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일러닝|일등도 꼴찌도 없는 달리기, 놀면서 달려라
트레일러닝|일등도 꼴찌도 없는 달리기, 놀면서 달려라
  • 글 사진 유지성 본지 아웃도어 자문위원·오지레이서
  • 승인 2013.06.11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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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4~7번 코스…소풍처럼 마라톤처럼 달려

▲ 해안도로변에서 즐겁게 뛰어오르는 참가자들.

독자 여러분은 혹시 ‘마라닉’을 아시는지? 마라닉은 일본의 야마니시 테츠로 교수가 만들어낸 신조어로 ‘마라톤+피크닉’의 합성어다. 즉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적당히 달리는 아웃도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야마니시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기록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함께 달리고 있는 사람과의 대인관계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 자신의 능력만큼 달리는 순간순간을 즐기기 위해 마라닉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 걷기를 포함한 ‘슬로 라이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슬로 라이프에 부합하는 마라닉을 트레일 러닝과 접목 시켜 행사를 진행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 새벽 4시에 출발한 이번 대회는 새벽 제주의 고즈넉함을 즐기기 좋았다.

뜨거운 관심 속에 17명 참가

필자가 운영하는 트레일 오지레이스 커뮤니티인 런엑스런(www.runxrun.com)에서는 5월 10일~12일까지 2박 3일간 제주도 올레길에서 마라닉 개념을 도입한 트레일 러닝 힐링 캠프 ‘런엑스런 트레일러닝 캠프 아이 부럽지 in Jeju’를 개최했다. 총 길이 60km의 제주 올레길 4~7번 코스를 걷고 달리며 낭만적인 제주의 풍경을 두루 경험할 수 있었던 이번 행사는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코스를 완주하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룰로 진행됐다. 달리기, 걷기는 기본이고 심지어 자전거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도 상관없는 그야말로 규칙 없는 레이스인 것이다.

▲ 첫날 모임에서 마음껏 먹었던 무한리필 돼지두루치기. 일반 마라톤대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 이번 행사는 이동 방법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자전거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허용했다.

처음 시도하는 동호회 자체 행사다 보니 11명으로 모집인원을 제한했다. 그런데 막상 행사 발표를 하고 보니 예상 외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가를 원했다. 공지 직후 회원들이 신청과 동시에 참가비를 송금하는 통에 겨우겨우 17명으로 참가자를 제한할 수 있었다.

5월 10일 오후, 참가자들은 제주 올레 4번 출발지인 ‘커피가게쉬고가게’로 집결했다. 참가자 등록과 확인이 끝난 후 표선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돼지 두루치기 집 광동식당에서 본 행사의 서막이 올랐다. 이곳의 특징은 1인 6,000원에 돼지고기가 무제한으로 나온다는 것. 달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식성이 좋다. 우리들의 먹는 양을 보더니 친절한 사장님께서는 놀라는 듯 하면서도 계속 고기를 내어 왔다. ‘그래 얼마까지 먹을 수 있는지 한번 먹어봐’라고 말하는 듯 했다.

▲ 달리는 폼도 의상도 제각각이다.

참가자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고 장소를 옮겨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이번 행사는 대회가 아니다. 절대로 빨리 달릴 생각 말고 최대한 제주를 즐기고 느끼는 시간을 가져라. 골인 지점에 일찍 도착해도 입장 할 수 없다. 그러니 그때까지 놀던지 자던지 자유니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 등등. 일반적인 대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칙들을 계속해서 공지하니 미리 행사 내용을 숙지한 참가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15시간의 자유…할랑할랑 제주를 만끽하다
5월 11일 새벽 4시, 국내 최초의 마라닉 행사가 시작됐다. 제주의 고요한 밤과 새벽을 느끼며 달릴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제주의 새벽에서 만나는 건 자신의 발소리와 어둠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는 도시인이 언제 또 고요의 바다에 빠져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 없이 살고 있다. 힐링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을 만나는 솔직함으로부터 시작되는데도 말이다.

▲ 계단을 달리며 오르는 참가자들.
▲ 제한시간이 15시간인 만큼 맥주정도의 음주를 즐기는 참가자도 있었다. 일반적인 규칙은 모두 무시한 자유로운 달리기였다.

총길이 60km의 이번 행사는 15시간으로 제한했다. 42.195km 마라톤 풀코스의 제한시간은 보통 5시간이다. 그런데 15시간? 제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규칙이다. 그러나 등수를 매기는 대회가 아니라 참가자 모두가 달리는 순간과 나를 둘러싼 풍경을 즐기는 행복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반드시 그 룰을 적용시키고 싶었다. 1등보다 꼴찌에게 더욱 큰 박수와 칭찬을 보내는, 모두가 함께 대접 받는 그런 멋진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죽기 살기로 달리던 선두권 참가자들의 행동에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찾아왔다. 어차피 일찍 도착해도 골인을 안 시켜준다는 생각이 드니 쉬다 가자, 천천히 가자, 먹고 가자, 낮잠 자고 가자 등 그동안 갇혀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의 작은 변화는 차츰 커다란 변화로 이어졌고 그동안 잊고 있던 행복 찾기로 목표가 바뀌는 참가자가 점차 늘어갔다. 평소 대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이 차츰 익숙해졌고 결국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즐기며 뛰는 자신을 발견하는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 자신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대회가 아닌 만큼 쉬엄쉬엄 걷는 참가자도 많았다.

▲ 있는 힘껏 뛰는 참가자가 있는가 하면 뒤에서 찬찬히 걷는 참가자도 있었다. 순위를 매기지 않으니 어떻게 뛰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1분 1초를 쪼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아웃도어 활동은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시간이 있어야만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 같은 체험으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 성공의 개념도 조금은 수정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규칙은 과감히 버리고 즐겁게 뛰어보자. 느긋하게 도착한 골인지점에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가슴 벅찬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 올레 4번 출발지인 ‘커피가게쉬고가게’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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