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 잡설 ㅣ 설렁탕과 소스
태양의 요리사 음식 잡설 ㅣ 설렁탕과 소스
  • 글 박찬일 기자
  • 승인 2012.09.13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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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끓이면 왜 뽀얀 국물이 나오지 않을까

▲ 웬만한 등심 가격과 맞먹는 비싼 한우 사골은 한국만의 독특한 보양문화다.
물의 골수를 우려내는 요리법은 인간의 요리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바는 아닐 터.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끓여야 뼈에서 골수를 얻을 텐데, 정착생활을 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골수가 이토록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게 분명하고.

생각해보면, 설렁탕과 소스는 같은 음식이다. 요리를 공부한 사람이야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좀 엉뚱한 말이겠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다. 자, 그 얘기로 들어가 보자.

한국의 미주 이민 초창기이던 1970년대, 한국인은 정육점에서 손쉽게 설렁탕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소뼈를 오래 고아 먹는 요리 문화가 드물었던 데다가, 쇠고기가 대량 공급되면서 소뼈도 아주 흔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나는 어떤 유학생의 수기를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밤새워 공부해도 끄떡없는 미국 학생들과 경쟁하기 위해 소뼈를 얻어다가 버터를 넣고 고아 먹었다는 내용이었다.

고기로 국물을 내는 서양 요리
소뼈가 귀했던-물론 지금도 금값이지만-당시에 나는 그 글을 읽으며 괜히 침을 흘리며 부러워했다. 그렇지 않은가. 사골곰탕이 거저라는데. 그 유학생은 고생담의 한 일화로 거론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 비싼 소뼈가 거저라는데 눈길이 갔다. 만약 한국도 그렇게 소뼈가 거저였다면 불량 설렁탕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소뼈 함량이 턱없이 부족한 설렁탕이 시중에 많이 팔렸다. 물론 지금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과거에는 더 심했다. 수입 사골이 들어오기 전에는 말이다. 한우의 뼈는 정말 비쌌고 지금도 비싸다. 어떤 백화점에서 보니 우족의 값이 웬만한 등심 값을 뺨쳤다.

외국인이 보면 정말로 이해가 안 될 가격이었겠지만 한국인은 수긍할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만의 보양문화가 이처럼 독특하다는 뜻이다. 사족이지만 사골은 사골(四骨)이라는 뜻으로, 소의 네 다리뼈를 말한다.

그러니까 등뼈와 여러 잡뼈를 마트에서 사골이라고 파는 것은 정확하게 보면 틀린 말이다.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 집에서는 사골을 그토록 오래 끓여도 사먹는 것처럼 되지 않을까. 하얗고 뽀얀, 마치 우유를 농축해 놓은 듯한 국물이 나오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는 그래서 밤새 며칠을 고았지만 아버지들이 원하는 그런 국물을 얻을 수 없었다. 뭐랄까, 아무리 팔팔 끓이고 은근히 고아도 반투명하고 두툼하지 않은 국물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사골의 결과물이다.

사먹는 설렁탕에는 상당수가 별도의 ‘요리법’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에 이 설렁탕집들의 ‘장난’이 보도되자 한때 난리가 났다. 이내 우리는 잊어버렸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골로는 그처럼 뽀얀 국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물리적 사실 말이다.

서양에도-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요리의 원조격인 나라들-사골을 진하게 끓인 요리가 있다.

물론 그것이 설렁탕은 아니다. 대개는 사골로 소스를 만든다. 서양에도 국물요리는 있다. 아주 다양한 종류와 방법들이 있어서 한 마디로 말하긴 뭣하지만, 스프가 그것이다. 그런데 대개는 소의 고기를 끓여서 국물을 얻는다.

그래서 맑고 부드러운 국물을 얻는다. 서양에서도 물자가 부족하던 과거에는 동물의 뼈를 곤 음식을 꽤 먹었다. 그러나 고기가 흔해지고 요리가 고급화하면서 그 음식을 ‘다른 방법’으로 먹게 된다. 소스가 바로 그것이다.

소뼈와 채소를 태워 얻는 진한 소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요리의 소스, 특히 스테이크 요리의 소스는 바로 푹 곤 동물의 뼈(대개는 소나 송아지)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 훌훌 들이마시는 민중의 요리에서 점차 구운 고기의 맛을 더해주기 위한 소스로 변해갔던 것이다.

고기가 흔해지기 전, 소뼈를 푹 곤 소스는 왕궁이나 귀족들의 상에 오르는 사치스러운 음식에나 곁들여졌다. 서양 대중이 먹음직스러운 구운 고기에 포도주와 소뼈, 허브를 푹 졸여서 얻은 소스를 쳐서 먹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것이다. 그전에는 고기를 얻으면 그저 소금을 치거나 기껏해야 굽거나 삶을 때 생긴 국물을 졸여 끼얹어 먹었다.

송아지뼈와 고기를 푹 고아서 얻은 소스를 보통 퐁 드 보라고 한다. 그런데 퐁 드 보는 아직 소스가 되기에는 너무 묽은 정도다. 요리에 맛을 더하기 위해 치는 진한 국물 정도의 농도를 말한다. 좀 더 진한 것은 데미 글라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진득한 물엿 같은, 우리가 스테이크를 먹을 때 나오는 소스의 농도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졸여서 글라스 드 비앙드를 얻는다. 이는 프랑스 용어이지만 이탈리아의 현대 요리도 비슷한 이름으로 부르며 만들어 쓴다. 물론 프랑스보다 진한 소스를 훨씬 덜 쓰기는 하지만.

어떤 이는 묻는다. 사골로 끓이는 설렁탕은 색깔이 뿌연데, 소스는 왜 그리 시커멓게 나오느냐고. 그게 어떻게 같은 계통이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소스는 별도의 과정을 거친다.

바로 소뼈를 태우는 과정이다. 진한 소스의 색깔은 확실히 식욕을 돋운다. 그래서 요리사들은 소뼈는 물론이고 함께 넣는 채소들(당근과 양파, 샐러리 같은)도 태워 넣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진한 국물은 몇 번의 과정을 더 거쳐야 비로소 고급 소스가 된다. 포도주를 넣거나 향기로운 버섯을 첨가하기도 한다.

온갖 향신료와 허브로 다른 맛을 표현하기도 한다. 다채로운 서양 요리의 바탕에는 소스가 있고, 그 바탕에는 다시 소뼈가 있다는 사실. 알고 보면 참 인간의 하는 일이란 뻔한 것이기도 하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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