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말자
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말자
  • 글·사진 김선미 기자
  • 승인 2011.05.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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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허 스님의 토굴일기 <사벽의 대화>

방사능 오염을 걱정하는 가운데도 꽃은 피고 새순은 돋아났다.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단비마저 마냥 달갑지만은 않던 봄날. 정작 산천초목은 인간들로부터 비롯된 재앙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데 우리만 지레 뒤숭숭해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사이 불안도 상품이 되는 시장에는 재앙에서 살아남는 법을 다룬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나는 재난대비서 대신 지난 겨울 잠 못 드는 밤 즐겨 읽던 <사벽의 대화>를 다시 들추었다.

이 책은 ‘지허 스님의 토굴일기’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선승들의 생생한 체험이 담긴 불교판 서바이벌 매뉴얼이랄까. 그러면서도 책 속에 담긴 뜻이 간단치 않아 감히 ‘아웃도어 경전’이라 부르고 싶었다. 사벽은 ‘네 개의 벽’이란 뜻이다. 나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듯 일체 문명세계의 편리함이나 번다함으로부터 단절된 수도자의 일상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했다. 책은 아무 말도 대꾸도 없는 벽과 대화하듯 외롭게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수도승의 산중 생활을 기록한다.

지허라는 승려는 오대산 상원사의 동안거 체험을 담은 <선방일기>로 이미 유명한 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벽의 대화>에서 화두에 매달린 치열한 불교철학에 짓눌리기보다 대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승려의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반듯한 절간의 선방이 아니라, 거친 대자연 앞에 거적때기 하나 겨우 걸친 듯한 토굴 생활 자체가 짜릿했기 때문이다.

“함박산 상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해발 1천 미터에 자리 잡은 심적 토굴은 원시인의 혈거를 겨우 면했을 뿐 인공위성이 우주를 선회하는 현세와는 외면한 채였다. 지붕은 전나무를 빠개어 만든 능와로 덮였는데 능와 위에는 굵은 돌이 꾹꾹 눌려졌고 사방 벽은 흙을 쥐어발랐다. 방문은 싸리를 가늘게 쪼개 만들어져 있었다.”
-<사벽의 대화> 중에서

지허가 찾아간 토굴 ‘심적은 일 년 중 반년이 겨울에 잡혀 있는’곳으로 ‘음력으로 시월 초에 눈이 덮이면 다음 해 삼월 그믐게야 눈에서 풀려나’는 강원도 첩첩 산골이다. 심적(深寂), 깊고 깊은 산속의 적막이 연상되는 이름이다.

그곳에서 토굴 생활자들은 다람쥐와 같이 꿀밤(도토리나무를 부르는 경상도말)을 주식으로 먹었다. 생무와 소금을 곁들이고 철따라 고비, 곰취, 더덕, 고사리 같은 산나물을 찬으로 갖춰먹는다는 것이 산짐승과 다를까. 그래서 봄과 여름에는 열심히 나물을 뜯고 찬바람 불면 눈으로 뒤덮이기 전까지 부지런히 꿀밤을 주워 월동 채비를 한다.

이들의 겨울나기가 짐승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죽은 나뭇가지들만 골라 불을 땐 것 정도다. 지붕과 문이 있다고는 하나 벽에 흙과 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토굴에서 자연의 일부로 꼬박 한 해를 살았다.

