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향한 오름짓
태양을 향한 오름짓
  • 글 사진·안광태 기자
  • 승인 2011.06.2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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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사람 ⑨ 태국 끄라비 해변에서 만난 ‘페트’

▲ 끄라비 해변에서 꼬리배를 모는 페트.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ahnkwangtae@hotmail.com)

“그렇게 친구를 떠나보내고 나서 저도 뱃사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페트(Phet)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별명이 페트였다. 태국이나 라오스에서 사람들에게 이름을 물어보면 대개 본명을 말하지 않고 별명을 말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친한 친구 사이에도 본명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 이름 중에서 ‘완(Wan)’은 ‘달콤한’이란 뜻의 별명이고, ‘에몬(Emorn)’은 ‘아름다운’이란 뜻이다. 별명은 꽃이고 나비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붙인다. 페트는 ‘악마’라는 뜻으로 좀 짓궂기는 하지만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과 근육질의 몸매를 볼 때, 그런대로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꿈꾸는 작은 섬, 그림 같은 꼬 피피(Ko Phi Phi)를 떠난 배는 한 시간 반가량 시원하게 파도를 가로질러 끄라비(Krabi)에 도착했다. 태국의 수도인 방콕에서 남쪽으로 7백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끄라비는 아오 빠똥(Ao Patong)의 드넓은 모래사장과 현란한 밤문화를 자랑하는 푸켓(Phuket), 아오 마야(Ao Maya)의 비단결 같은 산호사장과 옥색바다를 자랑하는 꼬 피피와 함께 교통적으로 순환 고리를 이루며 태국 남부 해양 관광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안다만 해(Andaman sea, 인도양의 벵골만 남동쪽 바다로 태국, 말레이시아 등과 접함)를 깊숙이 끌어안은 끄라비는 바다 관광객 말고도, 암벽 등반이나 스포츠클라이밍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 클라이머들의 천국, 라이 레(Rai Leh)가 있기 때문이다.

“강 건너 저쪽 맹그로브(mangrove, 해변 진흙에 긴 뿌리를 공중에 드러내고 밀생하는 홍수(紅樹)과의 상록교목) 숲 보이시죠? 그 안쪽 동네에 사는 끄라비 토종 뱃사람입니다”

페트는 끄라비 강가의 노점에 앉아 맥주 한 잔으로 늦은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꼬리 배(longtail boat, 스크루에 연결된 엔진을 직접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목선)의 운전기사였다. 그는 주로 강 안쪽 맹그로브 숲 둘레와 강 북쪽에 있는 석회 동굴, 강 남쪽에 있는 작은 섬들을 돌며 유람객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오늘도 겨우 손님 두 명 태웠습니다. 한 달 벌이라고 해 보았자, 기름값이다 뭐다 이래저래 빼고 나면 15만 바트(한화 약 4백만 원)나 주고 산 배 값, 이자 갚기도 빠듯합니다.”

해는 벌써 서산 깊숙이 자리를 틀고 앉아 사그랑주머니가 되었는데도, 후텁지근한 열기는 쉽사리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열이나 되는 식구들 입에 국수 한 가닥씩이라도 물리려면 하루에 한 팀은 받아야 하는데, 요즘이 한철인데도 통 벌이가 시원치 않아요. 공치는 날이 반이니 원, 배를 팔아버릴 수도 없고…”

페트의 투덜거림이 질펀하게 강가에 퍼졌지만 웃음 띤 그의 눈에서는 삶의 고단함보다는 팔팔한 젊음이 진하게 풍겨왔다.

▲ 끄라비의 아오 낭은 산호 해변과 석회암봉이 절묘하게 어울려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끄라비의 대표 해변 아오 낭(Ao Nang) 동편에 반도 형태로 짙푸른 열대우림이 연둣빛 바다에 푹 빠져있는 라이 레는 북쪽이 산으로 막혀 있어 육로로는 연결되지 않는 섬 아닌 섬이었다. 그 덕에 라이 레로 드나들려면 아오 낭이나 끄라비에서 긴꼬리 배를 타야했다. 다소 차분해 보이는 아오 낭 해변을 뒤로한 채 먼 바다 한 번 쳐다보는 사이에 배는 서쪽 라이 레에 닿았다.

남쪽과 북쪽으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석회암봉 사이로 평지를 이룬 작은 모래톱 위에 리조트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동 라이 레와 서 라이 레를 가르고 있었다. 해마다 1, 2월이면 바위를 즐기려는 클라이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라이 레에는 모두 6백여 개나 되는 다양한 등급의 바윗길들이 열려 있다.

동 라이 레의 남쪽과 정글로 약간 들어간 북쪽 암장에서는 이제 막 바위를 접해본 초보자들이 강사들의 절묘한 몸놀림에 탄성을 지르고 있었고, 북쪽 정글을 한참 지나 석회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똔 사이 해변(Hat Ton Sai)에서는 주저리주저리 열린 종유석들 사이로 한가락 하는 클라이머들이 아슬아슬한 오름짓들을 보이고 있었다.

라이 레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와 정글 속에 숨겨진 해적 소굴 같은 라군(Lagoon) 남쪽으로 라이 레의 하이라이트, 아오 프라 낭(Ao Phra Nang)이 있었다. 새하얀 산호사장 위로 남국의 거친 태양을 향해 오르는 화려한 몸짓이 있고, 저 세상까지라도 훤히 내다보일 것 같은 맑은 물 속에 새까만 치어들이 바다를 통째로 마시고 있는 아오 프라 낭은 안다만 해가 만든 또 하나의 환상곡이었다.

해 저물 무렵 페트의 배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강가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저도 한 때는 바위에 미쳐 살았었습니다. 바위가 주는 손맛은 마약이지요.” 마치 금단현상이라도 보이는 듯 그의 손에 들린 냉차 비닐봉지가 가볍게 떨렸다.

▲ 매년 1, 2월이면 라이 레에는 바위를 즐기려는 클라이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곳에는 6백여 개의 다양한 루트가 나 있다.
“그 친구가 떠나간 지도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 5.13(암벽 등반의 난이도를 나타내는 등급으로 5.13은 고난이도에 속한다)은 어렵지 않게 해내는 친구였는데…. 사고는 어이없는 방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선등과 확보를 번갈아가며 두 번째 피치(pitch, 선등을 마치고 후등자를 확보 보거나 다시 선등을 시작하는 등반 구간, 대략 20~30미터 정도)를 끝마쳤을 때, 사소한 실수로 친구의 확보줄과 자일이 뒤엉켰고, 손쉽게 풀고자 친구가 자신의 확보줄에 달린 잠금카라비너(karabiner, 고리 모양의 금속 장비로 자일 등과 고정물을 연결할 때 쓰임)를 열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 중심을 잃고…”

페트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놀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제게서 하얗게 사라져 버리더라고요. 그렇게 바위를 떠났습니다.”

작별을 고하는 저녁노을이 야자수 잎사귀 너머로 파라솔처럼 펼쳐져 한결 시원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오른다는 몸짓은 결국은 그 속에 떨어짐이란 단어를 간직하고 있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죽음이란 단어가 있어 삶이 아름다운 것처럼 말입니다.”

끄라비 강가의 노점상들이 야시장을 위하여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가장 화려한 오름짓은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악악거리고 아등바등하는 저 사람들의 아름다운 몸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무잡잡한 얼굴을 무너뜨리고 씨익 드러난 페트의 미소를 보다가 문득 ‘악마’라는 그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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