 티보(Tibor)는 다이버들이 움브리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안내해 주었는데 첫 선셋 다이빙에서는 움브리아의 외관을 보면서 다이빙할 수 있었고 다음 날에 진행한 2번의 데이 다이빙에서는 난파선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 6기통 증기엔진 중의 하나를 둘러보고 있다.
▲ 사압집나 절벽의 연산호와 안티아스 무리들.

선셋 다이빙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는 어느 정도 빛이 있어서 난파선의 웅장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선미에서 입수해 수심 20m 근처에 있는 거대한 프로펠러를 구경하며 촬영을 진행했다. 비스듬하게 기운 갑판 쪽을 보면서 선수 쪽으로 이동하다가 외부로 노출된 화물 칸에서 탄약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길이 155m의 꽤 큰 난파선을 선미에서부터 선수까지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결국 선수까지 가지는 못했다. 금방 물속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가능하면 얕은 수심을 유지하면서 마스터와 다빗 등의 외부 구조물과 그곳에 부착된 생물을 구경하고 다이빙을 마쳤다.

다음 날 진행된 데이 다이빙에서 본격적으로 움브리아의 내부를 탐사할 수 있었다. 폭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화물창, 수많은 와인병도 볼 수 있었고 3대의 승용차가 그대로 남아있는 화물창도 볼 수 있었다. 티보는 좁은 곳은 2명만 대동해 들어갔다가 교대로 다이버들을 안내하는 등 안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 카디널 피시가 무리지어 있는 곳에서 사브레 피시가 먹이를 노리는 모습.

2개의 6기통 증기 엔진이 있는 엔진룸, 대형 피자 화덕 그리고 거대한 가마솥이 있는 주방, 현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복도를 지나 레스토랑까지. 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여기저기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난파선 통과 다이버 교육을 받지 않은 다이버도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군데군데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창이 있었고 가이드가 안내하는 곳만 돌아다니는 것이라서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테크니컬 다이버라면 좀 더 아래 칸에 있는 여러 공간을 탐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티보 역시 테크니컬 다이버로 캐이브와 렉 다이버로서 자격 있는 다이버가 요청한다면 난파선 통과 다이빙 가이드도 가능하다고 했다.

움브리아에는 수중사진을 촬영하기에 좋은 곳이 많았다. 현창을 통해 빛이 일렬로 들어오는 복도와 레스토랑이 특히 사진을 촬영하기에 좋았다. 또한 글라스피시로 가득한 공간, 블루스트라이프드 스내퍼가 떼를 이루고 있는 방향타 아래 공간, 그리고 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형 프로펠러 등은 굳이 난파선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서도 촬영할 수 있었다. 리버보드 트립 마지막 일정으로 움브리아 다이빙을 잡아 놓은 것은 탁월한 선택으로 참가한 다이버들 모두 만족감이 매우 높았다.

▲ 레스토랑에는 엄청난 규모의 와인병이 쌓여있었다.
▲ 복도를 따라 열 지어 뚫려있는 현창으로 조명이 들어와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이빙을 모두 마치고 포트 수단으로 돌아온 일요일 오후에는 3시간 정도의 육상관광을 다녀왔다. 포트 수단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수아킨은 중세 시대에는 아랍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주요 항구였다. 또한 인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상선이 쉬어가는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가 개발된 이후로 수아킨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수에즈 운하가 완성된 이후로는 영국이 수아킨을 재건하기 보다는 포트 수단을 개발하면서 잊혀진 항구가 됐다. 수아킨이 번성했던 시절에는 산호초로 만든 건축물이 더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전쟁으로 모두 파괴된 듯한 건물이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면서 건물의 뼈대와 흔적만이 남아 있다. 가이드에 따르면 이집트 은행과 터키의 원조를 받아 수아킨의 옛 항구도시를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

▲ 움브리아 난파선의 선미다.
▲ 거대한 크기의 프로펠러.

수아킨 관광에는 포트 수단의 재래시장 구경도 포함돼 있는데 사막 도시답지 않게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거래되고 있었다. 멜론이나 오렌지 등의 과일을 1kg에 3000원 남짓에 살 수 있다. 그 외 가이드가 기념품 가게 같은 곳을 안내했지만 살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수아킨 관광은 재래시장 등의 관광을 포함해서 왕복 차량 이용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됐고 비용은 1인당 30유로였다.

수단을 처음 방문하는 경우라면 한번 가볼 만하겠지만 효용에 비해 비용은 비싼 편이었다. 보트 스태프의 안내로 저녁에 항구 주변을 돌아보는 정도로 수단을 경험하는 것이 저렴하면서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 포트수단 부두의 패각 공예품들.

▲ 포트수단의 재래시장. 의외로 싸고 싱싱한 과일이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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