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가 꿈틀거리는 날것의 욕망
원시가 꿈틀거리는 날것의 욕망
  • 글·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1.12.30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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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내륙 출신의 부모님을 둔데다가 서울에서 자랐으니 날것이라고는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 기껏 어머니가 겨울에 해주시던 냉동오징어회가 고작이었다. 냉장시설이 형편없던 시절이라 겨울 아니면 그런 음식을 서울에서 먹기란 어려웠다.

오징어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썬 다음 무채와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 음식이었다. 그 희한한 음식은 나에게 최초의 날것이었다. 익히지 않은 오징어살은 잘 씹히지 않았지만 씹을수록 진하게 잇몸에 붙었다. 감칠맛을 내는 방법이 달랐다. 다리의 오돌오돌한 흡반까지 음미하며 악착같이 씹었다.

그리고 잊고 있던 날것은 기어이 내게 왔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이미 어른 흉내를 내던 우리들은 ‘회’라는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때 서울 서부권에서 제일 크고 떵떵거리던 도매시장인 모래내시장의 횟집이었다. 횟집이랄 것도 없는, 수조 하나 놓고 거친 회를 팔던 집이었다. 그 시절의 서울 변두리 횟집이라면 정식 생선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것들을 팔았다. 역돔(이게 돔과는 아무 상관없는 민물고기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으니)과 이스라엘잉어(향어라고 불리는)가 고작이었다.

탈수기에 돌린 아나고 회
아, 또 있었다. 아나고라고 부르는 붕장어였다. 주문을 하면 대가리에 못을 콱 박은 후 껍질을 펜치로 좌악 벗겨냈다. 그리고 그 살점을 썬 후 웬일인지 짤순이에 넣고 돌렸다. 우당탕탕, 붕장어살을 저며서 입에 넣으면 고소했다. 기름을 빼기 위해 탈수기에 넣고 돌린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이 붕장어를 회로 먹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구워서 그 기름기를 즐기면 훨씬 맛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향어와 역돔을 회로 알고 먹었다. 넷이서 오천원짜리 한 장이면 회에다 소주를 마셨다는, 뭔가 어른들처럼 별난 음식을 먹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날것은 그 자체로 별다른 맛이 없었지만, 인공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초고추장의 맛으로 혀에 올렸다.

그 후에 날것을 먹는 일이 결코 어려운 건 아니었다. 넙치와 우럭이 대량 양식되기 시작했고, 마침 터진 거품경제의 시기는 온 국민을 외식 열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돼지갈비 말고 색다른 외식을 한다는 건 우리도 이젠 잘 산다는 존재의 확인이었다. 물론 97년의 그 유명한 IMF 사태로 그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허상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대학 시절은 그래도 선배들처럼 생두부에 막걸리만 먹던 건 아니었다. 닭갈비도 있었고, 삼겹살을 먹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게 최초의 진짜 회, 무지막지한 회다운 회를 먹게 되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내가 다닌 학교는 좀 거칠고 통제 불가능한 학생들이 많았는데, 물론 나도 그 부류였다. 해당 학년도 아닌 학생 몇몇이(그것도 휴학생을 포함하여) 아무 허락도 없이 3학년의 수학여행에 배낭을 함께 얹었던 것이다.

당시엔 무슨 까닭인지 지도교수조차 내놓고 거절을 못했고, 그렇게 세 명의 불청객들이 남도를 순례하는 3학년들에 뒤섞여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도교수는 그 허망한 당신의 권위 때문인지 해남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상경해버렸고, 우리는 완도에 이르렀다. 무슨 과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행은 모두 어떤 김 양식업자의 창고까지 몰려가게 됐다. 그의 팔뚝에는 그림이 좀 있었고, 당시 별난 신분(?)을 상징하는 단발머리에 육척장신이었다는 걸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155밀리 포탄 같은 막소주병을 흔들어 술을 따랐고, 그 잔을 거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학생들은 점점 공포에 빠졌고, 김 냄새 나는 창고의 술자리는 점입가경이었다. 그는 안주로 막 완도 어디선가 건져올린 홍어를 썰어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푹 삭힌 그런 홍어가 아닌, 생생한 생물의 홍어가 우리 입에 들어왔다.

뭉클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그 살점을 막 맛본 순간 나는 토할 뻔했다. 야들야들하고 얇게 저민 그런 회가 아닌, 너무나도 두툼하며 이빨도 잘 들어가지 않을 만큼 거친 회였다. 억지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그걸 먹지 않으면 단발머리의 폭력이 시작될 것 같았던)다른 이들을 보았다. 벌건 홍어의 시체를 한 점씩 문 사람들의 표정이란! 다행히도 별 일 없이 숙소로 돌아온 나는 오랫동안 구토를 했다. 날것의 뭉클거리는 식감은 비위를 건드렸고, 마구 들이킨 막소주까지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막소주와 벌건 홍어의 시체
세월은 흐르고, 홍어가 맛있는 회라는 사실을 내 몸이 받아들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온갖 생선으로 만든 회가 나의 술안주로 상에 올랐다. 장인이 노련한 기교로 떠낸 살살 녹는 살점도 좋고, 어느 허술한 어촌의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먹은 회도 좋았다.

박 모라고 하는, 지금은 월간 아웃도어의 편집장을 하는 선배가 저 멀리 아산만의 노점에서 먹여준 피조개 회도 그 요란한 횟감 편력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해가 딱 중천에 오른 한낮, 천막도 없는 노점에서 먹은 피조개가 성할 리가 있나. 피조개는 싱싱하였으나 정수리로 꽂히던 태양은 우리 속을 뒤집어 놓았고, 아산만의 그 막막한 바다에서 나는 수없이 토했다.

이젠 내가 스스로 횟감을 뜰 수 있는 요리사가 되어, 나는 다시 날것을 생각한다. 인간이 화식(火食)을 통해 문명을 만들어왔지만, 우리 유전자의 실타래 어디선가 날것의 욕망은 꿈틀거린다. 생명을 그대로 먹는 듯한 느낌, 우리의 원시의 대한 본능. 이런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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