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슈토’ 돼지 뒷다리가 소금에 빠졌을 때
‘프로슈토’ 돼지 뒷다리가 소금에 빠졌을 때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2.04.2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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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햄

▲ 프로슈토는 슈퍼마켓에서도 팔지만 전문점에서 사야 좋은 걸 구할 수 있다.

이탈리아를 생각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한 잔의 와인과 안주다. 세련되고 우아하며, 숙성미를 물씬 풍기는 와인보다는 풋풋하고 거친 로컬 와인을 마시고 싶다. 곁들이는 안주는 뭐니뭐니해도 햄이다. 햄(ham)은 돼지 뒷다리와 엉덩이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탈리아어로 프로슈토라고 한다. 한동안 이 음식을 아는 이가 한국에는 거의 없었으나 이젠 백화점 식품부에서도 팔 만큼 제법 흔한 음식이 됐다.

또, 오랫동안 들어오던 미국이나 호주의 유사 제품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스페인 같은 ‘원조’ 국가의 제품이 들어온다. 값도 물론 많이 싸졌다. 10여 년 전에 킬로그램에 10만원 정도 하던 것이 요새는 환율이 더 올랐는데도 턱밑 값이면 살 수 있다. 품질도 좋아졌다. 조악한 미국산 유사 제품을 더 이상 팔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뭐 대단한 것이라고, 할지 몰라도 직접 맛을 비교해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온다. 참, 이탈리아 제품이 수입 허가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전에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생햄(익힌 보통 햄과 구별짓기 위해 그렇게 부르는)은 스페인과 미국, 호주산이 전부였다.

▲ 프로슈토를 기계로 썰 경우 아주 얇게 썰수록 식감이 좋다.
중부의 한 도시에 살 때, 나는 몹시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친구도 없고, 이탈리아어도 거의 할 줄 몰랐다. 일과가 끝나고 한 잔의 술은 그래서 이방인에게 좋은 위안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프로슈토를 찬장에서 꺼내 와인에 곁들였다. 프로슈토는 슈퍼마켓에서도 팔지만, 전문점에서 사야 좋은 걸 구할 수 있다. 나는 주로 목요일의 임시장에서 샀다.

작은 차를 끌고 나와 직접 만든 프로슈토를 전통적인 틀에 끼워 넣고 파는 아저씨였다. 원하는 양을 주문하면 아주 날카로운 카빙 나이프를 써서 얇게 자르는데, 기계로 자는 것보다 이런 전통 방법으로 자른 걸 이탈리아인들은 선호했다. 스페인에서 하몽을 손으로 썰어야 환대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아저씨는 어리숙한 이방인이 프로슈토를 꼬박꼬박 찾는 걸 기특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콧수염을 기르고 무뚝뚝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내게는 늘 웃으면서 대해줬다. 그리고 반드시 정해진 양보다 한 점의 칼질을 더했다.

프로슈토는 기계로 썰 경우 아주 얇게 썰수록 식감이 좋아서 환영받는다. 보통 쓰는 육절기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슬라이서가 이탈리아제로 출시된다. 이탈리아의 기계공업은 수준이 아주 높은데(전자산업은 거의 포기한 상태다) 특히 식품 기계 쪽에서 세계적이다. 보기에도 멋진 붉은 색의 프로슈토 슬라이서는 값이 어지간한 경차 한 대 값이다. 내가 넓은 식당을 하나 열게 되면 이 기계를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멋지다.

아저씨가 만든 프로슈토는 산골에서 은근히 숙성되어 맛이 은은했다. 좋은 프로슈토는 짜지 않고 맛이 달며, 향이 있어야 한다. 그건 좋은 환경이 보장한다. 대량생산하는 프로슈토는 소금간이 짜고 향이 적다. 날고기가 숙성되면서 풍기는 향은 어떤 경계로 나뉜다. 환경이 나쁘면 부패취가 나게 마련이고, 그 반대의 경우 달콤하고 섹시한 향이 난다. 내가 있던 움브리아 지방은 아주 산골짜기여서 프로슈토를 만들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골바람과 산바람이 적당히 불어 일교차가 크면 좋다. 습도와 온도가 큰 차이가 없어야 한다.

또 돼지가 먹는 사료도 중요하다. 주로 치즈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먹여야 맛이 부드럽고 잡냄새가 안 난다. 유명한 스페인의 이베리코 하몽은 오랜 기간 도토리만 주워 먹게 해서 특유의 맛을 표현한다. 아무 사료나 먹이면 냄새가 난다. 좋지 않은 돼지고기는 결코 생햄을 만들 수 없다. ‘액면’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생햄인 까닭이다. 그다지 좋지 못한 하급 돼지는 양념을 잔뜩 치고 첨가물을 넣는 익힌 햄을 만들어야 한다. 냄새를 가리기 위함이다.

▲ 얇게 썬 프로슈토는 감칠맛이 뛰어나 단독으로 먹어도 훌륭하다.
프로슈토를 먹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알프스와 인접한 피에몬테 지방에서는 특유의 빵인 기다란 스틱빵에 프로슈토를 감아서 내놓는다. 짭짤한 프로슈토와 바삭한 빵이 어울려 좋은 전채요리이자 안주가 된다. 가장 흔한 방법은 여름에 멜론과 함께 먹는 것이다.

그 유명한 ‘프로슈토 에 멜로네(prosciutto e melone)’라는 요리가 바로 그것이다. 잘 익어서 달콤하기 그지없는 멜론에 짭짤한 프로슈토는 천상의 궁합이다. 그냥 프로슈토만 먹기도 한다. 나는 이 방법을 선호한다. 오직 프로슈토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이 이 별미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다.

프로슈토는 감칠맛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요리에 양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잘게 썰어서 파스타를 하기도 하고, 얇게 저민 후 스테이크에 말아서 맛을 더하기도 한다. 샌드위치에도 프로슈토는 주인공이다. 바삭하게 잘 구운 빵에 프로슈토 단독으로, 또는 치즈 한 장과 어우러져 멋진 샌드위치, 즉 파니노를 탄생시킨다. 소스도 바르지 않기 때문에 무엇보다 빵을 맛있게 잘 구워야 하고 프로슈토의 질이 좋아야 맛이 좋다. 간결과 직설, 이것이 가장 이탈리아적인 미식의 핵이다.

프로슈토는 우리가 흔히 즐기는 햄 같은 맛을 가진 제품도 있다. 다리를 통째 프로슈토를 만든 후 다시 통째로 삶아서 내놓는 것이다. 이는 프로슈토 코토라고 부르는데, 익힌 프로슈토라는 뜻이다. 역시 얇게 저며서 먹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 같은 요리사들은 통째 들어오는 프로슈토를 쓰지만, 백화점에 가면 소포장을 구할 수 있다. 얇게 저며서 진공되어 팔린다. 빠지면 위험하니 주의하시라. 프로슈토, 그 위험한 유혹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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