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발자취 따라 떠나는 역사 여행
선조들의 발자취 따라 떠나는 역사 여행
  • 글ㆍ김성중 기자 | 사진ㆍ염동우 기자
  • 승인 2011.06.2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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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ARK TRAVEL 덕유산 국립공원 02 적상산 트레킹

▲ 적상산성과 안렴대, 그리고 사고지 등 옛 문화유산과 멋진 조망을 가진 적상산은 겨울철 가족 단위 산행지로 좋다.

서창마을~장도바위~향로봉~안국사~치목마을, 총 4시간 소요

붉은 치마를 두른 적상산은 하얀 눈이 덮일 때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하늘을 담고 있는 듯 아름답게 빛나는 적상호와 고즈넉한 분위기의 안국사, 그리고 병풍처럼 산허리를 두른 단애절벽이 잘 어우러진 적상산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본다.

취재협조ㆍ덕유산국립공원 063-322-3174

산허리가 모두 적색의 단애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적상산(赤裳山, 1034m)은 그 모습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한 여인과 흡사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 100경 중 하나에 속할 만큼 절경인 적상산은 가을 단풍으로 손꼽는 산이지만 겨울 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 서창마을에서 바라본 적상산의 단애절벽. 가을에는 단풍과 어우러져 더욱 붉게 보인다고 한다.

역사가 함께 공존하는 곳, 서창마을
적상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산정이 평탄하고 산허리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유리한 방어 조건을 갖춘 천혜의 자연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역사적인 자료들이 보관되던 사고지가 있었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적상산성이 축조되었다.

▲ 고려 말기 이곳에 들렀던 최영 장군이 장도를 내리쳐 길을 냈다는 장도바위는 마치 칼로 두부를 자른 듯 반듯하게 갈라져 있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기점인 서창마을도 이러한 이유로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마을이었다. 적상산성이 축조된 후 쌀·말 등 군사물자를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서창이었다. 적상산에는 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서쪽의 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 서창이고 북쪽 창고가 북창이다. 일행이 오르는 이 길이 그 옛날에는 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적상산성을 쌓던 백성들도 오르던 길이었으리라.

화사했던 나뭇잎은 겨우내 그 힘을 다했는지 땅에 내려앉았다. 눈밭 여기저기에 솔잎이 떨어져 있었다.
“잎이 두개면 토종 소나무고 3개면 미국의 리기다소나무에요. 리기다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나죠. 또 소나무와 잘 구분이 안 되는 잣나무는 잎이 5개로 잎을 비교해보면 소나무와 확실한 차이가 나죠.”

이번 산행의 안내를 맡은 덕유산 국립공원의 장수림, 김명규 씨가 소나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산행을 하며 들은 얘기지만 숲 또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소나무에서 참나무, 그리고 서어나무로 이어지는 천이의 과정은 동물의 약육강식 세계처럼 이곳 숲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는 것일까.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적상산성과 안렴대

▲ 장도바위를 지나면 바로 적상산성의 서문에 당도한다.
50분 정도 오르니 두개로 갈라져 있는 큼직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시대의 무장 최영 장군이 장도로 바위를 갈랐다는 장도바위다. 장도바위는 마치 칼로 두부를 자른 듯 반듯하게 세로로 갈라져 있는데,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하고 귀경하던 중 바위가 길을 막고 있자 허리에 차고 있던 긴 칼을 내리쳐 길을 내고 올라갔다고 한다. 예전에는 바위틈 사이로도 등산로가 나있었지만, 지금은 통제를 하여 바위 사이로 갈 수 없다. 대신 장도바위 왼쪽으로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장도바위에서 100m 정도 오르자 새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적상산성이 나왔다. 적상산성은 동서남북으로 통로가 나있는데 이곳이 서문이다. 산성은 최영 장군이 이곳을 둘러보며 나라의 보물을 보관하기 가장 좋은 천혜의 요건을 가진 곳이라 판단하여 산성 축조를 건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유실 되었지만, 예전에는 나라의 역사적인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서문에서 10여 분 오르자 향로봉(1024m)과 적상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왔다. 보통 등산객들은 서창마을을 산행 들머리로 잡고, 정상인 적상산이 아니라 향로봉을 오른 후 올라온 길을 되짚어 다시 서창마을로 하산하는 경우가 많다. 적상산이 향로봉보다 높이가 10m 밖에 높지 않고, 무엇보다 적상산 정상은 통신기지국이 설치되어 있어 산행의 재미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향로봉에서 500m 거리에 있는 안렴대로 향했다. 안렴대는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 때는 사고에 있던 서책들을 안렴대 바위 밑 석실로 옮겨 자료를 보호하기도 한 곳이다. 사방이 낭떠러지로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 안국사 아래에는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적인 자료를 보관했던 사고지와 푸른 물로 가득 찬 적상호가 있다.

전설이 깃든 안국사와 하늘을 담은 호수, 적상호
안렴대에서 내려가는 길에 산세와 잘 어우러진 안국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77년에 창건된 절로 북창매표소에서 오르면 차로 포장도로를 따라 절 바로 아래까지 접근할 수 있다. 안국사는 원래 적상호가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양수발전소로 인해 적상호가 생기면서 위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또한 현재 안국사가 위치한 자리는 원래 조선왕조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승려가 머물던 숙소인 호국사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안국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 하나만이 이곳이 호국사였던 것을 증명할 뿐이다. 안국사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난 전설 하나를 김명규 씨가 들려주었다.

