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바다·일출·전통의 향기, 그리고 사랑 이곳엔 모든 게 있다”
“호수·바다·일출·전통의 향기, 그리고 사랑 이곳엔 모든 게 있다”
  • 글ㆍ김경선 기자ㅣ사진ㆍ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6.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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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ark Travel 오대산 국립공원 05 강릉 도보여행

▲ 경포해수욕장의 일출

오대산 동쪽 고을인 강릉은 정갈하다. 그리고 전통의 향기가 강하다. 유교적 절제의 정신이 스며든 사대부의 군더더기 없는 가옥은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나’를 여실히 보여준다. 고구려도, 신라도, 백제도 아닌 가장 가까운 조선시대의 색채를 우리는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하지만 강릉에서는 그 색채를 재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 속을 걸어서 들여다봤다.

 

일출을 볼 때면 매번 느낌이 새롭다. 고요한 수평선 위로 해가 ‘불쑥’ 튀어나올 때면 온몸에 소름이 끼칠 듯 전율이 흐른다. 동해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더욱 아름답다. 검푸른 바다 위를 붉게 물들이는 태양의 모습은 환한 빛의 밝기만큼이나 희망차기 때문이다.

아침 7시. 경포해수욕장은 아직 어둠이 장악하고 있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두툼한 옷 사이를 파고들어 온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시간. 해수욕장은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로 들떠있었다.

“아가씨, 따뜻한 떡 좀 들면서 기다려요. 해 뜨려면 아직 멀었어. 주변이 환해지고 나서야 뜨는 거야.”

떡 파는 할머니는 어두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출 전문가다운 조언을 던졌다. 할머니의 말처럼 세상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두둥실~’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제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쓸쓸한 허난설헌 생가.

주인의 슬픈 생을 닮은 쓸쓸한 허난설헌 생가
얼얼하게 감각을 잃어버린 손을 붙잡고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 초당마을로 걸음을 재촉했다. 콩을 곱게 갈아 바닷물로 간을 한 초당 순두부는 전 국민이 다 아는 별미 중 별미. 원조라고 자처하는 많은 집들 사이에서 진짜 원조로 이름난 ‘초당 할머니 순두부’로 들어가 5000원짜리 순두부 백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웠다.

뜨끈한 순두부로 몸을 녹이고 초당마을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를 찾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무도 찾지 않은 구옥. 허난설헌의 슬픈 인생처럼 쓸쓸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행랑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 모양의 본채가 들어서 있는 집은 오랜 시간 방치됐음에도 여전히 정갈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평생의 한(恨)으로 여겼다던 허난설헌. 여성이 재능 있다는 자체가 죄였던 시대에 태어나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나보다.


▲ 정갈하고 단정한 선교장의 가옥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활짝 핀 갈대숲이 감싸 안은 은빛 호수
붉은 태양이 경포호 수면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한가로이 여유를 부리는 오리 떼들이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찰나. 그림 같은 경포호의 아침이 밝았다. 청초한 맨 얼굴을 드러낸 경포호는 활짝 핀 갈대가 감싸 안아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다.

경포호 풍경에 취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어느새 참소리 박물관에 도착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오디오 박물관인 참소리 박물관은 1400개가 넘는 축음기와 음반, 음악관련 도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오래된 축음기부터 최신 오디오까지, 오디오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가득한 박물관은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추억을 선물한다.

참소리 박물관에서 나오면 오른쪽으로 경포대가 보인다. 아쉽게도 한창 보수 공사중인 경포대는 건물 전체가 철골로 감싸있어 관동팔경이라는 명성이 무색하다.

경포호를 지나 서쪽으로 30여분을 걸어가면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인 선교장이다. 1703년에 지어진 선교장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10대에 걸쳐 300여 년 간 후손들이 정성스럽게 가꾼 가옥에서는 정갈하고 단정한 조선의 정신이 느껴졌다.

▲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생가인 오죽헌.

선교장과 가까운 곳에 사대부의 가옥이 또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 얼마나 훌륭한 자식을 만들 수 있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생가터다.

조선 최고의 사대부 가문 가옥인 선교장과 오죽헌은 서양의 여느 저택 부럽지 않은 멋스러움이 있다. 우아한 한국의 선, 절제의 미, 여백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사대부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공간이다. 고고한 곡선의 미가 돋보이는 오죽헌 처마 밑에서 ‘조선 시대 사대부 생활은 과연 어떠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 볼록한 배흘림 양식이 돋보이는 객사문.

볼록한 배흘림기둥의 선
오죽헌에서 객사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도를 꼼꼼히 살펴야한다. 율곡로를 따라 30분쯤 걷다 강릉고등학교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다시 30분을 가면 객사문. 강릉 KBS 방송국 바로 옆이라 방송국 이정표를 보고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시의 고층건물들과 어우러져 이질감이 느껴지는 객사문은 고려시대의 지방관청인 객사의 정문이다. 원래 객사는 모두 사라지고 객사문만이 남아있었는데, 최근 객사 몇 동을 다시 복원해 예전 관청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그 중에서도 객사문은 국보 제51호로 지정될 만큼 학술적 가치가 높은데, 볼록한 배흘림 형태의 기둥과 맞배지붕 등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인 간결함과 세련미가 돋보인다.

잠시 예스러움과 교우한 후 왁자지껄한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시간은 점심때를 훌쩍 넘어 배가 무척 고팠는데, 정겨운 시장 아주머니의 인심이 가득 담긴 떡볶이 한 접시를 비우고 나니 배도 마음도 넉넉히 불러왔다. 재래시장만큼 삶의 진솔한 향기가 풍겨나는 공간이 또 있을까? 도시나 시골이나 훈훈한 인심이 느껴지는 재래시장의 모습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 삭막한 콘크리트 벽 사이에 숨겨진 보물 수문리 당간지주.

오늘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 수문리 당간지주는 마을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가장 빨리 찾아가는 방법은 옥천초등학교로 가는 것. 초등학교 정문 근처에 당간지주가 서있다.

마을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보물 수문리 당간지주. 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지만 삼면이 콘크리트 벽에 쌓여 삭막한 모습이었다. 당간지주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커다란 깃대를 달아 고정시키던 장치로 수문리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의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를 보고 나와 동해로 흘러가는 강릉 남대천 줄기를 따라 하류로 걸어 내려갔다. 풍부한 수량을 뽐내며 바다로 흘러가는 이 물줄기도 처음에는 무척 작은 샘이었으리.

백두대간 너머로 뉘엿뉘엿 기우는 해가 수면 위를 은은히 비추며 하루가 끝나감을 알려왔다. 해는 매일 뜨고 지고를 반복하지만 인생은 이 강물처럼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늘따라 이 하루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도 삶이라는 게 돌고 돌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탓일까. 그리운 강릉의 하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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