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ㅣ 음식 잡설육식의 추억
태양의 요리사 ㅣ 음식 잡설육식의 추억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2.07.24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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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굶으면 군자도 담을 넘는다

 

▲ 중남미나 유럽인은 한 접시의 스테이크도 서너 명이 나눠먹을 정도로 소량의 고기만 먹는다.


일본이 오랫동안 육식 금기의 시간을 보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세기 덴무천황 이후 고기는 일본인의 식탁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1872년 초, 당시 천황은 칙서를 통해 고기를 다시 먹을 것을 권장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의 닻을 올리고, 유럽을 모범으로 삼아 일본인의 체질개선을 선포한 것이다.

육식 선포 후, 웃기는 사건도 벌어진다. 천황의 궁궐에 자객 다섯이 출현한 것이다. 넷이 죽고 한 명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선언문에는 “다시 육식을 금하고 이방인을 몰아내어 정결한 일본을 되찾는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육식을 단순히 먹는 문제로 본 게 아니라, 서구의 일본진출에 따라 영혼이 오염된다고 믿은 거부감, 나아가 개방에 대한 불안으로 환치시켰던 것 같다. 사실 우리도 오랜 기간 육식을 하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가 그것이다. 물론, 1980년대 전까지는 비록 육식이 금기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육식을 즐길 형편이었던 사람은 이 대한민국 땅에 극히 드물었다. 간혹 아이들에게 우리 세대는 명절과 특별한 날만 고기를 먹었다고 하면 오히려 의아하게 바라본다. 마트에 가면 잘 포장되어 엄청나게 싼값에 팔리고 있는 고기를 눈으로 보고 있는 아이들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름으로 쓰기 위해 돼지비계를 오십 원어치 사곤 했다는 말에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여튼, 고기와 기름이 지구 역사상 이렇게 헤픈 시기는 없었다.

나는 어려서 덩어리 고기, 그것도 불에 구운 고깃덩이를 먹는다는 건 그다지 실감나는 일이 아니었다. 간혹 <말광량이 삐삐>같은 드라마에서 해적들이 커다란 고깃점을 들고 뜯는 장면을 보면서 침을 흘리곤 했다. 고깃덩이는 그렇게 드라마나 만화 같은 데 나오는 ‘상상’의 음식이었다. 그것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어떤 맛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한 시간을 걸어 통학했다. 서울내기였지만 갑자기 인구가 폭발하기 시작한 변두리 지역에 살았다. 학교를 미처 짓지 못해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 엄청난 학생들이 2, 3부제로 공부하던 때였다. 멀리서 통학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때 통학로에 돼지갈비 골목이 있었다. 요즘처럼 흥청망청한 대형 갈빗집은 아니고, 작은 ‘실비집’들이 서너 개 몰려 있는 정도였다. 그 골목을 지나는 게 나로서는 큰 고역이었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의 일인데, 한참 먹을 때라 미치도록 유혹을 참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환풍기 서너 개를 동시에 돌리면서 고기 굽는 냄새를 골목으로 뿜어내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간장에 절인 돼지갈비의 냄새! 그것도 연탄이나 숯불에 굽는 냄새는 백번 양보해도 세계에서 가장 입맛 돋우는 냄새라고 생각한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먹고, 주린 배를 부여안고 지나가는 소년이 그 유혹을 견뎌내기 쉬웠으랴. 나는 학교에서 배웠던 ‘삼일 굶으면 성인군자도 담을 타 넘는다’는 말이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참고로, 당시에는 삼겹살을 먹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대개는 돼지갈비나 목살 소금구이 정도였고, 간혹 삼겹살을 먹었다. 삼겹살이 고기구이의 제왕이 된 것은 그래서 나로선 아주 의외다. 기름도 많은데다가, 간장에 절인 돼지갈비 숯불구이의 맛을 어떻게 꺾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가?

젖먹이 이불만한 ‘중양식’ 스테이크
그 실비집들은 여전히 몇몇은 건재하다. 가난한 동네의 골목이었지만,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동네에서 그 당시에는 한 번도 돼지갈비를 먹어보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거기서 성공하여 옆 대로변으로 옮겨간 한 대형 갈빗집에서 그 맛을 유추해본 적이 있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사회에 나와서 잡지사에 취직하고 나니, 고기가 흔해졌다. 걸핏하면 삼겹살 회식이 있었고, 유명인사이거나 부자들인, 또는 동시에 두 가지 다인 취재원들은 간혹 스테이크를 냈다. 그때 기억나는 스테이크 일화가 있다. 영화사에서 외국의 유명 배우를 초청하거나 하면 기자회견을 하면서 스테이크를 세게 냈다. 당시엔 기자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대접이 융숭했다. 그런데 티를 내느라고 그 고기는 썰지 못했다. 도도한 척, 접시를 물렀다. 홍보담당자에게 좀 청렴해보이려는 것이었을까, 하여튼 칼도 대지 않고 접시가 돌아갔다. 그때 어떤 미욱스러운 기자가 맛있게 그 스테이크를 썰던 장면을 보며 ‘어이구, 저 배알도 없는 놈 좀 보아. 준다고 저렇게 속없이 게걸스레 먹는 꼴이라니’ 뭐 이랬던 것도 기억이 난다. 유치했던 시절, 스테이크를 썬 단면은 분홍색으로 아름다웠고, 소스는 왜 그리도 걸쭉하게 맛있어 보이던지.

카투사에 합격해서 논산훈련소를 거친 후 평택 미군보충대에서 며칠 묵었던 내 친구가 하루는 휴가를 나와서 이렇게 스테이크의 진실을 알려준 적이 있다. 녀석도 물론 나와 함께 그 실비집 골목에서 냄새의 고문(?)에 힘겨워하던 출신이다.

“글쎄 말이야, 더플 백을 메고 평택에 내린 후 첫 식사를 주는데 말이야. 스테이크가 나오는 거야. 그걸 우리들은 ‘중양식’이라고 불렀지. 얼마나 큰지 젖먹이 이불만하더라고.”

당시 유행하던 경양식에 빗대어 중양식(重洋式)이라고 부를 정도면, 이불만한 스테이크는 대체 얼마나 컸을까. 요즘은 몸에 나쁘다고 일부러 멀리하는 고기의 추억, 스테이크의 고문이여.

나중에 요리사가 되려고 이태리에 가니, 또 스테이크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서양은 무조건 무식하고 큰, 그러니까 이불만 한 스테이크를 먹는 줄 알았더랬다. 천만의 말씀이다. 유럽 중에서도 프랑스·이태리·스페인·그리스 같은 라틴 쪽과 남부 유럽 사람들은 커다란 스테이크를 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고기를 먹지만, 대개는 아주 얇게 저미거나 삶은 고기를 조금 먹는 정도다. 사진의 스테이크가 대개 서너 명이 나눠 먹는 정도의 양. 고기를 그렇게 저며서 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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