“조선말기 이곳에 부임해 온 이면광이 절이 너무 낡아 보수작업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단청을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고심을 하게 되었죠. 그때 한 노승이 찾아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해서 흔쾌히 승낙을 했어요. 하지만 극락전을 단청할 때 그 노승이 말하길 ‘석 달 열흘 동안 그 누구도 휘장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죠. 그런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스님이 약속한 날을 하루 앞두고 휘장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던 거예요. 안에서는 학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고 있었는데, 놀란 학이 그림을 그리다 말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죠. 이러한 전설 때문인지 안국사 극락전에는 아직도 단청을 마무리하지 못한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 안국사 극락전 처마 밑에는 전설에서처럼 단청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실제로 극락전의 처마 밑에는 한 평 남짓한 부분이 단청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 이야기가 비록 전설로 내려오는 것이고 적상호에서 절터를 옮긴 것이라 더욱 신빙성은 없지만, 그래도 안국사를 찾는 이들에게 좋은 이야기 거리가 될 듯하다. 안국사에 도착하면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적상호와 시원스레 우뚝 솟은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을 조망할 수 있는데, 이 경관이 아주 일품이다. 특히 안국사 내에는 주지스님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를 진열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 차 한 잔 마시며 바라보는 조망 또한 아주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일행이 갔을 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절을 관리하고 있던 보살에게 물어보니 겨울철에는 탐방객이 많지 않아 봄이 오기 전까지는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국사에서 500m 정도 내려가니 적상산 사고지가 나왔다. 우리나라 5대 사고지 중 하나였던 적상산 사고지는 조선왕조실록과 족보 등 국가의 귀중한 자료를 보관했던 곳이다. 지금의 사고지는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곳으로, 여기서 보관하던 자료는 현재 북한의 김일성대학에 있다고 한다. 적상산 주위의 마을에서는 ‘적상면 실록 반환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다시 적상산 사고지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원래 묘향산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어 쉽지 않다고 한다.

▲ 안국사에서 바라보는 적상호와 덕유산 조망은 일품이다.

안국사에서 치목마을로 향하는 하산길은 쌓인 눈과 낙엽으로 인해 미끌미끌했다. 아이젠이 없었다면 몇 번이고 엉덩방아를 찧었을지 몰랐다. 계곡에 도착하자 송대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급경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층층이 쌓인 암벽과 울창한 송림 사이로 힘차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베로 유명한 치목마을
하산길이 지루해질 무렵 저 멀리 치목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치목마을은 삼베로 유명한 조그만 농촌마을이다. 무주군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지정될 정도로 주민들의 인심이 푸근하고 조용한 곳이다. 산행을 마친 일행들에게 장수림 씨가 피로를 풀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추천했다. 바로 치목공작소.

“치목마을에 오면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소재를 이용해 곤충이나 연필, 칠판 등을 만들 수 있는 공작소가 있어요.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정착한 부부가 운영하고 있죠. 많은 사람들이 스키장이나 등산을 마치고 이곳을 찾는데 아이들과 함께하는 자연 체험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이곳엔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구들방이 있다는 거예요.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으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해소되는 기분이랄까요.”

치목공장소를 운영하는 김동열, 이정숙 부부는 서울에서 살다가 3년 전에 이곳에 정착했다.

▲ 안국사에서 치목마을로 내려오는 하산길에 만난 송대폭포.
몇 년 전 치목마을에 들렀다가 인심과 경치에 반해 빈집이 생기자마자 이사 온 것이다. 얼음조각가로 일해 오던 남편 김동열 씨는 요즘엔 목공 쪽에 관심이 많아 나무 공예에 주력하고 있다. 아내 이정숙 씨도 무주군청에서 홍보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예술가 두 명이 만나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참 부럽기만 하다.

“TV가 고장 나거나 어디 수리할 게 있으면 어르신들이 저희 집에 찾아오세요. 남편이 이것저것 솜씨가 많으니까 부탁을 하러 오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 집이 이 마을에선 만물박사 집으로 통해요. 그래도 어르신들의 인심이 얼마나 좋으신지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을 손수 갖다 주시곤 한답니다. 서로 물질적으로 이익을 챙기는 게 아닌 그저 후덕한 어르신들의 인심에 감사할 따름이죠.” 이렇게 맑은 공기와 훈훈한 시골의 인심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것은 정말 도시인들에게는 꿈같은 생활이다. 서로 음식을 나눠주고 힘든 일 있으면 서로 일손도 빌려주고….

이번 적상산 트레킹에서는 정말 많이 배웠다. 서창이란 이름의 유래부터 적상산성이 세워진 배경이나 역사 보존을 위해 들어섰던 사고지, 안국사의 유래와 선조들의 발자취, 그리고 농촌 마을의 푸근한 모습도 마음에 담아갈 수 있었다. 시골의 즐거운 부부가 권하는 국화잎으로 우려낸 이슬차 한 잔을 들이키자 오늘 둘러본 적상산의 역사가 향긋한 내음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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