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새색시 꽃가마 타고 오르던 등구재 고갯길
전라도 새색시 꽃가마 타고 오르던 등구재 고갯길
  • 글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름다운 우리 길 | 지리산둘레길 ② 인월~금계

▲ 금계마을에서 엄천을 바라보는 풍경. 

다행히 마고 여신은 밤새 비를 거두어 주었다. 새벽녘까지 내리던 비는 지리산 자락에 생명수를 전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덕분에 푸른 새벽 사이로 비 냄새가 알싸하게 스며들었다. 빗방울을 머금은 가을 공기 사이로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호 주천~운봉~인월 구간에 이어 이번에 소개할 길은 인월~금계 구간이다. 

낙동강을 만나러 뻗어가는 물줄기 광천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시원하게 자리한 인월 들판이 펼쳐진다. 가을걷이를 마친 곳곳의 논두렁 사이로 억새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가 있는 인월면이다.

이제 인월면에서 중군마을을 거쳐 장항마을로, 그리고 처음 지리산둘레길이 열린 매동마을을 향해 걷는다. 전북과 경남을 잇는 등구재를 지나 다랑이논이 펼쳐진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이어진 인월~금계 구간은 총 19.3km로, 2010년 10월 현재 개통된 지리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길고 또, 그만큼 재미난 길이다. 길이가 긴만큼 지리산의 다양한 풍광과 길, 그리고 그 안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1915m)을 비롯해 여러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걷는 이 길은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서도 지리산 자락에 안겨 걷는 묘미인, 지리산둘레길의 매력을 오롯이 품고 있다. 특히 등구재를 경계에 두고 다랑이논으로 이름을 날리는 전북의 경계마을인 상황마을과 경남의 경계마을인 창원마을 모두가 속해있어 산자락의 가을풍경 또한 즐길 수 있다. 

보기에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 다랑이논은 산자락을 개간해서 만든 계단식 논으로 산촌 사람들의 땀방울이 스며있다. 아니 어쩌면 촌부들의 굳은살 박힌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다랑이논은 지리산자락에 터를 잡아야 했던 이곳 사람들의 삶 그 자체, 전부는 아닐까 싶다. 

▲ 노루의 목을 닮았다고 노루목이라 불리는 장항마을의 당산 소나무를 지나면 장항마을에서 운영하는 쉼터가 사람들을 반긴다. 라면이나 부침개 등으로 요기를 하며 막걸리 한잔 할 수 있다.

늘씬한 개서어나무들이 반겨주는 장항마을 숲길
인월~금계 구간은 인월의 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에서 시작한다. 금계에서 출발해 인월로 걷는 이들에게는 도착점이 되리라. 

인월이라는 마을 지명은 지난 호에 소개한 황산대첩과 연관이 있다. 1380년(우왕 6) 고려의 삼도 순찰사였던 이성계 장군이 인월에 본거지를 두고 왜장 아지발도와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성계는 하늘에 달이 뜨기를 기원했고, 밝은 달이 떠올라 그 달빛 덕분에 아지발도를 명중시켜 대승을 거뒀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이 ‘끌 인(引)’자와 ‘달 월(月)’자를 쓴 인월이 된 연유다. 

▲ 장항마을로 이어지는 숲길같은 산길에는 늘씬한 개서어나무들이 길손들을 반겨준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던 마을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저마다의 전설이며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아마도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얻는 가장 큰 배움(?)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바쁘게 지나가는 이들에게는 그저 수많은 마을 중 하나이겠지만, 길을 걸으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 주민들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하나의 독립된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 역사, 사람들을 품으며 깨어났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커다란 지리산 자락의 마을들을 이어내는 둘레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을 이름을 생각하며 강둑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덧 중군마을이다. 30분이나 걸었을까. 분명 물줄기와 들판 사이에 난 강둑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멀게만 보이던 정면에 있던 지리산 자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산자락이 시작되는 지점의 마을이다. 다소 번화한(?) 인월에서 점점 지리산 자락이 가까워지니,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이동하는 것 같다. 

