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packing |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② 걷기
Backpacking |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② 걷기
  • 글 서승범 기자 | 사진 엄재백 기자
  • 승인 2013.07.1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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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계곡의 선비놀이…거연정~농월정 6km

▲ 동호정 바로 앞에 위치한 소나무 군락지. 크지 않은 숲이지만 분위기는 사뭇 울창하다.

조선시대 산수화에 나옴직한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일단 산과 물이 있어야 하고, 그 풍경 어디쯤에 정자가 있으리라. 기왕 흐르는 물이라면 곳곳에 커다란 암반이나 돌이 있어 풍취를 더해야 하고, 물가에는 소나무가 있어야 산수화의 격에 맞을 것이다. 상상하기 어렵다면 함양 화림동 계곡을 찾을 일이다. 쉽게, 산수화 속 선비가 되어 길을 거닐고 물과 노닥거릴 수 있다.

지리산과 장안산 그리고 덕유산을 배경으로 두른 함양은 서울에서 약 300km, 차로 4시간 정도 달려야 닿을 수 있다. 조선시대였다면 750리 길이다. 한 시간에 10리를 간다고 치면, 꼬박 75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다. 하루 5시간, 거리로는 20km씩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야 보름 걸린다. 중간에 산 넘고 물 건널 생각까지 하면 한 달은 너끈히 걸리겠다. 과거시험 보러 길 떠나는 선비는 생각과 글도 높아야 하지만, 체력도 제법 좋아야 했다. 그래야 과거시험장에라도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니.

▲ 멀리 산을 배경으로 삼고, 앞으로 기암괴석을 거느린 거연정.
▲ 데크의 얼룩을 장식한 건 산뽕나무 열매인 오디.

▲ 선비문화탐방로에서 자주 만나는 데크 탐방로. 덕분에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지친 몸 달래는 풍류
하동이나 함양에서 과거길에 나선 선비가 처음 만나는 고비는 덕유산 자락이다. 넘는 길은 함양과 장수의 경계인 육십령. 높다란 고개를 앞에 두고 한숨 돌리고 가는 곳이 화림동 계곡이다. 화림동 계곡은 남덕유에서 흘러내린 물이 흐르면서 모여 이룬 계곡이다. 계곡에는 너른 암반과 기암괴석이 많아 풍류를 즐기기에 좋다. 풍류를 즐긴다 함은, 물과 돌이 어우러진 계곡을 보고 즐긴다는 뜻이고, 계곡에 들어 바위에 글을 새기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뜻이고, 때로는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조용히 물러나 자신을 돌아보며 은거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화림동 계곡에는 그 시절의 정자와 글씨가 남아 있고, 은거의 흔적이 전한다.

선비문화탐방로는 화림동 계곡을 따라 이 정자들을 둘러보는 코스다. 총 10km 남짓 이어지지만, 우리는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6km만 걷기로 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조선 중기에 지어진 정자들은 저 거리 안에 모두 있기 때문이고, 실질적인 이유는 그 옛날 화림동 계곡에서 과거는 잠시 잊고 더위를 식히던 선비들처럼 마감은 잠시 잊고 유유자적 놀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날씨도 삼복을 무색케 할 정도였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냥 노는 거다.

함께 놀이에 나선 이는 손혜진 작가와 전영순 문화관광해설사다. 오랜 시간 명상을 공부하고 글을 써온 손혜진 작가는 코스 이름을 듣고 잠시 ‘검색의 시간’을 갖더니 바로 합류를 결정했고, 선비 문화에 문외한인 까닭에 함양군에 요청해 전영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셨다. 푸른 하늘과 하얀 돌, 그 위를 흐르는 물이 잘 어울리는 곳에 위치한 거연정, 탐방로는 거연정에서 시작됐다.

▲ 물이 많을 때는 저 돌의 대부분이 잠기기도 한다. 지금은 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 동호정을 400m 앞둔 지점의 이정표. 여기서부터 동호정까지가 아기자기하고 좋다.

