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산길 ㅣ 정선 민둥산
걷고 싶은 산길 ㅣ 정선 민둥산
  • 글 사진 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2.11.1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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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머리 초원 능선의 은빛 유혹

▲ 민둥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온통 황홀한 억새밭이다. 초록에서 흰색으로 변하는 억새의 색감이 오묘하다.

가을은 인정 많은 나그네다. 인간 세상에 잠시 머물던 가을은 농부에게 풍요로운 곡식을 안기고, 산꾼에게는 단풍과 억새를 선물한다. 단풍은 그 화려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때론 들뜨게 하지만 억새는 차분하게 가라앉혀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억새는 청순하고 가냘파 보여 안쓰럽지만, 깨끗한 흰 꽃이 햇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빛난다. 파란 하늘 아래 바람이 불 때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산들바람에도 온 초원의 그 많은 억새가 한꺼번에 서걱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아리랑의 고장’ 정선의 민둥산은 창녕 화왕산, 장흥 천관산, 포천 명성산, 밀양 사자평 등과 더불어 국내 5대 억새 군락지로 손꼽힌다.

20만 평의 광활한 정상부 억새밭
나무가 없어 민머리처럼 보이는 산을 흔히 민둥산이라 부른다. 정선의 민둥산 역시 나무가 없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곳에는 억새가 무진장 많다. 산나물이 많이 나게 하려고 인근 주민들이 매년 한 번씩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억새에 얽힌 일화도 있다. 옛날에 하늘에서 내려온 말 한 마리가 마을을 돌면서 주인을 찾아 보름 동안 산을 헤맸는데, 이후 나무가 자라지 않고 참억새만 났다고 전한다.

민둥산의 등산로는 기차가 서는 증산면 민둥산역을 기점으로 오르내리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정상으로 이어진 주릉을 중심으로 왼쪽 완경사 숲길, 오른쪽 발구덕마을을 거쳐 오르는 길로 나뉜다. 그래서 코스는 증산초교~완경사 숲길~민둥산 정상~발구덕마을~증산초교 원점회귀가 가장 좋다. 운치 있는 낙엽송길, 억새 초원, 구덩이를 여덟 개 가진 옛 강원도 산촌 발구덕마을을 모두 보기 때문이다. 거리는 7㎞, 3시간 30분쯤 걸린다.

산길은 증산초교 바로 앞 등산로 안내판 옆길로 시작한다. 200m쯤 오르면 완경사와 급경사길이 갈린다. 완경사는 왼쪽 산비탈을 타고 돌아 능선을 만나고, 급경사는 곧장 능선으로 올라붙는 길이다. 대개 사람들은 거리는 좀 멀지만 길이 순한 완경사를 택한다. 초반 가파른 오르막만 지나면 산비탈을 타고 도는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서늘하면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은 낙엽송 사이 휘휘 둘러가는 맛이 일품이다. 잠시 고개를 힘껏 뒤로 제치고 우듬지를 바라본다. 그곳 꼭대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이 있는 듯하다.

슬슬 힘이 들다 싶을 때쯤 임도에 자리한 매점을 만난다. 여기서는 간단한 라면과 과자 등을 팔기에 오르내리며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발구덕마을에 이른다. 여기서 임도를 가로지르는 등산로를 따르면 그윽한 숲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그러다 점점 시퍼런 하늘이 보이면서 조망이 열린다. 능선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몇 그루 지나 조망 데크에 오르자 강원도의 산들이 빚어내는 첩첩 산그리메가 일필휘지로 펼쳐진다. 콩콩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소 등허리같이 평탄한 능선에 올라붙는다. 능선은 온통 억새밭이다. 키 큰 나무는 저 위 능선에 선 서너 그루가 유일하다. 민둥산 정상까지는 걷는 것이 아니라 억새 물결에 휩쓸려 저절로 닿게 된다.

부드러운 능선 끝에 자리한 정상은 부드럽게 손짓하고, 뒤를 돌아보면 억새 물결 사이로 멀리 두위봉이 우뚝하다. 한걸음 발자국을 떼는 걷기 아까운 길이다. 민둥산 정상에는 거대한 정상석이 서 있었고, 주위는 말끔한 데크와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잠시 데크에 드러눕자 시퍼런 하늘이 쏟아진다. 오랫동안 누워 있으면 마치 하늘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다.

▲ 소 등허리 같이 평평한 능선이 온통 억새 물결로 출렁거린다.

다른 행성에 온 착각 불러일으키는 발구덕
민둥산 정상부의 억새밭은 약 20만 평으로 광활하다. 억새도 장관이지만, 정상 뒤쪽에 음푹 패인 지형인 발구덕의 모습은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처럼 신비롭다. 발구덕은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 지반이 둥글게 내려앉는 특이한 카르스트 지형인 돌리네(doline)를 말한다. 돌리네는 이곳 말로는 ‘구덕’이다. 그런 구덩이가 여덟 개라 하여 ‘팔구덕’이라 부르다가 ‘발구덕’이 된 것이다. 석회암 지대라서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으면서 깔때기 모양으로 웅덩이가 팬 것이다.

정상에서 하산은 정상석 뒤편으로 이어진 ‘발구덕’ 이정표를 따른다. 왼쪽으로 이어진 능선길은 지억산(1,116.7m)을 거쳐 화암약수로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면 발구덕 거대한 구덩이 안으로 들어서는데,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다. 여기서 급경사를 내려오면 윗발구덕이고, 임도를 타고 좀 내려서면 성황당과 거북 모양의 샘터가 있는 아랫발구덕에 닿는다. 성황당 앞에는 조각이 제법 섬세하고 표정이 해학적인 장승이 여럿 세워져있다.

장승 앞에서 산비탈을 타고 도는 숲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인적 뜸한 호젓한 길을 걷다보면, 올라오면서 만나던 급경사 갈림길과 합류한다. 갈림길에서 증산 시내를 한번 굽어보고 내려오면 증산초등학교 앞이다. 이렇게 민둥산 걷기는 정상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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