물론 그곳에는 시멘트와 종이로 벽을 발라 제법 꼴을 갖춘 빈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지허가 토굴 선배이자 도반인 석우에게 그 방이 생겨난 내력을 듣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 방은 지허보다 먼저 찾아왔던 한 수좌가 꾸며놓고 간 것이다. 심적에 머물기를 청한 그는 토굴 생활 사흘만에 꿀밤으로 끼니 때우는 것부터 견디지 못하고 탁발을 하러 쪼르르 인가로 달려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쌀을 잔뜩 구해오더니 다시 사흘째 되는 날 거처를 정결히 하겠다며 산을 내려갔고, 일주일 만에 시멘트 포대와 신문지 등을 짊어지고 왔다. 그리고는 또다시 산을 내려간 지 사흘만에 도끼와 톱을 구해와 생목(生木)을 찍어 장장 열흘에 걸려 장작 두 평을 해 놓았다. 거처를 말끔히 꾸미고 한겨울을 날 땔감까지 가득 쟁여놓고는 비로소 공부를 하겠다고 방에 들어앉았지만 그는, 결국 나흘째 되던 날 바랑을 지고 영영 떠나버렸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연과 깊이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고가의 캠핑장비들을 사 모으는 데 열심인 사람들이 떠올랐다. 요즘 캠프장에는 잠자리와 부엌 공간을 분리시킨 커다란 리빙 쉘 안에 키친 테이블과 야외용 가구들을 오밀조밀 채우고, 환한 전깃불과 노트북, 휴대전화 충전 같은데 필요한 전력선을 텐트 안까지 끌어들이고 화목난로와 간이보일러까지 갖춘 ‘첨단 럭셔리 캠핑’족들이 대세다.

그들은 콘도나 아파트에서 누리던 문명의 호사를 고스란히 텐트 안으로 옮겨 놓을 기세다. 분주하게 마을과 산을 오르내리며 토굴에 번듯한 방 한 칸 장만해 놓고는 끝내 제풀에 지쳐 수행을 포기해버린 승려는 애당초에 왜 깊은 산속까지 힘들게 찾아왔던 것일까. 비싼 장비들을 캠프장 가득 펼쳤다가 하룻밤이 지나면 분주하게 짐을 꾸려 돌아가기 바쁜 캠퍼들은 또 어떠한가.

토굴수행은 단순 소박한 삶의 극치였다. 낮에는 땔나무와 꿀밤을 주워 모으고 해가 지면 하루의 노동으로 녹록해진 몸은 흙벽을 치고 가마니만 깐 방에 어둠처럼 침잠해 그대로 곯아떨어질 뿐이다. 그러나 이를 견디는 것을 고행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고행도 수도도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희생을 생각하고 느끼면서 던지는 희생은 이미 희생이 아니고 위선에 불과합니다. 구도자가 구도를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은 마치 색한(色漢)이 꿈속에서 계집을 생각하고 교감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낮에 아름드리 꿀밤나무에 올라갔다가 낙상을 한 지허가 ‘끼니를 꿀밤으로 대할 때마다 고행을 절실히 체감한다’고 말했다가 도반으로부터 일침을 받는 부분이다. <사벽의 대화>는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진정한 휴식을 찾겠다고 대자연으로 들어간 우리가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토굴은 또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자꾸 묻는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자연을 이해해야 하고, 자연을 이해하려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연의 법칙은 꼭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生)과 멸(滅)의 영원한 반복행위입니다.”

벚꽃 잎이 함박눈처럼 흩뿌리는 날, 문득 함백산 깊은 그늘 속 잔설처럼 아직 그곳에 심적(深寂)이 남아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깊은 고요가 꼭 깊은 산속에만 있을까. 언제 어디든 중요한 것은 자연과 만나는 태도에 있지 않던가.
“죽음의 이편에 있는 허무에 집착하는 힘은 강하면서 죽음 저편에 있는 인생에 충실하는 힘은 묘(妙)하게도 약한 게 바로 허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비극입니다.”라고 밑줄 그은 구절을 읽는데, 등 뒤로 벚꽃이 지고 있었다.

꽃이 진다고 허무해하지 말자. 꽃은 제 할 일에 충실했다. 올 봄 <사벽의 대화>가 내게 건넨 말이다.

김선미 | 딸들과 함께 한 캠핑 기록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와 <바람과 별의 집> 등을 썼다. 최근에는 ‘생명을 구하고 지구를 살리는’ 농부들을 찾아 나선 <살림의 밥상>을 쓰며 새로운 길을 찾는 여행을 계속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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