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중국마을, 가보셨나요?
한국 속 중국마을, 가보셨나요?
  • 글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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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인천 ③ 차이나타운 여행

▲ 차이나타운의 백미, 자장면 거리의 밤풍경. 붉은 배경 위에 자리한 한문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역사공부, 중국요리, 산책까지 한 번에 즐기기

토요일 밤, 제법 쌀쌀한 바람에도 인천 차이나타운의 거리는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붉은색이 썩 잘 어울리는 한문 간판들. 차이나타운의 표정 덕분이었으리라. 양꼬치 굽는 냄새가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여름이었다면 분명 ‘칭다오 맥주’까지 곁들였겠지. 고기 냄새를 못 이기고 다가가자 꼬치를 파는 이가 한국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양꼬치 1개 1000원, 양갈비 1개 2000원’이라고 적힌 메뉴판을 두고 “어느게 더 맛있냐”고 묻는 말에 답이 없다. 한국말이라곤 모르는 오리지널 중국인이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3000여 명의 군대가 인천을 통해 조선에 발을 딛는다. 이때 이들과 함께 40여 명의 군역 상인들도 들어오는데, 이들이 바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터를 잡은 화교들의 시초다. 이듬해 인천 개항과 더불어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지금의 인천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에는 각국의 외국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삶의 터전, 조계지가 형성된다. 차이나타운 혹은 인천 개항장이라 불리는 공간의 시작이었다. 

▲ 자유공원에서 내려다 본 인천항의 밤 풍경. 개항 후 인천으로 유입된 서구인들의 주거촌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인천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던 제물포는 1876년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1876년), 원산(1876년)에 이어 1883년 세 번째로 개항했다(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과 제물포는 혼칭되어 왔다). 이로써 인천은 질풍노도의 근대화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조선의 근현대가 오롯이 새겨진 인천항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인천에 급상륙한 ‘근대’, 즉 제물포 개항은 조선의 자본주의 편입과 동시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전주곡이었음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 차이나타운 골목을 가득 채우는 양꼬치 냄새. 노점에서 구워내는 바람에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수도 서울과 닿은 인천의 지리적 위치는 군사적, 정치적 중요성이 컸다. 때문에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제물포 개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사시켜야 할 과업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개항과 더불어 인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근대적 도시로 변모한다. 항만이 만들어지고 조계가 설정되었으며, 서구 근대문물의 대부분은 인천을 거쳐 서울 등 국내 각지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근대적 도시기반시설이 마련되면서 인천은 개항장이자 수도의 관문항으로 성장·발전했다. 

인천항은 다른 개항장과 달리 일찍부터 서구 열강과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했다. 주로 일본을 상대로 한 부산항에 비해 제물포항은 구미 여러 나라를 상대하는 문호였고, 일제의 군사 전략 차원에서 부설됐다는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1899)이 놓여져 조선땅에서 가장 먼저 열차가 달리던 공간이었다. 경인선 덕분에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개항지는 빠르게 수도 서울로 신문물을 전달할 수 있었다. 

▲ 자장면 거리로도 불리는 차이나타운의 먹자골목 풍경. 평일 오전에는 사람들이 뜸하다.

세계 각국의 신문물이 들어서던 조선의 관문
1884년, 청나라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인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화상(華商,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국계 사업가, 화교 상인)들은 본국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한국에서는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들여가 팔았다. 덕분에 그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고, 장사가 잘 되니 이곳 인천에 상가건물, 주거할 집이 필요해졌다.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들도 한국에 들어오게 된 연유다. 이들은 인천 차이나타운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초가 되었다. 

구한말 개항부터 해방 직후까지 인천 중구는 서울 못지않은 정치·외교의 중심지였다. 거의 모든 대사관이 인천에 있었고, 서울에 있던 러시아 대사관이 인천으로 옮겨갔을 정도니 인천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각국 대사관들이 지금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아래에 외교가를 이뤘다. 이어 존스턴 별장, 세창양행 숙사, 오례당, 파울바우만 주택, 성누가 병원 등이 들어서면서 인천의 유지들과 각계 고위층들의 거주지로 자리 잡았다. 아쉽게도 이들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포격으로 소실되거나 그 터만 남아있다. 

당시, 중국의 상해·청도·연태 등에서 왕래하는 화물선이 기항했던 인천은 워낙 거주하던 화교가 많아 지금의 차이나타운을 넘어 경동, 신포동 일대를 비롯해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까지 터를 잡았다. 화상들이 이곳의 상권을 장악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1894년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일본을 포함한 서방세력에게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많은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나지만, 당시 청나라의 불안과 흉년을 피해, 또 조선에서의 상업을 위해 다시 돌아온다. 

