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l “거 육수 한 사발 더 개져오라우!”
냉면 l “거 육수 한 사발 더 개져오라우!”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2.05.25 11: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위질·식초·겨자 입맛대로 한 사발

▲ 더운 지방의 강렬한 뚝심과 깊이가 느껴지는 진주냉면.
5월에 웬 여름 타령이냐고 하겠다. 요새 봄이 없다. 5월이면 한낮에 30도가 넘는 도시도 있다. 냉면집도 아연 활기다. 장안의 명가들을 둘러보니 줄을 섰다. 한여름에 냉면 제대로 먹으려면 쉽지 않겠다 싶어진다.

남들은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을 먹거나 한일관 불고기를 먹었네 어쩌네 할 때 우리 집은 꼭 냉면이었다. 딱 한 번 아버지가 소주 드시기 좋은 서대문 통술집(지금도 있는 명문집이다)에 가서 돼지갈비를 먹은 적이 있다.

연탄불로 굽는 갈비였는데 연탄가스를 너무 들이마셔서 귀가한 후 먹은 걸 몽땅 토했던 기억도 있다. 칠성사이다에 먹었던 갈비가 눈물 찔끔 만들며 꾸역꾸역 튀어나왔다. 수채에 걸려 내려가지 않던 그 갈빗살이여. 미친 듯 먹었던, 언제 또 먹을지 몰라 과식을 했던 갈비의 귀환이여. 내 어린 날의 아픈 기억. 구부정하게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던 아버지의 뒷모습….

‘스뎅’ 그릇에 총알처럼 내오던 국수
냉면이라고 그 당시 서울 중산층이 드나들던 을지면옥이나 뭐 우래옥 같은 집은 거의 가보질 못했다. 꼭 남대문의 부원집이거나 오장동 함흥냉면이었다. 부원집은 낡은 시장통의 2층에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더운 여름에 가면 찌는 열기와 시장통의 기운에 어질어질했던 기억이 있다. 육수가 얼음처럼 차갑지는 않았는데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냉면을 먹노라면 어느덧 더위가 가셨다.

▲ ‘스뎅’ 그릇에 차갑게 들어앉은 함흥면옥의 냉면은 질기고 달고 맵다.
그리고 친구들과 소주 반주에 닭무침을 드시던 모시 적삼의 노인들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분들은 이제 다 고향으로 온전히 행복하게 돌아가셨을 것이다. 뜻밖의 유민(流民)이었던 그들의 고단한 눈매가 잊히질 않는다. “아주무니! 거 육수 한 사발 더 개져오라우!”

비빔냉면은 곰보집이며 흥남집도 있지만 함흥면옥을 갔다. 너른 대청 같은 홀에 앉으면 총알처럼 국수가 당도했다. ‘스뎅’ 그릇에 차갑게 들어앉은 냉면은 질기고 달고 매웠다. 워낙 엄청난 손님들이 들이닥치니 홀에서 주방에 전표를 넣는 게 아니라 마이크로 주문을 불러댔다.

그 질 나쁜 음향시설로 들리는 웅얼웅얼, 리드미컬한 주문 넣는 소리는 한때 내가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 채록해야 한다고 우겼던 그런 멋이 있었다.

얼마 전에 가보니 아마도 그때 하얀 뽀이 옷(앞섶이 양복 깃처럼 되어 있고 단추가 서너 개 달려 있으며 뒤트임이 있는 깡총한 흰색 제복)을 입고 육수를 나르던 청년이었을 듯한 중년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카운터를 지키는 여자 사장님은 며느리일까 따님일까. 계산을 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건재해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수줍게 웃으셨는데 내 말의 속뜻은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이 집이 이렇게 맛도 분위기도 그대로 건재하니 어머니 살아생전에 여전히 기쁨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위질·식초·겨자 입맛대로 한 사발
종종 냉면광이라는 분들이 몇 가지 냉면의 철칙을 말씀하신다. 그중의 하나가 가위질을 하지 말라는 거다. 일리 있다. 나도 냉면발좀 빨아본 내력으로 보면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가위질을 하는 것도 다 냉면의 다양한 맛에 일조한다고 나는 믿는다.

가위질을 하면 냉면이 소복하게 한입에 들어온다. 끊는 맛은 없지만 입안 꽉 채워 조신하게 씹는 맛을 준다. 식초나 겨자를 치지 말라는 것도 그렇다. 고담한 육수와 메밀향 면발 맛을 죽인다는 것인데 틀린 말씀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에 예외 없는 원칙도 없고 변칙이 원칙이 되기도 한다. 식초와 겨자에 닭이나 고깃국물이 강한 육수는 제법 어울린다. 게다가 더위 먹는 날씨에 이런 양념은 저항력을 길러준다.

얼마 전에는 벼르던 진주냉면을 먹었다. 뭐랄까, 더운 지방의 강렬한 뚝심과 깊이가 보이는 냉면이었다. 서울의 평양냉면이 꼿꼿하고 서늘한 기질을 보여준다면 진주냉면은 남방의 후끈한 결기가 있다. 육수에 멸치와 다시마, 마른새우 같은 해물의 향이 진하게 걸쳐 있다.
더운 지방은 원래 짜고 달게 먹어야 그 무서운 더위를 이긴다. 진주의 여름은 정평이 난 폭염이 있으니 이런 냉면이야말로 그들의 기질에 딱 맞게 마련이다. 원래 양반가의 간식이나 기방의 배달 음식이었다고 하는데, 그 담음새가 무척 예뻐서 한동안 넋 놓고 쳐다보았다. 진주비빔밥을 두고 꽃밥이라고 하는 이유가 냉면에도 있다.

냉면이라면 다 좋은 나는 집에서 엄마가 말아주던 ‘청수냉면’도 좋아했다. 이젠 어느 재벌 식품회사에 팔려버린 듯한 이 냉면은 옛날의 맛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조미료가 들어간 국물이었지만 토마토를 썰고 매운 양념을 듬뿍 쳐서 차갑게 먹으면 꽤 먹을 만했다.

엄마가 얼음 심부름을 시키면 나는 줄레줄레 돈을 들고 얼음가게로 갔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새끼줄로 묶어주는 얼음이 녹을 새라 종종걸음으로 들고 와서 바늘을 대고 망치로 톡톡 쳤다. 제멋대로 삐죽 삐죽 부서진 얼음은 냉장고가 만들어내는 사각의 규격 얼음과는 다른 맛이었다. 맛이란 화학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맛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나 보다.

여름이다. 냉면집에 줄을 서든, 집에서 대충 말든 그렇게 또 한 철이 가는 것이다. 인생도 가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