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풍요롭고도 쓸쓸한 계절입니다
가을은 풍요롭고도 쓸쓸한 계절입니다
  • 글,사진 권혜경 기자
  • 승인 2011.06.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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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일기

백로가 지난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해가 진 뒤 밖에 나가려면 두툼한 스웨터를 손에 찾아 들고 나가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 완연해진 계절의 변화가 피부에 와 닿습니다.
 

▲ 가을걷이가 한창인 옥수수밭. 이 옥수수는 사료용 옥수수인데 마른 옥수수를 갈무리 해두면 농협에서 수매해 간다네요.
산골살이에서 네 번째 맞이하는 가을이 그간의 가을과 별반 다를 게 없을 터이지만, 그래도 처음인 것처럼 새로운 느낌의 올 가을이 자칫 쓸쓸해지려는 마음에 적잖이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제법 높은 지대에 있는 집 덕분에 마당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여기저기 가을걷이가 한창이지만 유독 비가 많았던 올해 기후 탓에 고추농사가 잘 된 댁이 하나도 없고 다들 고추에 병이 들었으니 그걸 바라보는 제 마음도 영 씁쓸한 게 아닙니다.

그나마 수확하는 고추도 잦은 비에 제대로 말릴 수가 없어 인공적으로 바람을 만들어 작물을 말리는 건조기를 열심히 돌리고 있습니다.

▲ 비닐하우스에서 건조되고 있는 고추. 비가 유독 많은 올해 대부분의 고추가 잎마름병에 걸려 올해 정선지역 고추 농사는 모두 망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싼 기름값에 그동안 농사 지은 인건비를 생각하면 이래저래 봄에 농협에서 꾸어온 농사자금도 갚지 못할 지경이라고 다들 큰 걱정들만 하고 있으니 비가 많아진 우리나라의 기후가 앞으로 농사짓는 분들의 경제만 더 어렵게 할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농사가 제대로 안 된 마을과는 달리 올해는 저희 집 마당에는 잣이며 밤이며 참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한 두 송이 쯤 구경하고 청설모와 다람쥐에게 빼앗겼던 잣도 올해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해롱이 덕분에 비료 포대 하나쯤 수확을 할 수 있는 횡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 일을 하다 보면 ‘툭’하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고양이 해롱이가 재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는걸 보곤 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마당에 나가 보면 어김없이 해롱이가 지키고 있는 자리에 잣송이 한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해롱이는 잣송이를 떨어트려 놓은 청설모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수룩한 제 눈에는 고양이 해롱이가 잣송이를 지키고 앉아 있다고 생각마저 드는데 집 근처의 쥐는 모조리 잡아 먹어치우는 해롱이의 그간의 공은 접어 두더라도 청설모에게서 잣을 지킨 고양이 해롱이는 여간 이로운 동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고추 건조기 앞에서 소주잔을 들이키시는 마을 아주머니들. 농협 대출금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납니다.
그래도 잣나무 하늘 끝에 까마득히 매달린 잣송이들을 청설모가 아니면 제게는 그림의 떡이니 본의 아니게 잣송이를 수확해 주는 청설모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

청설모 입장에서 보면 제가 수확한 잣을 빼앗아 버리는 악당이겠지만요. 덕분에 올 겨울에는 따듯한 방안에 앉아서 잣을 까는 한가한 재미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연이 주는 참으로 고마운 혜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잣나무 밑에서 청설모를 기다리는 해롱이.
잣 말고도 요사이 집 마당에는 토종 호두의 일종인 ‘가래’ 열매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까먹기도 어렵고 또 그 맛도 호두보다는 덜해서 그동안은 떨어지는 대로 모아 두었다가 이곳에 오시는 손님들께 재미삼아 선물로 드리고 있는데 위염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 위염이 심한 제가 올해는 약으로 먹어 볼 요량입니다.

또 마당 한켠에 있는 삼십년 넘은 밤나무 세 그루가 올해도 어김없이 튼실한 열매들을 매달고 서 있는데 이제 곧 아침마다 마당 가득 알밤들이 떨어져 또 다른 가을의 일상을 만들어 주겠지요.

가을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을 가슴 깊이 호흡하되 가을바람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 단속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추운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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