1910년 한국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다소 위축되지만, 타고난 수완과 성실로 무장한 화상들은 점점 영역을 확장해간다. 하지만 1931년 만보산사건에 이은 일본과의 전면전으로 화교들은 조선에서 예전의 명성을 잃어간다. 

결정적으로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화교사회는 거의 자리를 잃게 된다. 함포사격을 정면으로 받은 곳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이기 때문이다. 한때 근방을 가득 메우던 중국식 가옥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 이유다.

6·25전쟁 후에도 화폐개혁과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던 화교들은 대부분 이 땅을 떠난다. 더군다나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계에 한국인들도 뛰어들면서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 

▲ ◀차이나타운 공영주차장으로 향하는 골목에 자리한 오래된 가옥. 벽돌을 길게 쌓아 올린 다소 이색적인 모양 덕분에 화교들의 작품임을 짐작할 뿐이다. ▲▶ 자유공원으로 향한 길에 만난 패루, 선린문.▼◀ 자유공원 벚꽃길 초입. 봄바람에 벚꽃이 흩날리는 상상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청일조계지 계단 왼편에 자리한 청나라 풍의 가옥. 100년 전에는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중국식 가옥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는 차이나타운
현대로 넘어오면서 차이나타운의 생채기와 혼란은 ‘시간’과 ‘역사’를 품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명소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몇 채 되진 않지만 남아있는 중국식 건축물들도 힘을 보태었고, 무엇보다 ‘자장면의 발상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것. 

100여 년 전, 이곳에 청국 조계지가 자리 잡으면서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이들을 위한 싸고 간편한 음식으로 태어난 것이 자장면이다. 처음에는 산둥 지방의 토속면장에 고기를 볶아 손수레에 재료들을 싣고 부둣가로 나가 직접 수타면으로 만들어 팔기도 했단다. 지금처럼 우리 입맛에 맞는 달달한 자장면은 1950년대에 화교들이 개발한 것이다. 

▲ 청일조계지 계단의 윗부분. 공자 선생이 기다리고 있다. 
자장면은 당시 요리집으로 이름을 알리던 ‘공화춘’이 1905년, 조선에서 제일 먼저 개발했다는 설이 유력했는데, 과연 고급 요리집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음식인 자장면을 개발했느냐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어찌되었건 자장면 한 그릇 만으로 돌아서기엔 아쉬운 공간이다. 

지하철 1호선 종점인 인천역 밖으로 나오면 건너편에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패루가 보인다. 높이가 11m나 되는 돌패루는 중국 웨이하이(威海)시에서 기증한 것이다. 다른 지자체들이 차이나타운을 유치하려고 하는 것만 봐도 눈치를 챌 수 있는데, 차이나타운은 더 이상 빛바랜 한때의 번영을 아쉬워하는 초라한 중국마을이 아니다. 주말이면 관광 삼아, 여행 삼아, 혹은 역사공부 삼아 찾는 이들로 가득 채워지는 엄연한 ‘명소’로 자리 잡았다.

또 하나, 차이나타운은 입이 즐거운 곳이다. 대를 이어온 이름난 중국요리집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굳이 중국까지 가지 않아도 중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며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음식점 거리를 가득 메운 양꼬치 냄새를 맡으며 공화춘, 풍미, 대창반점, 십리향, 원보, 복래춘 등 유명 음식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앞서도 소개한 공화춘은 자장면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공사중이고, 음식점 공화춘은 새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역 앞 1패루를 지나 직진하면 거대한 중국풍의 공화춘과 청관건물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공화춘을 마주보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중국식 중국요리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 차이나타운 내에 자리한 북성동 주민센터 옆 주차장 풍경. 우측으로는 시대를 풍미하던 요리집 ‘공화춘’이 자장면 박물관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공사중이다.

‘자장면이 없다’고 아예 안내문을 써 붙인 만두전문점 ‘원보’, 옛 중국식 빵을 항아리에 구워 파는 ‘십리향’, 그리고 중국 전통과자인 월병, 공갈빵을 비롯해 양꼬치 집들이 늘어서있다. 화교중산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복래춘’은 공갈빵 및 중국 과자점으로 유명하다. 차이나타운 중심 먹을거리 골목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관광객들도 적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그래도 중국요리만 맛보고 그냥 가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맛’ 말고도 구석구석 돌아다닌 만큼 보고 배울 것이 많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청일조계지 계단도 빼놓을 수 없다. 공자상을 마주 보고 조계지 계단을 경계로 왼쪽으로는 청나라, 오른쪽으로는 일본인 거주지, 즉 조계지였던 공간이다. 100년 전 양국조계지의 경계였다는 것은 계단 사이의 오래된 돌들이 증명한다. 공자상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인천 앞바다 야경도 빼놓을 수 없다. 