중군마을은 지리산 북부로 가는 관문이자 길목이라고 했다. 중군마을 역시 이름만 제대로 알아도 마을을 이해하기 수월하다. 조선시대 군대는 전군·중군·후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중군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이곳에 주둔했다. 마을 이름이 중군이 된 연유다. 

▲ 지리산둘레길의 유명 마을로 자리잡은 매동마을의 아침풍경. 하루 묵고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는 할머니, 집앞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 반가운 우리네 할머니들.
중군마을 뿐 아니라 지난 호에 소개한 인월과 운봉 역시 군대와 관련된 이름이 많았다. 이 고원지대가 경남 내륙과 전남북 평야지대를 잇는 징검다리였기 때문이리라. 

중군마을을 지나 구불구불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조금 지겹다 싶을 무렵 ‘수성대’라는 계곡을 지나 본격적인 산길이자 숲길로 들어선다. 지난밤 내린 비 덕분인지 물줄기가 제법 세다. 여름에는 물이 넘쳐 건너기가 쉽지 않단다. 

수성대는 중군마을 사람들의 식수로 쓰이기 때문이지 눈에 띄게 큰 바위에 ‘오염금지’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간이휴게소처럼 자리한 평상에 막걸리가 놓였다. 지리산둘레길의 트레이드마크인 주인장 없는 무인 매점이다. 아니, 무인 간이주막쯤 되려나. 막걸리는 아니더라도 평상에서 간식을 먹고 휴식을 취해도 좋을 듯하다. 

수성대 인근 숲에는 사십여 년 전만 해도, 그러니까 1968년 무장간첩 김신조가 침투하면서 산중의 집들이 산자락 아래로 내려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백련사와 황매암 두 암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즈넉한 숲길로 들어서자 ‘장항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이 멋지더라’는 글귀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부드러운 흙길에 쭉쭉 늘씬하게 뻗은 개서어나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춤을 춰대는 것만 같다. 길쭉하게 뻗은 큰 키로 반갑다고 기우뚱 거리는 모습이 괜히 고맙다. 

장항마을로 이어지는 이 길은 배너미재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운봉이 호수였을 때 배가 넘어갔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이 가득한 이곳에 배가 넘어가는 상상은 조금 어렵다. 대신 나무를 솎아낸 간벌숲에 남겨진 개서어나무들이 연약한 몸을 디디며 배너미재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 금계마을에 닿기전 풍경. 엄천줄기와 누렇게 물든 논자락이 사람들을 반긴다.

노루목을 닮은 장항마을에서 아기자기 소박한 매동마을로
내리막길을 따라 저 밑으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마을이 보인다. 구름이 낮게 깔렸지만 누런 논두렁도 빠꼼 고개를 내민다.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노루목 당산나무를 지나 장항마을 쉼터에 닿는다.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 허기지던 차였다. 무인매점인 듯싶지만, 전화를 거니 마을의 할멈 한 분이 후다닥 된장찌개와 밥, 그리고 김치를 한 가득 퍼다 준다. 금계방향에서 걸어오는 둘레꾼 몇몇은 벌써 식사를 끝내고 쉬고 있다. 

▲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코스에는 초등학교 이상의 아이들을 동행한 가족단위 둘레꾼들이 제법 많다. 지게꾼 흉내를 내며 신이 난 꼬마.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자를 쓰는 장항마을은 뜻을 그대로 풀어 노루목 마을이라고 불린다. 마을산세 지형이 노루의 목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마을 앞이 탁 트여 지리산 천왕봉이 멀리 올려다 보인다. 

장항마을에서 포장도로에 오른다. 장항교를 지나 지속되는 오르막길을 지나 등구재와 매동마을 안내판과 만난다. 매동마을. 지리산둘레길이 시작된 곳.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니 둘러보는 것도 좋다. 산자락 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매동마을에 들어서 길을 따라 구불구불 걸어가다 쪽진 머리를 하고서 밭일을 하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얼굴 가득 주름살이 한껏 웃는 고운 할머니는 “귀가 잘 안들린다”면서도 “왜 왔어? 어서 왔어?” 질문을 하는 호기심 많은 분. 끝내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정정하게 웃는 표정은 매동마을과 동격으로 저장되었다. 다만, 너무 유명해져서인지 사람도 차도 넘쳐 잠시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을 듯싶다.

