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 잡설ㅣ메밀의 꿈
태양의 요리사 음식 잡설ㅣ메밀의 꿈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2.06.2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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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하고 달큰한 특유의 향이 진짜 ‘모밀’

▲ 막국수라는 이름에는 이미 '막'이라는 민중의 스타일이 서려 있다.

최근에 일본 출장을 가서 서점에 들렀다. 요리 관련 책들을 뒤적이는데, 특이한 것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그저 제목도 <そば>라고 수수했다. 책을 들춰본 나는 놀랐다. 오직 메밀과 메밀국수에 대한 집요한 기록으로 가득 찬, 일본다운 세공의 잡지였다. 무크지로 발행되는데 벌써 41호였다. 마흔한 권 째 오직 메밀에 대해서만 파고드는….

메밀의 전국적 작황과 현지 취재, 소바 잘하는 집의 탐방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과연 탐구라고 할 소바 요리법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걸 한 권 집어 들고 귀국하면서 잘 만든 메밀국수 한 그릇이 간절했다.

미리 갈은 메밀가루는 죽은 가루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달빛 아래 메밀꽃은 정말 숨이 막힌다. 이효석의 이 소설 한 구절은 누구 말씀대로 <설국> 도입부에 맞먹는, 한국 문학사에 남을 대목이다. 이효석은 강원도 어디든 피어나는 무심한 메밀밭에 점도 깊은 관능을 입혀 놓았다. 굳이 평창이 아니더라도 메밀꽃 향이 피어오르는 밭둑에 앉아서 담배라도 한 대 태우면, 금세 허생원이 나귀를 몰고 메밀밭 뒤로 머리를 내밀 것 같기만 하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메밀은 원래 메밀, 모밀 두 가지로 불렸다. 내 선친은 모밀이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당신이 “모밀묵 먹고 싶다”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어쨌든 모밀은 메밀에게 표준어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다보니, 이효석의 소설도 메밀로 바뀌었다. 원래는 그러니까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 결국은 메밀가루를 주문했다. 국산 100퍼센트. 밀가루 값의 열 배가 넘었다. 밀가루를 조금 넣고 되게 반죽했다. 간절했던 메밀국수 한 그릇을 직접 뽑아 먹겠다는 심사였다. 맑은 장국을 넣고 국수를 말았다. 나쁘지 않았으나, 메밀이 그토록 많이 들어간 국수에서 아무런 향도 맡을 수 없었다. 미리 갈아서 유통되는 메밀가루는 죽은 가루였다. 모든 곡물은 갓 갈거나 도정했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 밀가루조차, 갓 도정해서 갈아내면 깊은 향을 낸다.

일본의 메밀 장인들이 가게마다 멧돌 같은 즉석 분쇄기를 준비해서 그때그때 메밀을 갈아내는 건 그런 까닭이다. 열에 특별히 약하다는 이유로 멧돌이 애용되는 것이다. 공주의 메밀집에서 본 거대한 멧돌도 일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소바 무크지를 만들고 사 보는 일본 사람들. 그들은 메밀을 수확한 후 냉장 보관해 두고 조금씩 빻아서 쓴다. 메밀에서 맛을 다 보여주고도 남는다.

맛있는 장국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억울하다. 메밀은 죄가 없으나 갈아둔 메밀은 물론이고 그나마 함량도 낮다. 여름이면 줄을 서는 ‘자루소바’ 즉 일본풍의 차가운 메밀국숫집에 가보면 대개는 메밀을 넣는 둥 마는 둥 한 정도다. 메밀국수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대개 이런 집들은 메밀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 거무튀튀한 국수를 쓴다. 이게 메밀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메밀은 ‘검정색이나 회색’이라는 시중의 인식 때문이다. 메밀껍질이 검은 것은 맞다. 그러나 속은 노란색에 가까운 흰색이다. 일본의 메밀국숫집에서 보면 대부분 국수가 흰색이다. 한국인에게는 메밀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껍질째 갈아서 색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메밀의 함량은 얼마나 될까. 구수하고 달큰한 메밀 특유의 향이 안 나는 걸 보면 답답해진다.

귀족의 메밀과 서민의 메밀
메밀로 만드는 한국의 국수는 대충 두 가지로 나뉜다. 음식평론가 황광해는 그걸 ‘귀족의 메밀, 서민의 메밀’로 분류했다. 껍질을 까서 누리끼리한 가루로 만든 국수가 바로 평양냉면이며 이것이 귀족의 음식이라는 평이다. 반면에 강원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막국수는 껍질째 갈아서 거무튀튀한 색깔이며 서민의 음식이라고 갈파했다. 막국수라는 이름에는 이미 ‘막’이라는 민중의 스타일이 서려 있지 않은가.

냉면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평양에서도 그랬다. 한여름에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만드는 냉면은 아무래도 귀했다. 육수도 꿩이나 소, 돼지, 닭 등을 넣어 감칠맛 나게 뽑았다. 동치미를 섞는 게 원형질이기는 하나 여름에는 동치미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남한의 강원도 태생인 막국수는 동치미 국물에 막 말았다. 여차하면 양념을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비볐다. 막 먹는 국수였다. 그래서 막국수는 육수는 뭘 써야 하고, 어쩌고 하는 소위 오리지널한 원형이 없다. 국물이 동치미든, 닭이라도 잡아서 쓰든 다 막국수라고 한다. 국물이 없으면 김치에 비벼도 막국수다, 그 격의 없음이 막국수의 힘이다. 막국수는 탈피가 곤란한 메밀을 그대로 갈아서 구수하고 꺼끌하게 말아먹는 강원도의 산골음식다운 기운을 지녔다.

나는 냉면이든 막국수든 좋다. 메밀향이 살아 있으면 좋다. 요새 강원도의 한다 하는 막국숫집은 스타일은 ‘막’의 정서가 있되, 정작 막국수에서는 향취가 없다. 구수한 메밀로 적게 넣고 오감을 흐리는 참기름을 마구 넣었다. 설마 비싼 국산 참기름을 그렇게 넣었을까. 속상하다. 어떤 막국숫집은 냉면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한다. 냉면인지 막국수인지 구별이 안 된다. 잘난 막국수는 내게 영 어색하다. 그냥 막 말거나 비벼서 수수하게 먹는 막국수도 만나기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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