▲ ◀ 삼국지의 에피소드들이 담겨진 삼국지 벽화거리. 읽고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중구청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뻗은 인천 개항 누리길의 근대역사 문화 탐방코스. 20세기 초반, 신문명이 유입되기 시작한 조선 근대의 풍경이 이러했을까? ▼◀ 의선당의 외부. 개항 후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배들이 무사하라고 빌었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자유공원이 나온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응봉산 자락에 만들어진 자유공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왜, 100년도 전 인천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병원을 짓고, 숙소를 지었는지 알게 해준다. 잔잔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그 많은 세월을 품고도 잔잔한 인천 앞바다는 과연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차이나타운

1884년 조성된 청국조계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2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처음에는 인천항을 출입하는 선박의 급수와 잡화 판매를 중심으로 화교사회가 형성되었다가 점차 상점, 중화 요리점 등으로 확대되었다.

청관은 1930년대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의 위세에 밀려 쇠락했다. ‘선린동’이라는 이름은 광복 직후인 1946년 붙인 것으로 이름 그대로 중국인들과 옛날과 같은 친선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이다. 

☎북성동 주민센터 032-760-7961 

개항장 근대역사 문화타운

1883년 인천 개항 이래 120여 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근대역사문화의 공간이다.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근대문명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다. 현재 중구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변 거리는 우리나라 개항기 근대건축물이 밀집된 데다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당시에는 생소한 용도의 건물인 은행, 교회, 상점 등이 각국 풍의 양식에 따라 세워졌다.

르네상스식 석조물인 일본제1은행, 일본제18은행, 프랑스풍 양식의 일본제58은행,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인천기상대, 제물포구락부, 각국 조계지 계단,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내리교회, 인천우체국, 홍예문 등의 다양한 근대건축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개항도시 인천의 역사성을 오롯이 보여준다.

신포재래시장

개항 당시 신포동은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던 곳으로, 1890년 초 정흥택 형제가 최초의 어시장을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농업에 종사하는 화교들이 이곳 야채시장을 장악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공설 제1일용품시장, 공설 제2일용품시장이 되었다가 광복 후엔 지금의 신포재리시장이 형성되었다.

쫄면과 닭강정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 곳으로, 개항 누리길과 연계해 걸을 수 있다. 

☎032-772-5812 

월미도

인천에서 가장 유명했던(?) 관광지로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물을 데워 목욕물로 사용한 조탕을 개발한 곳이다. 1883년 개항지로서 인천 제물포가 선택된 데에는 월미도와의 사이에 한줄기 수로가 형성돼 있어 썰물 때에도 선박이 접안해 화물 등을 실어 나르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이유가 있었다. 

개항 이래 군사적 요새로 주목받았으나 1918년 풍치지구로 지정한 것을 시작으로 월미도 중턱에 순환도로를 뚫었고 각종 위락시설이 들어서면서 봄이면 전국에서 상춘객이 몰려들었다. 광복 후 반세기 동안 군사기지로 엄격한 통제구역이었으나, 1989년 월미도 문화의 거리 조성 이후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2001년 관광특구 지정과 맞물려 친수공간 확장과 월미산 개방이 이루어졌고, 한국 이민사박물관이 들어서서 지역의 역사성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월미도 관광안내소 032-765-4169, 월미공원 안내소 032-765-4133

맛집

1905년 개업했다는 자장면 원조집 공화춘(032-765-0571)이 아무래도 유명하다.

일반자장은 5000원인데, 공화춘 자장은 두 배인 1만원이다. 담백하고 해산물 씹는 맛이 좋다. 

이밖에도 청관(032-772-5118), 풍미(032-772-2680), 대창반점(032-722-0937)이 유명하다.

화덕에 구운 중국식 빵으로 유명한 십리향(032-762-5888)도 있다. 1개 1500원.


자장면은 없고 만두만 전문으로 하는 원보(032-773-7888), 공갈빵 등 중국식 제과를 맛볼 수 화교중산학교 맞은편의 복래춘(032-772-3522) 등이 유명하다.

신포시장의 닭강정도 빼놓을 수 없다. 신포맛집닭강정(032-764-5888), 신포원조닭강정(032-762-5800), 찬누리닭강정(032-765-1235) 등이 유명하다. 한 마리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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