재야의 문화를 만든 누정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을 길러내던 양반의 고장은 안동과 함양이 대표적인데, 서울에서 보기에 안동이 왼쪽, 함양이 서쪽에 있다는 뜻이다. 좁은 땅에서 굳이 안동과 함양을 나눈 건 기질의 차이 때문이다. 안동이 전통적으로 집권세력을 많이 배출했다면, 함양은 이른바 재야의 선비들을 길러낸 고장이다. 이런 성향이 누정을 지어 올렸을까, 골마다 들어선 누정이 권력보다 자연을 지향하는 성향을 길렀을까.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잘 어울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길은 때로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되 숨을 턱까지 밀어 올리진 않는다. 그건 선비답지 못하니까. 그저 배낭 아래로 뒷짐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으면 된다. 거연정에서 얼마 안 가 군자정을 만난다. 개별 정자에 대한 설명은 몇 쪽 뒤에 탐방로를 설명하면서 하겠지만, 거연정은 자연에서 도드라지고 군자정은 자연 속에 숨어 있다. 동호정 역시 화려한 단청과 높이 솟은 모양새로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렇듯, 함양의 누정은 자연 속에 얹은 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중요시하기보다, 자연을 감상하기 좋은 곳에 만들어져,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관리하는 인간의 위치를 보여준다. 선악이나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의 문제일 뿐이다.

▲ 조붓한 숲 속 산책로를 연상시키는 탐방로. 그늘이 좋은 곳은 그리 덥지 않다.
▲ 함양의 오랜 누정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전영순 해설사.

▲ 선비문화탐방로의 나무들은 이제 막 신록을 벗고 녹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량이 되리라’ 먹었던 마음은 ‘만나는 정자마다 취(取)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출발점의 거연정은 눈으로만 감상하고 떠났고, 군자정은 상가와 이웃해 운치가 떨어져 지나쳤다. 그리고 만난 동호정. 동호정 앞에는 시 몇 수는 족히 적을 만한 너럭바위가 있다. 차일암이다. 해를 가릴 정도로 너른 바위란 뜻이다. 차일암에는 영가대, 금적암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했다는 뜻이다. 그 사이로 곳곳에 작은 홈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저 홈에다 술을 부어두고 입을 대고 마셨다고 해요. 그렇게 마시면 술이 더 달았나 봐요.” 전영순 해설사의 말이다. 물길 따라 잔을 돌렸다던 신라의 포석정보다 한 술 더 뜬 경지다.

▲ 동호정 지나 만나게 되는 경모루.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담백한 운치가 제법 좋다.

▲ 숲을 잠시 벗어나 돌다리를 건너고 있다.

여름 계곡의 ‘선비놀이’
동호정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우리가 즐길 만한 진짜 ‘선비놀이’는 탁족일 텐데, 탁족은 농월정 앞 계곡이 으뜸이라는 전영순 해설사의 말에 따른 것이다. 놀이를 제대로 즐기려면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길은 잠시 계곡을 벗어나 마을과 산 속을 헤집다가 다시 계곡을 만난다. 마을에서는 양파 수확이 한창이고, 산에는 밤꽃이 한창이다. 함양 양파는 게르마늄 많은 땅에서 난 까닭에 당도와 강도가 좋아 상품성과 저장성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양파를 캐고 담는 이들은 객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진한 밤꽃 향기는 그저 어느 짓궂은 선비의 장난이려니 하고 빠르게 통과.

동호정에서 30분 남짓 걸으면 ‘풍덩 빠져봤으면’ 싶은 계곡이 나온다. 농월정에 거의 다 온 거다. 농월정은 사실 관심 밖이다. 이름만으로 보면 가장 ‘한량스러운’ 이름이지만, 2003년 10월에 화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계곡은 시원한 물소리로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물로 뛰어들었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두 사람. 때론 대화가 오가고 때로는 혼자만의 걸음에 집중하며 길을 걷는다.

▲ 트레킹을 서둘러 마치려고 하면 이런 풍경 놓치기 십상이다. 걷든 보든, 천천히 하는 게 좋다.

그날 저녁, 농월정 터 뒤에 있는 야영장에서 손혜진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 말씀을 재미나게 들으면서 막 웃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나란히 걸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각자의 걸음에만 집중하게 되잖아요. 내가 걷는 길과 그 길을 걷는 나만 존재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참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조선의 선비가 읊던 풍월과 손혜진 작가가 느낀 평화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 ‘풍월’이 ‘청풍명월’의 줄임말이든, ‘음풍농월’의 줄임말이든, 그 간격은 그리 넓지 않다.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걷고도 남는 선비문화탐방로를 댓 시간에 걸쳐 천천히 완상(玩賞)하는 일은 그 간격을 좁히는 첫걸음이다.

▲ 데크길과 마을길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탐방로. 하지만 경사는 계속 평탄하다.

▲ 동호정에서 너럭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있는 전영순 문화관광해설사(왼쪽)와 손혜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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