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일기
백로가 지난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해가 진 뒤 밖에 나가려면 두툼한 스웨터를 손에 찾아 들고 나가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 완연해진 계절의 변화가 피부에 와 닿습니다.
▲ 가을걷이가 한창인 옥수수밭. 이 옥수수는 사료용 옥수수인데 마른 옥수수를 갈무리 해두면 농협에서 수매해 간다네요. |
마을에서 제법 높은 지대에 있는 집 덕분에 마당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여기저기 가을걷이가 한창이지만 유독 비가 많았던 올해 기후 탓에 고추농사가 잘 된 댁이 하나도 없고 다들 고추에 병이 들었으니 그걸 바라보는 제 마음도 영 씁쓸한 게 아닙니다.
그나마 수확하는 고추도 잦은 비에 제대로 말릴 수가 없어 인공적으로 바람을 만들어 작물을 말리는 건조기를 열심히 돌리고 있습니다.
▲ 비닐하우스에서 건조되고 있는 고추. 비가 유독 많은 올해 대부분의 고추가 잎마름병에 걸려 올해 정선지역 고추 농사는 모두 망쳤다고 합니다. |
그러나 농사가 제대로 안 된 마을과는 달리 올해는 저희 집 마당에는 잣이며 밤이며 참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한 두 송이 쯤 구경하고 청설모와 다람쥐에게 빼앗겼던 잣도 올해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해롱이 덕분에 비료 포대 하나쯤 수확을 할 수 있는 횡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 일을 하다 보면 ‘툭’하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고양이 해롱이가 재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는걸 보곤 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마당에 나가 보면 어김없이 해롱이가 지키고 있는 자리에 잣송이 한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해롱이는 잣송이를 떨어트려 놓은 청설모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수룩한 제 눈에는 고양이 해롱이가 잣송이를 지키고 앉아 있다고 생각마저 드는데 집 근처의 쥐는 모조리 잡아 먹어치우는 해롱이의 그간의 공은 접어 두더라도 청설모에게서 잣을 지킨 고양이 해롱이는 여간 이로운 동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고추 건조기 앞에서 소주잔을 들이키시는 마을 아주머니들. 농협 대출금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납니다. |
청설모 입장에서 보면 제가 수확한 잣을 빼앗아 버리는 악당이겠지만요. 덕분에 올 겨울에는 따듯한 방안에 앉아서 잣을 까는 한가한 재미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연이 주는 참으로 고마운 혜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잣나무 밑에서 청설모를 기다리는 해롱이. |
까먹기도 어렵고 또 그 맛도 호두보다는 덜해서 그동안은 떨어지는 대로 모아 두었다가 이곳에 오시는 손님들께 재미삼아 선물로 드리고 있는데 위염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 위염이 심한 제가 올해는 약으로 먹어 볼 요량입니다.
또 마당 한켠에 있는 삼십년 넘은 밤나무 세 그루가 올해도 어김없이 튼실한 열매들을 매달고 서 있는데 이제 곧 아침마다 마당 가득 알밤들이 떨어져 또 다른 가을의 일상을 만들어 주겠지요.
가을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을 가슴 깊이 호흡하되 가을바람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 단속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추운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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