이제 등구재를 향해 걷는다. 인월~금계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맥스인 등구재는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을 거쳐 닿을 것이다. 전북의 경계마을인 상황마을과 경남의 경계마을인 창원마을을 잇는 등구재는 고개 모양이 거북등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낭만적인 풀이로는 노을과 초저녁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갯길이라는 뜻도 있다. 함양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남원 인월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남원 사람들이 구룡치를 넘어 인월장을 찾은 것처럼. 또 어느 꿈 많은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이기도 했겠지. 

하지만 매동마을을 지나 상황마을로 향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자 꽃가마 탄 신부보다 꽃가마 이고 가던 가마꾼이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바로 가나 반대로 가나 가파르기는 매 마찬가지인 이 길을 꽃가마 이고 가던 가마꾼은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을꼬. 

▲ 창원마을의 포인트 다랑이논과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본 풍경.

아름다운 다랑이논 사이로 마을주민들의 애환이 자갈밭이라 발바닥이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나무에 감싸여, 또 주말이라 몰려든 둘레꾼들에 끼여 걸으니 걸을 만도 하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저학년임이 분명한 어린이들도 신난다고 씩씩하게 걷는 모습에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중황마을 산자락에 자리한 쉼터에는 둘레꾼들이 가득이다. 걷다가 생각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는 쉼터가 반가울 뿐이다. 목을 축이는 이들도 있고 간단히 파전과 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는 이들도 보인다. 이제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가서 상황마을로 향한다.  

산내면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은 다랑이논들이 무척 넓다. 아마 곧 등구재를 향해 오르다보면 다랑이논은 물리도록 볼 수 있으리라.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난 붉은서나물. 푸른 가을하늘과 썩 잘 어울린다. 
따가운 가을 햇살을 따라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등구재를 가리키는 표지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사이좋은 상황마을, 중황마을, 하황마을 이름은 유래는 이렇다. 지금의 중황마을 뒤쪽 백운산 자락에 황강사란 절이 있었고, 마을 북쪽이 풍수지리적으로 꿩이 엎드려 있는 ‘복치혈’이라고 했단다. 이중 황강사의 ‘황’자와 복치혈의 ‘치’자를 따서 ‘황치’라 불렀으나, 마을규모가 점점 커져 상황·중황·하황으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슬슬 다랑이논의 풍광이 펼쳐지는 것을 보니 등구재가 가까운 상황마을이다. 상황마을은 해발 400m 고지대의 농업 마을로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이 주변에서는 가장 질 좋은 쌀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평 윤씨 집성촌이기도 한 이곳은 한때 권세를 잡았던 파평윤씨가 남겨둔 독산재란 재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황마을의 다랑이논들이 층층이 펼쳐져 있다. 지리산둘레길의 아름다운 다랑이논 사진들은 대부분 상황마을에서 촬영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다랑이논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다랑이논을 상상하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쉽게도 산자락의 가을걷이는 이미 대부분 마친 뒤였다. 

▲ 금계마을에서 의중마을로 향하는 의탄교에서 내려다 본 엄천.
다행히 창원마을에는 누런 물결이 조금 남아있었다. 다랑이논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제 주인의 반대로 둘레꾼들에게 더이상 허락되지 않는 길이다. 하지만 그 풍광만큼은 빼앗아가지 못했다.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창원마을은 곳간마을이었다. 조선시대 마천면에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다고 해서 ‘창말’이었다가 이웃한 ‘원정마을’과 합쳐져 창원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창원마을의 다랑이논을 가로질러 금계마을까지 닿는 길 역시 다랑이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다랑이논은 처음에는 그저 예쁘고, 아름답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가을걷이를 마친 다랑이논과 아직 황금물결인 다랑이논 사이에서 농부들의 땀방울 혹은 눈물방울을 보았다면 너무 감상적인 걸까. 할머니 한 분이 한숨처럼 말을 건넨다. 

“다랑이논만 보고는 부자인줄 알고 시집 왔는데, 저게 일이 끝이 없더라고. 고생했지, 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